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좋은 날(42화)

초록 향기가 흐르는 안부

by 씨킴



바람 좋은 날



날이 좋다, 밖에 나가 보아라.

언제 이런 바람을 맞아 보겠느냐.

마른장마에, 마파람에

간밤에 떨어진 호두열매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바람에 돌돌 구르는 알갱이가 좋고,

손가락을 쏙 빼닮은 이파리가 좋고,

설익은 해호두 초록 향이 좋고,

무엇보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바람이 좋다.

이런 날이 언제 또 오겠느냐.










[초록 향기가 흐르는 안부]


​1. 문을 여는 바람


​며칠째 이어지던 눅눅한 마른장마가 잠시 숨을 고르는 오후였다. 낡은 작업실에 박혀 활자만 들여다보던 ‘윤’은 창틀을 흔드는 생경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아니었다. 먼 바다에서부터 달려온 마파람이 나뭇잎을 세차게 흔들며 건네는 노크 소리였다.


​"날이 좋다. 일단 밖으로 나가 보렴."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윤은 홀린 듯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2. 지천에 깔린 보석들


​마을 어귀 호두나무 길에 들어서자 풍경은 이미 축제였다. 간밤의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한 호두 열매들이 지천으로 깔려 길 위를 뒹굴고 있었다. 발끝에 채여 돌돌 구르는 그 단단한 알갱이들의 소리가 경쾌했다.

​윤은 허리를 숙여 설익은 해호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스치자 톡 터져 나오는 초록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싱그럽다 못해 아릿한 향이었다. 머리 위로는 손가락을 쏙 빼닮은 이파리들이 바람의 박자에 맞춰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소란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3. 바람 끝에 매달린 이름


​바람은 단순히 공기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잠들어 있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였다. 나뭇잎이 몸을 뒤집을 때마다, 호두알이 굴러갈 때마다 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사람, ‘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바람이 불 때면 너는 항상 아이처럼 뛰어나갔었지."


​연은 바람 좋은 날을 결코 허투루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윤은 이제야 깨달았다. 오늘 이 바람이 유독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람의 온도나 호두의 향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바람의 결마다 연의 웃음소리가 묻어 있었고,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연의 가냘픈 손가락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이 바람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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