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24화)

갑옷을 벗는 시간

by 씨킴



나목



벌거벗은 나목도

낙엽의 옷을 벗고,

대지 위로

따사로운 온기를 전하는데...


꾸밈에 지친 삶은

허영의 갑옷을 두른 채,

백주 하에

차디찬 갑엽만 채우고 있다.


저마다 짊어진 짐은

자정을 거치고,

누구에게나 탐욕은 있으나

서로 나눔으로 하여


우리가 겪는 이 만사,

벌거벗은 세상사도

생각하는 만큼 심각하거나

과히 삭막하지도 않다.












[갑옷을 벗는 시간]


​1. 허영의 갑옷


​'선우'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맞춤 정장과 값비싼 시계, 그리고 잘 닦인 구두. 그것은 성공한 비즈니스맨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지만, 선우는 그것을 **'허영의 갑옷'**이라 느꼈다.

​백주 대낮의 도심은 화려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꾸밈에 지친 삶을 이끌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완벽한 포장지를 두른 채 바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 갑옷 안의 온도는 영하에 가까웠다. 겉모습이 화려해질수록 마음속에는 차디찬 **'갑엽(껍데기 잎사귀)'**만 차곡차곡 쌓여갔다. 선우는 갈수록 자신이 삭막해지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2. 나목의 온기


​지친 발걸음으로 도심 한복판의 작은 공원에 들어섰을 때, 선우는 발가벗은 채 서 있는 겨울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잎사귀 하나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떨궈낸 나목이었다.

​초라해 보일 법도 하건만, 나목은 오히려 당당했다. 치장을 포기한 나무는 제 몸을 가리던 낙엽의 옷을 벗어 던짐으로써, 비로소 대지의 따사로운 햇볕을 온몸으로 직접 받아내고 있었다.


'저 나무는 벌거벗어서 따뜻하구나.'


​선우는 자신의 갑옷 같은 정장이 나무의 메마른 가지보다 훨씬 더 차갑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3. 자정을 지나는 짐


​사람들은 저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짐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그 짐의 정체는 대개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이거나, 남보다 더 빛나고 싶은 허영이다. 선우 역시 그 짐을 지고 자정을 넘기며 고민하는 밤이 많았다.

​하지만 눈앞의 나목은 가르쳐주고 있었다. 탐욕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그것을 짊어지고 괴로워하기보다 나무가 잎을 떨구듯 서로 나눔으로써 덜어낼 수 있다는 것을. 내가 쥔 것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타인에게 전할 수 있는 온기가 생긴다는 평범한 진리였다.



4. 벌거벗은 세상사


​선우는 넥타이를 살짝 늦추고 나무 곁의 벤치에 앉았다.

​우리가 겪는 이 복잡한 만사도, 알고 보면 결국 벌거벗은 세상사일 뿐이었다. 스스로가 만든 허영의 굴레에서 벗어나 생각해보니, 삶은 생각만큼 심각하지 않았고 세상은 과히 삭막하지도 않았다. 삭막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걸고 갑옷을 입고 있던 자신이었다.

​선우는 잠시 눈을 감고 겨울바람을 맞았다. 정장 위로 느껴지는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나목처럼 진실하게 서 있겠다는 다짐이 마음속에 작은 온기를 피워 올렸다.

작가의 이전글조신(23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