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25화)

포도의 시간

by 씨킴


포도



아내가 묻는다.

남겨 온 포도를 먹다 말고,

종일 밖에서 쉬었다 왔는데 왜 이리 피곤한지를.


나는 평생에

잊히지 않는 여행을 다녀오거나 달콤한 식사를 한 기억이

내 인생에 반짝반짝 빛나는 때는 거의 없었다.

멋진 경물이랄지 맛깔스러운 맛집이란 걸 빼면,

내 가슴을 뛰게하거나 설레는 감흥을 받아 본 적이 별로 없다.


누구는 생애 첫 친구를 소싯적에 만났다고 자랑하지만

나는 학창시절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친구다운 친구 하나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는 간만에, 실로 우리 두 부부가 한데 야영을 떠났는데

그 긴한 포도를 건네는 일을 깜빡 잊고 헤어진 것이다.


노인이 되고서야 뒷짐을 지는 것도 아니다.

내 인생을 다시금 반짝반짝 빛나게 해 준...

내 절친한 친구에게는 항상 제 몫을 놓치고 만다.

내 소중한 사람에게는 짐짓 부족함을 드러내며 살다가,

내 사랑하는 이에게도 필경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하고 죽으리라.


밖은 거대한 공간이다.

자연이라는 거대한 공간에서는 아무리 놀면서 쉬었다 한들

움직임은 덜해도 피곤이 더해지는 법이다.

어쩌면 우리들의 영혼이 집밖에서는

드넓은 자연 속을 무한히 헤매어 떠도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생각났다.

포도가 왜 아내의 손아귀에 있는지를,

그리고 나는 줄줄이 답해 주었다.

포도는 우리보고 열매를 나누어 먹으라 송아리로 맺고,

또 제 과실을 서로에게 먹이려 달고 새큼하게 열리는지를.















[포도의 시간]


​식탁 앞, 아내가 남겨온 포도 알을 하나씩 떼어 입에 넣으며 물었다.


"여보, 종일 밖에서 그렇게 쉬다 왔는데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요?"


​그 물음에 답하려다 말고 나는 아내의 손가락에 들린 포도 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내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거대한 자연의 품에서 분명 휴식을 취하고 돌아왔다. 하지만 내 몸은 마치 험한 산맥이라도 넘고 온 듯 무거웠다.

​내 인생에는 남들이 말하는 '반짝이는 순간'이 그리 많지 않았다. 평생 잊히지 않을 여행지라거나, 혀끝을 황홀하게 했던 미식의 기억들도 나에게는 그저 무덤덤한 경물(景物)이나 한 끼의 끼니로 흘러가 버리곤 했다. 가슴이 뛰거나 설레는 감흥에 무딘 채로, 나는 메마른 길을 걷듯 살아왔다.

​인연 또한 그랬다. 누구는 소싯적에 평생의 지기를 만났다고 자랑하지만, 나는 학창 시절이 다 지나고서야 비로소 친구다운 친구 하나를 얻었다. 이번 여행은 실로 오랜만에 그 친구 내외와 우리 부부가 함께 떠난 야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소중한 시간 속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내가 정성껏 챙겨온 포도 송이를 친구에게 건네는 일을 깜빡 잊고 헤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왜 항상 소중한 사람 앞에서 이토록 서툰 것일까.


​"여보, 사람은 집 밖에 나가는 순간부터 영혼이 길을 잃어서 그래."


​내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밖이라는 공간은 너무나 거대하다. 자연이라는 드넓은 공간 속에 놓이면 우리들의 가느다란 영혼은 제집을 찾지 못하고 무한히 헤매며 떠돌게 된다. 몸은 가만히 앉아 쉬고 있을지언정,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은 그 광활한 허공을 휘젓고 다니느라 기진맥진해지는 것이다.

​아내가 말없이 포도 껍질을 발라냈다. 나는 아내의 손아귀에 들린 그 포도알을 보며,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갈 부채감을 생각했다. 내 인생을 비로소 빛나게 해준 친구에게는 늘 제 몫을 챙겨주지 못하고, 곁을 지켜준 소중한 사람에게는 늘 부족함만 드러내며 산다. 이대로라면 가장 사랑하는 아내에게조차 그 은혜를 다 갚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포도는 왜 이렇게 달지?"


아내가 웃으며 내민 포도 알 하나가 입안에서 톡 터졌다. 달고 새큼한 즙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문득 한 가지 대답이 머릿속을 스쳤다.


​"포도가 왜 송이송이 맺히는 줄 알아? 혼자 다 먹지 말고 열매를 나누어 먹으라고 그렇게 열리는 거야. 그리고 제 과실이 이토록 달고 새큼한 건, 서로의 입에 넣어주며 그 맛을 기억하라는 뜻이지."


​아내의 손에 들린 포도는 결국 여행지에서 전하지 못한 나의 미안함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 남아준 인연에 대한 보답이었다. 나는 아내가 건네준 포도를 씹으며, 밖에서 헤매던 내 영혼이 비로소 안방의 따뜻한 공기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비록 제 몫을 다 갚지 못하는 서툰 인생일지라도, 남겨온 포도를 함께 나누는 이 짧은 시간만큼은 내 생에서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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