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강물, 아키스의 강.
"넌 누구고 어디서 왔어?"
"왜 이렇게 피부가 까매?"
"엄마 아빠는 없는 거야?"
이런 질문의 요점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질문이 된통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무례한 질문'들이 소나기처럼 거침없이 쏟아져 냉랭해진 안면을 강타했다. 굳은 표정에 방울들이 굴곡진 뺨을 타고 흘러 울적한 마음을 깊숙이 후볐다. 두 가락의 빗방울은 끝끝내 피로 얼룩져 곱게 다린 셔츠를 적셨다. 창살 같은 질문에 맞서 더욱 예리하고 뾰족한 대답을 해야 모멸감 그 자체인 상황이 잠시나마 풀릴 터였다.
새롭게 부여받은 나의 첫 명찰, '미숙아'.
그다음, '입양아'. 그리고 '보육원 생활자' 혹은 '보호 대상 아동'.
고아는 일반가정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 비해 인적 및 자원적인 차원에서 열등한 부류로 간주되어 '사회적 약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첫째, 부양할 가족이 없으며 오로지 단신으로 생활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직접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법인재단의 그늘 아래 보호를 받는 것이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이유다.
보호 대상 아동이 고아로 된 상황은 다양하면서도 천차만별이다. 당시 나는 재단이라는 화단 안에서 자라는 온실 속 화초였다. 어찌어찌 얻은 일용할 하루를 담당자 수녀님을 통해 이어나갔다. 집 하나 없는 길바닥에서 거리생활을 했더라면 그나마 부지했던 목숨이 더욱 위태로웠을 것이고, 남은 인생이 말도 안 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다 큰 위험을 안아야 할 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덕에 사회 보육시설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묵혀둔 내면의 시커먼 어두움은 쥐도 새도 모르게 커져만 갔다. 안정적인 삶은 불안정한 길바닥에서 안정이란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자아를 수차레 위협했다. 유달리 튀는 피부색에 집중된 시선과 무언의 폭력은 나를 나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다. 어두운 장소에서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신체폭행과 성추행은 성 정체성의 혼란을 비롯하여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없음을 확정 짓게 만드는 자기혐오의 시초가 되기도 했다. 그렇다. 혼돈을 여러 번 조합하여 광활한 세상에 내던져진 나는 폴리페모스*클론들의 주거지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폴리페모스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외눈박이 거인족의 이름이며 키클로페스 중 한 명이다. 폴리페모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귀향하던 오디세우스 일행을 잡아먹으려다 눈을 찔려 장님이 되었다. 그는 눈이 멀기 이전에 아름다운 님페 갈라테이아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다른 연인인 아키스와 함께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에 폴리페모스는 바위를 던져 아키스를 무참히 죽였다.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과 바다의 님페 토오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토오사는 해신(혹은 바다 괴물) 포르키스의 딸로 괴물 에키드나, 고르곤, 그라이아이 등과 자매지간이다. 그는 갈라테이아에게서 세 아들 갈라테서, 켈토스, 일리리오스를 얻었다.
오디세우스에 의해 눈이 멀기 전, 폴리페모스는 바다의 님페 갈라테이아를 사랑하고 있었다. 갈라테이아는 해신 네레우스의 딸들인 50명(혹은 100명)의 아름다운 네레이데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님페였다. 예언자 텔레모스는 폴리페모스가 오디세우스라는 자에게 시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자 이미 자신은 사랑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갈라테이아는 사랑하는 다른 연인이 있었다. 그녀의 연인은 열여섯 살의 아름다운 소년 아키스였다. 갈라테이아가 아키스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자 폴리페모스는 질투심에 안달이 났고, 그가 그럴수록 갈라테이아의 마음은 폴리페모스에게서 멀어졌다. 갈라테이아는 폴리페모스를 싫어하는 마음과 아키스를 사랑하는 마음 중 어느 것이 더 큰지 몰라 혼돈에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폴리페모스는 여느 때처럼 노을이 지는 해변 바위에 홀로 앉아 애타는 마음을 피리로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폴리페모스는 석양이 떠오른 해변에서 아키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는 갈라테이아를 발견했고, 곧이어 분노가 폭발했다. 그의 성난 목소리에 잠이 깬 갈라테이아는 화들짝 놀라 자리를 떠났고, 폴리페모스는 산에서 커다란 바위를 뽑아 아키스를 향해 내던졌다. 바위는 그대로 아키스를 깔아뭉갰고 바위 밑으로 아키스의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슬픔에 잠긴 여신 갈라테이아는 연인의 피를 맑은 강물로 만들어 아래로 흐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아키스는 강의 신이 되었다.
폴리페모스의 분노는 자아의 영역을 물감처럼 붉게 물들였다. 폴리페모스의 정신과 하나로 이어진 나는 아키스의 붉은 강을 한 모금 마시고 난 뒤에 이것이 단순한 피 맛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분노의 맛, 후회의 맛, 처절한 고통과 후회의 맛이었다. 아키스의 강물은 독이 든 성배였다. 혼돈과 혼란으로 어지럽혀진 상태에서 태어난 어린 시절의 나는 아키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조금씩 자라났지만 또 다른 나 폴리페모스에게 질투를 사 끔찍한 죽임을 당했고, 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 갈라테이아는 아키스를 애도하고 있다. 폴리페모스의 눈에서 흐르는 건 눈물이 아니라 아키스, 자신의 피일 것이다. 그가 뒤통수를 더듬자 제멋대로 조각난 두개골이 만져진다. 내용물은 텅텅 빈 공허만 남아있을 뿐이다. 머리는 바위에 짓뭉개져 으깨진 고깃덩어리가, 아니 고깃덩어리라고 할 수도 없는 오브제가 된 것이다. 그는 후회하면서도 아키스의 자잘한 형체를 남기지 않고 바위로 내려친다. 완벽하게 고르고 붉은 액체가 될 때까지. 세게, 세게, 더 세게 바위를 내리꽂는다.
완전히 조각나 으스러진 아키스를 뒤로 하고 폴리페모스는 혼자 돌아서 앉는다. 울분을 토할 때마다 고통이 스며든다. 잘린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온다. 아키스의 눈물이자 폴리페모스가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처절한 후회이다. 한때는 연인이었던 갈라테이아가 준 조건 없는 사랑이다.
나무 뒤에서 흐느끼는 갈라테이아가 이 쪽을 본다. 울다 지쳐 쓰러진 나는 강물에 손을 대었고 안타까움의 감정으로부터 철저하게 숨겼던 분노가 날뛰는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말라가는 정신이 신경감각이 죽은 세포가 되어버린 것처럼. 서서히, 아주 천천히 통증에 무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다음 또다시, 억척스럽게 붙어버린 새로운 호칭이 뒤로 붙었다.
'고아'
4살의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넌 대체 어디의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