나로서 존재하는 삶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사실은 너무나 살고 싶었다
옥상 난간 끝에 서 본 적이 있다. 혹은 달리는 차 창밖을 보며 '이대로 모든 게 멈췄으면 좋겠다'고 빌어본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죽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다. 10살, 교실 안의 서늘한 소외감으로부터 시작된 나의 장례식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엄마의 차가운 시선은 내 존재의 근간을 흔들었고, 사회라는 정글에서 나는 늘 길을 잃은 이방인이었다. 결혼이라는 구원군을 만난 줄 알았으나, 그곳은 또 다른 전쟁터였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남편, 나를 옥죄는 시월드, 그리고 병원 현장에서 '의료계의 소모품'처럼 취급받던 간호조무사의 삶까지. 나는 늘 나를 채찍질했다.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부족해서, 내가 사회성이 없어서 그래.”
함묵증이라는 긴 터널 속에 갇혀 입을 닫았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는 슬픔은 안으로 곪아 터져 조울증과 무기력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덮쳤다. 그때 내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고백은 늘 "죽고 싶다"였다. 하지만 그 말은 사실 지독한 역설이었다.
어느 날, 캄캄한 어둠 속에서 내 안의 작은 아이가 용트림하듯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나 좀 살려달라고. 나 좀 봐달라고. 나 사실은... 정말 잘 살고 싶단 말이야.'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나를 괴롭히는 이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죽고 싶다는 절규는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생존의 아우성이었다.
따돌림을 당하던 10살의 소녀도,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던 어린 나도,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병원 복도를 달리던 나도, 사실은 단 한 번도 삶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그저 '존중받는 삶', '나로서 존재하는 삶'을 너무나 간절히 원했을 뿐이다.
이제 나는 자책의 굴레를 벗어던지려 한다. 사회기술능력이 부족하다는 진단명 뒤에 숨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나다.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고, 남들보다 더 깊은 흉터를 가졌을지언정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 안의 고름을 짜내고 새살을 돋게 하는 치유의 시작이다. 나의 옹알이 같은 이 고백이, 나와 같은 터널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 '당신도 사실은 살고 싶은 것'이라는 따뜻한 깨달음의 씨앗이 되길 바란다.
죽음의 문턱에서 내가 길어 올린 단 하나의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는 죽고 싶은 게 아니라,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