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모처럼 당신과 얽힐 수 있다면
미리(우찬)의 시간(소설연재 10)
“가고 싶지 않아.”
미리는 눈물을 닦아 내지 않았다.
우찬도 섣불리 미리에게 다가가 눈물을 닦아줄 수가 없었다.
가고 싶지 않다는 미리의 말끝이 흐려졌다. 동그랗게 등을 말아 소파 쪽으로 돌아앉는 미리가 위협을 앞에 둔 작은 콩벌레같이 느껴졌다.
콩벌레가 몸을 동그랗게 말 때는 그냥 놔둬야 한다.
손을 대면 댈수록 더 동그랗게 말아버릴 거였다.
한참을 놔둬야 비로소 위협이 사라졌다고 판단하고서 몸을 풀고 어디로든 움직이는 것을 어릴적 충분히 경험했던 우찬은 동그랗게 몸을 웅크린 미리를 그냥 놔두고 잠시 식탁으로 가서 앉았다.
하지만 비행기표는 서둘러 예매해야 했다.
주말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시간대별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12월부터는 목요일 오후부터 저가의 제주행 비행기 표들은 남아있는 게 없다시피 했다.
코로나가 지나면서 해외여행 봇물이 터졌고 제주행 비행기들이 근거리 해외용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코노미석을 십오만원 가까이 되는 정가대로 사거나 아니면 항공사 코너에서 기다리다 비상용 대기좌석이 이륙 코앞까지 그대로 공석으로 남는 티켓을 구하는 방법도 급할 땐 그나마 다행인 셈이었다.
“서두르지 않으면 비행기 표 구하기 쉽지 않을 텐데.”
“이제 내가 알아서 할게. 찬이는 그냥 돌아가.”
쪼그려 앉아있던 미리가 일어나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울어서 벌게진 눈가가 창백한 미리의 얼굴에 오히려 생기를 보태주고 있었다.
“티켓팅은 내가 해줄게. 당신은 가방을 좀 싸지. 챙겨갈 것이 많을 것 같아.”
우찬이 이어서 다소 단호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장례식장이든 할머니 댁이든 근처까지라도 데려다줄게. 그것까지는 내가 하게 해 줘.”
미리가 소파에서 부스스 일어나 우찬을 보며 낮지만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북촌이랑 성산이 얼마나 가까운 거리인지 알잖아. 성산이 고향이라는 걸 알았을 때 이미 좀 늦었다는 걸 알았는데... 도망칠 기운이 없었는지 도망치고 싶지 않았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도망가지 못했어.”
“너와 서로의 삶에 깊이 개입하고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는 게 이미 너무 벅차.
할 수만 있다면,
그냥 우리 둘만의 시간과 공간만 허락된다면, 가능한 한 오래오래 같이 하고 싶은데
그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모르는게 아니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찬이 니가 뭐라고 하든.
결국 너랑 내가 살아온 배경이나 너랑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또 얽혀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고 그 얽힘들 때문에 더 많은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복잡하게 관계가 변해가는 걸 원하지 않아.
두려워.”
“감당할 자신이 없어.”
미리는 꾹꾹 눌러서 말을 이어갔다.
그게 얼마나 힘들여 말하는 건지 듣고 있는 우찬도 힘이 들었다.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지만.”
미리가 한참 있다 조금 기운 빠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어 갔다.
“찬아.
그냥 똑 떨어진 나만 바라봐주면 안 될까?
나를 만들어준 내 지나간 시간들 속의 사람들과 나를 함께 떠서 안으려고 하지 말고
오늘 이전까지 니가 알고 있던 ‘나’만 골라내서
조금만 더 같이해주면 안 될까?”
발코니의 갈색 버티컬은 모처럼 활짝 열려있었고 흐린 겨울의 낮은 햇살이 미리의 얼굴 뒤에서 역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미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소파 위에 있던 쿠션을 배 쪽으로 끌어안고 서둘러 화장실로 뛰어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쿠션을 화장실 밖으로 집어던지고 변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힘겹게 토를 하기 시작했다.
미리가 그 말을 하기 위해 얼마나 안간힘을 썼을지 우찬은 이미 알겠어서 속으로 염려하고 있던 참이었다.
점심에 먹었던 찐 양배추가 소화가 덜 된 채 노란 위액에 섞여 나오는 게 보였다.
우찬은 미리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았다.
우찬이 미리의 등을 쓰다듬어 내려줬다.
조금만 긴장하면 딸꾹질하고 툭하면 파르르 하며 손끝을 떠는 미리의 쇠약함을 이미 알고 있던지라 우찬은 미리가 토하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 일단 좀 쉬자. 지금은 아무 생각하지 마. 따듯한 물을 좀 마시게.”
미리를 부축해서 안방 침대에 눕히고 우찬이 전기주전자에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정방형의 식탁 위에는 고사리가 살고 있는 작고 납작한 유리그릇 하나와 커피주전자 하나가 있었다.
뚜껑 꼭지와 손잡이, 가열기 부분이 밝은 우드 색이고 몸체가 하얀 전기주전자 였다.
커피도 마시지 않는 미리가 커피주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유리 접시에 담긴 고사리는 갈색의 다공질 현무암에 뿌리 일부를 부착시키느라 낚시 줄로 살짝 묶여 있었고 작은 바위의 일부는 두꺼운 이끼로 덮여 있었다.
장식이 거의 없는 미리의 집에 화분이 몇 개 있었는데 파키라 화분 두 개와 고사리 화분이 대여섯 개 있었다.
파키라는 미리가 처음에 팔손이인 줄 알고 사 왔다고 말했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팔손이나 고사리가 제주에서 가장 흔한 식물 종이라는 걸 우찬은 비로소 깨달았다.
진실의 미간이 있다면 진실의 심장도 있을까?
심장 한쪽이 저절로 찡그려지는 것 같은 느낌에 우찬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바탕 끓어 오른 물을 머그잔에 붓고 다시 찬물을 더 섞어 백탕을 만들어서 온도가 적당한지 한 모금 마셔보고 미리에게 가져다주었다.
소동이라면 소동이었을까? 소파 뒤에 숨어 있던 니모가 슬그머니 기어 나와 어느새 안방 침대에 누워있는 미리에게 다가가 미리의 어깨에 이리저리 몸을 비비다 붙여 앉았다.
니모가 처음으로 우찬을 피하지 않고 미리의 옆에 가만히 앉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