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강물을 녹여 따뜻한 바다를 만들어준 엄마
1. 왼손잡이, 금기된 손을 든 죄
나의 어른들은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부모님과 선생님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이었지만, 동시에 나를 끊임없이 교정하려 든 감시자들이기도 했다. 타고난 왼손잡이인 내게 밥상은 전쟁터였다.
“고집이 세네, 그걸 왜 오른손으로 못 해? 당장 바꿔!”
할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식탁을 때릴 때마다 나는 울면서 밥을 씹었다. 절에 가도, 학교에 가도 사람들은 혀를 차며 나를 ‘째비’라 불렀다. 왼손으로 배드민턴 채를 잡았다는 이유만으로 체육 선생님은 나를 장애자 보듯 했다.
강한 압박에도 나는 끝내 왼손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왼손 편향주의자’가 되었다. 글씨를 쓰는 것 외에 모든 생존의 행위는 왼손이 도맡았다. 하지만 사회는 집요했다. 직장 상사에게 왼손으로 술을 따랐을 때, 상대가 싸늘하게 잔을 치우던 그 모욕적인 순간을 잊지 못한다. 다양성이 존중받지 못하는 폐쇄적인 세상에서 나의 왼손은 늘 예의 없는 손, 고쳐야 할 손으로 낙인찍혀 있었다.
2. 회초리의 기억과 유튜브 속의 환영
가정에서도 나는 늘 긴장 상태였다. 성격이 급하고 화가 많은 엄마와 내성적이고 느린 나는 어긋난 톱니바퀴 같았다. 엄마의 화를 감당하기 위해 나는 매일 눈치를 살폈다. 오빠의 꼬드김에 넘어가 과자를 주머니에 넣고 나왔던 어린 날, 엄마의 매는 채찍질처럼 매서웠다. 매에 대한 상처는 가슴 켜켜이 쌓여 흉터가 되었다.
나는 엄마가 때린 뒤에 나를 안아주길 바랐다. 하지만 매질 끝엔 언제나 차가운 침묵뿐이었다. 엄마와 나 사이엔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강이 흐르는 것 같았다. 마흔여섯이 된 지금도 나는 가끔 유튜브에 ‘회초리’를 검색한다. 드라마 속 매 맞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나는 무엇을 해소하려 하는 걸까. 내 안의 어린아이는 아직도 그 매질의 이유를 찾지 못해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3. 대물림을 끊으려는 처절한 몸부림
엄마가 된 후, 나는 굳게 다짐했다. ‘내 아이에게는 절대 매를 들지 않으리라. 실수해도 안아주리라.’ 흘리면 닦으면 되고, 젖으면 말리면 된다고, 괜찮다고 말해주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문득문득 내 안에서 튀어나오는 엄마의 말투와 행동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지독한 자책과 죄책감에 무너졌다. 나는 왜 그토록 싫어했던 모습으로 닮아가는 걸까.
4. 25년 만에 녹아내린 응어리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미안하다. 많이 때리고 안아주지 못해서... 사랑해, 딸.”
그 한마디에 가슴 속 뜨거운 응어리가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20대 초반, 방황하던 내게 10살 때의 상처를 들은 엄마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노하며 나를 감쌌다.
“그 못된 년이 내 딸한테 감히... 괜찮아, 이제 엄마가 지켜줄게.”
그건 내가 10살 그 버스 안에서, 21살 그 병원 대기실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었다. 10년, 아니 수십 년이 흘러서야 도착한 그 위로는 내 영혼에 새겨진 상처를 다시 쓰게 했다. 이제 내게 엄마는 화내는 차가운 이방인이 아니라, 평생 내 편이 되어줄 든든한 지지자다.
차가운 강물을 녹여 따뜻한 바다를 만들어준 엄마. 이제야 나직이 고백해 본다.
“엄마, 이런 엄마를 이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