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스트레인지/베리드/폰 부스>를 통해 보는, 죽음 앞의 인간.
오늘의 리뷰 한 스푼은 기존의 형식과 살짝 다르게 진행할 예정입니다.
세 가지 영화에서 주제를 이끌어내어 볼 예정인데요.
그 영화 세 편은 바로
<베리드, Buried, 2010>
<폰부스, Phone Booth, 2002>
<닥터 스트레인지, Doctor Strange, 2016>
입니다.
본 리뷰에는 스토리에 대한 전반적인 네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혹시 불편하신 분은 페이지를 뒤로 눌러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각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를 보고 올게요.
당신 발 아래 충격의 현장 (베리드) | 6피트의 땅 속, 그는 아직 살아있다!
이라크에서 근무하는 미국인 트럭 운전사 폴 콘로이(라이언 레이놀즈 분). 갑작스런 습격을 받고 눈을 떠보니 그는 어딘가에 묻혀 있다. 직감적으로 그곳이 땅 아래 관 속 임을 안 그. 그에게 주어진 것이라곤 라이터, 칼, 그리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핸드폰뿐이다. 과연 그는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폰부스>
벨이 울리는 순간... 당신은 이미 함정에 빠졌다 | Your Life Is On The Line
뉴욕의 미디어 에이전트 스투 세퍼드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설 때 그의 뒤에서 벨 소리가 들린다. 무심코 수화기를 든 순간 스투의 예기치 않은 악몽이 시작된다. 전화를 건 정체불명의 남자는 자신이 스투의 일거수 일투족을 근처 건물에서 지켜보고 있으며, 전화를 끊으면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협박한다. 스투는 정신병자의 장난 전화려니 생각하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지만 그 남자와 얘기할수록 자신이 뭔가 심상치 않은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된다. 곧 이어 전화박스에서 나오라며 자신에게 시비를 걸던 사내가 그 남자가 쏜 총에 즉사하는 것을 본 스투는 극한의 공포에 사로잡힌다. 잠시 후, 주변 사람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스투를 살인자로 간주하고 그에게 일제히 총을 겨눈다. 한 순간 스투는 공중전화 박스에 갇혀 정체불명의 남자의 감시를 받으며 경찰과 대치하는 처지가 된다. 한편 이 사건의 지휘를 맡은 라미 형사반장은 대치 상태에서도 계속 수화기를 들고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스투를 심상치 않게 여기고 상대방의 전화번호를 추적하는데.
<닥터 스트레인지>
마블 히어로의 새로운 시작!
모든 것을 초월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히어로가 온다!
불의의 사고로 절망에 빠진 천재 외과의사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
마지막 희망을 걸고 찾아 간 곳에서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을 만나 세상을 구원할 강력한 능력을 얻게 되면서, 모든 것을 초월한 최강의 히어로로 거듭나는데...
공통점이라곤 외국 영화라는 것밖에 없는 듯한 세 가지 영화.
하지만 이 영화들을 꿰뚫는 개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죽음을 앞둔 인간의 태도’
입니다.
1. 죽음 앞의 인간, 한 스푼.
닥터 스트레인지를 보면서 석연찮은 점 느끼지 않으셨나요?
영화에서는 에인션트 원을 비롯한 카르마타지의 수행자들이 아군이고, 케실리우스 및 그를 따르는 추종자를 적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케실리우스가 ‘악’인가요? 케실리우스는 처벌 받아야 마땅한 나쁜 사람인가요? 흔히 히어로물에 나오는 악당을 떠올리면 어떤가요? 아무리 적어도 세계 정복 정도의 야심은 갖고 있지 않아요? 그러나 케실리우스의 목적은 막대한 부도, 세계 정복도, 유명해지고 싶은 명성도 아닙니다. 딱 하나입니다. ‘죽기 싫다.’입니다. 베리드부터 차근히 다시 짚어보도록 하죠.
1-1. 베리드
눈을 떠보니 땅 속 관내에 묻혀 있던 폴은 자신이 갇혀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패닉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감정 조절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어쩌면 길이 있을 수 있는 상황(친구와의 전화 등)에도 불같이 화를 내게 되죠.
폴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고민하며 자신이 있는 장소를 알려주려고 하는 모습은 필사적입니다. 그 필사적임 속에 우리는 1시간 30분이라는 시간을 몰입해서 볼 수 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요.
죽음이라는 관점에서 폴을 보면 어떤가요? 자신의 구출이 힘들 수 있겠다, 나는 정말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수록 폴은 오히려 차분해집니다.
괜찮아진 것은 아닙니다. 혼란스럽고 겁이 납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은 뒤의 일을 하나하나 정리해갑니다. 동영상으로 자식에게 유언을 남기는 등의 행동을 통해서요. 자존심을 세우는 일 따위 하지 않습니다. 아내의 조언을 무시한 것도, 지금의 상황에 대한 정당화를 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미안하다.’며 후회합니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앞으로 남을 나의 소중한 아이에게 유언을 남깁니다. 폰부스에선 어떨까요?
1-2. 폰부스
정체불명의 남성에 의해 부스 근처에 갇히게 된 스투는 분노하고 욕을 하던 초기와 달리 점점 약해집니다. 처음 보는 피자 배달원에게도 쌍욕을 날리는데 거침 없었던 그였고, 자신이 하는 못된 일들에 전혀 죄책감 느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죽음이 다가오자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것을 위해 무시하고 살았던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죠. 처음에는 협박에 못 이겨 했던 자기 고백은, 점점 진솔한 마음의 고백이 됩니다. 절대 아내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말(불륜 사실 고백)도 하게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내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그것이 자신의 체면이 무너지는 것조차 이긴 셈이죠.
1-3. 닥터스트레인지
베리드와 폰 부스에서 볼 수 있듯이 죽음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극단적인 국면입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평상시엔 자각하지 않고 사는 경우가 많죠. 폴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남깁니다. 스투는 죽음 앞에서 그 동안의 허울을 벗어내지요.
그럼 케실리우스는 어떨까요? 케실리우스는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에인션트 원에게서 그 힘을 뺏고자 합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보다 큽니다. 남들에게는 영생을 주지 않고 자기만 그 힘을 이용한다며, 도리어 에인션트 원을 비난하죠. 사람들에게 죽음을 초월한 영생을 줄 수 있는 자기가 바로 정의라고 하면서요.
이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다만 폴과 스투는 죽음을 각오한 후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한다면, 케실리우스는 그러지 않습니다. 끝까지 발악하지요. 이는, 케실리우스 주변에 죽음을 초월한 인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방법이 있는데 왜 사용할 수 없느냐? 라는 마음이 바로 케실리우스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이죠.
2. 죽음 그리고 실존 한 스푼.
근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죽음을 거부하고 영원한 삶을 살고자 하는 케실리우스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잘못되었다면 어떤 부분이 잘못된 거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으신가요?
죽음에 대한 태도.
닥터 스트레인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이러한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입니다.
실존주의 상담이라는 분야에서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은 상당히 유명합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라는 책을 써내기도 한 이 사람은 수용소에서 극한의 상황을 견뎌내며 문득 주변의 그 어떤 상황에 구애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있다는 것’ 그것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삶의 의미’를 보고, 그 의미를 통해 어떠한 가치를 쫓는가, 자유롭지만 그에 응당하는 책임도 달게 수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죠.
복잡한 설명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어차피 인간은 죽는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유한함을 알고나서 그 사이의 삶. 그 주어짐에 감사하자. 그리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자. 라는 얘기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우주와도 같은 존재입니다. 명상과 자기 반성을 통해서 그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죠. 어느 새 유행어처럼 되어버린 “간절히 바라면 온 우주가 나서서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왜냐면 우주가 곧 나요, 내가 곧 우주니까요. (물론, 유행어로 만드신 분은 이것을 이룰 정도로 도가 높을 리 없으니 헛소리 맞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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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계에 있어서 죽음이란 균형이고 법칙입니다. 끝이라는 것이 항상 그러하듯 두렵고, 오지 않았으면 하기도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개념이죠.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에인션트 원은 죽음 역시 과정으로써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물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몸을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힘이라고 하면서요. 그렇기 때문에 죽음 역시 흘러가는 삶의 일부로 인식합니다.
케실리우스는 다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인간은 결국 죽는다.’ 라는 흐름을 거스르고 발악하게 됩니다. 에인션트 원과 케실리우스의 선택에서 정과 반을 결정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아니고 신일 수 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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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인션트 원 스스로는 죽지 않았으니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요? 라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에인션트 원은 확고히 알고 있었어요. 죽음에 대해 다루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위험한 일을 초래할 수 있는지. 아니, 그 전에 죽음에 대해 다룬다는 그 막강한 권위가 사람을 얼마나 유혹할 수 있는지.
그렇기에 그 유혹에 빠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이 그 힘을 컨트롤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야만 한다고 결정한 것이죠. 데스노트를 습득했을 때 모두 망설임 없이 라이토의 아버지에게 그 노트를 맡긴 것과 비슷한 꼴이랄까요...? 쓰지 않을 자신이 있기 때문에 독을 품고 있는다. 이는 숭고한 희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니까요.
3. 닥터스트레인지 차기 이야기 예상 한 스푼.
저는 마블 만화도 보지 않고 솔직히 세계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닥터 스트레인지 스토리만 보고 미루어 보았을 때 이런 예상을 하게 되더군요.
에인션트 원과 케실리우스의 갈등이 죽음을 컨트롤한다는 강력한 힘. 그 힘을 통제하기 위해 일부러 그 힘을 이용하게 되는 모순. 그 가치관 상충을 그리고 있다면
닥터 스트레인지 2편에서는 자연의 법칙을 무시하고 시간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닥터 스트레인지와 자연의 법칙이기에 그 어떤 인위성도 가미해선 안 된다는 모르도 남작. 융통성이라는 범위에서 상충하게 되는 둘 간의 갈등을 그리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이상 베리드의 폴, 폰부스의 스투, 닥터 스트레인지의 케실리우스 모두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공통점에서 시작했던 리뷰였습니다.
여러분은 당장 코 앞에 죽음이 다가온다면 웃으며 손을 잡을 수 있나요?
혹시 그러지 못 한다면 여러분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요?
이 생각 그 자체로 여러분이 삶에서 가지는 가치와 그 의미는 크게 바뀔 지도 모릅니다.
어때요? 이 세 편의 영화 보시면서
내게 다가올 죽음의 의미를 한 번 사색해보시는 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