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향기가 흐르는 안부
바람 좋은 날
날이 좋다, 밖에 나가 보아라.
언제 이런 바람을 맞아 보겠느냐.
마른장마에, 마파람에
간밤에 떨어진 호두열매가 지천으로 깔려 있다.
바람에 돌돌 구르는 알갱이가 좋고,
손가락을 쏙 빼닮은 이파리가 좋고,
설익은 해호두 초록 향이 좋고,
무엇보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바람이 좋다.
이런 날이 언제 또 오겠느냐.
[초록 향기가 흐르는 안부]
1. 문을 여는 바람
며칠째 이어지던 눅눅한 마른장마가 잠시 숨을 고르는 오후였다. 낡은 작업실에 박혀 활자만 들여다보던 ‘윤’은 창틀을 흔드는 생경한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습기를 머금은 무거운 바람이 아니었다. 먼 바다에서부터 달려온 마파람이 나뭇잎을 세차게 흔들며 건네는 노크 소리였다.
"날이 좋다. 일단 밖으로 나가 보렴."
마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윤은 홀린 듯 겉옷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2. 지천에 깔린 보석들
마을 어귀 호두나무 길에 들어서자 풍경은 이미 축제였다. 간밤의 거센 바람을 이기지 못한 호두 열매들이 지천으로 깔려 길 위를 뒹굴고 있었다. 발끝에 채여 돌돌 구르는 그 단단한 알갱이들의 소리가 경쾌했다.
윤은 허리를 숙여 설익은 해호두 하나를 집어 들었다. 껍질을 스치자 톡 터져 나오는 초록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그것은 싱그럽다 못해 아릿한 향이었다. 머리 위로는 손가락을 쏙 빼닮은 이파리들이 바람의 박자에 맞춰 서로의 몸을 부딪치며 소란스럽게 속삭이고 있었다.
3. 바람 끝에 매달린 이름
바람은 단순히 공기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잠들어 있던 기억을 흔들어 깨우는 촉매였다. 나뭇잎이 몸을 뒤집을 때마다, 호두알이 굴러갈 때마다 윤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사람, ‘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바람이 불 때면 너는 항상 아이처럼 뛰어나갔었지."
연은 바람 좋은 날을 결코 허투루 보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윤은 이제야 깨달았다. 오늘 이 바람이 유독 좋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람의 온도나 호두의 향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 바람의 결마다 연의 웃음소리가 묻어 있었고, 흔들리는 이파리들이 연의 가냘픈 손가락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너를 생각나게 하는 이 바람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