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위도우 고영희, 천하장사 김호동.
"야옹~애오옹."
한국으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곁으로 새로운 가족이 들어왔다. 아파트 2층에 과연 어떤 고양이가 스스로 올라올 수 있을까? 불가능했다. 이 아파트는 경비가 삼엄하다고 동네방네 알려져 도둑놈이 들렀다간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었다. 고라니나 멧돼지의 기척이 느껴지기라도 하면 군청색의 경비 아저씨들이 곤봉을 들고 달려 나와 추격하는 시나리오가 예상된 결말로 갔을 것이다. 하지만 가녀린 새끼 고양이는 예외였다.
박사님은 한참 동안 종이박스를 걱정스레 바라보셨다. 고양이 울음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박스 안쪽이었다. 얼핏 봐도 늦둥이처럼 보인 그 고양이는 선천적으로 약했다. 자그마한 회색 털 뭉치를 보고 있노라면, 소싯적의 내가 생각났다. 그 애와 마찬가지로 나도 미숙아였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발견하신 거예요?"
박사님은 부엌에서 물 안에 쇠그릇을 넣고 우유를 중탕하고 계셨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는 고양이 분유나 사료 같은 새끼 고양이 맞춤형 제품이 없었다. 고양이 분유를 얼른 사서 앵앵거리는 핏덩이에게 젖병을 물려주면 좋은 상황이겠지만 새벽에 긴박 광고 프로그램을 보는 행동은 웬만해서는 우리 집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TV 시청은 주말이나 방학에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아무리 방학이라도 새벽에 시청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박스 속에 담긴 아담한 고양이는 새벽 내내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기를 바라듯 한참을 칭얼거렸다. 그때 교수님께서는 졸린 눈이었지만 '세상에 웬일이'를 본 듯한 반응으로 주방 문간을 짚으며 물으셨다.
"이게 뭐야? 고양이야?"
나와 박사님은 애써 박스를 숨기려 했지만 결국 들켜버리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나완 다르게 박사님은 옅은 한숨을 내뱉고 이내 침착하게 대답하셨다.
"여보, 잠시 새벽에 산책하다가 음식찌꺼기 통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어요. 자세히 보니 이 아이더라고요. 잘 책임질 테니까 데리고 있으면 안 될까요?"
교수님은 사뭇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셨지만 못 이기는 척 허락하시고는 다시 잠자리로 가셨다.
"휴, 정말 다행이에요. 저였어도 아마 그냥은 못 지나쳤을 거예요."
그리고 얼마 뒤 호동이가 찾아왔다. 호동이는 국내 토종견인 동경개다. 동경개는 국내에서도 생소한 견종이 지다. 외형을 보면 거의 진돗개나 다름없다. 친숙한 이미지와 어리숙한 표정이 고영희만큼 귀여웠다. 모든 개들이 그렇겠지만 특히 호동이는 대체적으로 사람을 매우 좋아해 친화력이 장점이었다. 어느 날 나는 찹찹 거리며 방을 돌아다니던 호동이를 보다 식사 중에 농담을 던졌다.
"호동이는 꼬리가 짧으니까 엉덩이를 흔들겠네요."
이에 박사님이 박장대소하셨다. '이 개그는 별거 아냐'라는 식의 엄격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싶었지만 곁에 있던 형이 맨바닥에 왼쪽 뺨을 붙여 깔깔대는 걸 보고 같이 웃었다. 개는 인간을 보면 반갑다는 표시로 밝은 표정으로 꼬리를 흔들거나 혓바닥으로 핥곤 하지만, 호동이는 달랐다. 어떻게 꼬리를 흔들까? 꼬리뼈가 있는 부분을 보면 솜뭉치로 띵띵 뭉쳐있기만 하지 거의 퇴화되었다. 그래서 한참 동안 원리를 생각하다 떠오른 게 이런 시시껄렁한 농당이었다. 스탠딩 코미디는 아니지만, 웃겼으니 만족했다.
호동이가 우리 집에 오기 며칠 전, 나는 꿈을 꿨다. 웬 승냥이 무리가 푸른 눈에 불을 켜고 아파트 단지의 사람들을 물어 살해하기 시작했다. 행여 찬바람이 들어올까 베란다 문을 거의 닫은 틈으로 망을 보고 있던 나와 형은 덜덜 떨면서도 짐승들이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라오지 않기만을 바랬다. 유리 자동문이 깨지는 소리가 나서 놀란 마음에 즉각적으로 가족 모두가 있는 할아버지 방으로 갔다. 평소의 할아버지를 보면 점잖고 차분한 표정이셨지만, 왠지 모르게 그 분위기가 험악하고 무서웠다. 어떤 맹호라도 일순간에 압도할 분위기였다. 타이밍 맞게 철문을 부순 타락한 승냥이 한 마리가 할아버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픽하고 쓰러졌다. 보조 아주머니가 나서서 할아버지를 호위하려 했지만 할아버지는 손짓으로 그러지 말라고 하셨다. 아주머님도 이미 아셨을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두려운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영겁의 시간이 흐른 후 해는 작은 새싹처럼 움터갔다. 새벽을 덮은 어둠이 걷히고 붉은 아침은 슬며시 그 자리에 둥근 방석을 깔고 내리 앉았다. 푸른 눈동자들이 달아났다.
할아버지의 민머리에 비친 해를 보다 꿈에서 깨어보니 시간은 어느덧 오전 9시. 호동이 산책시간이었다. 식빵을 사 오라는 교수님의 심부름으로 형과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파트 근처 마트에 들렀다. 자일리톨 껌이 너무 씹고 싶어 심부름과 동시에 도둑질을 감행했다. 가게 주인아저씨가 캐셔를 만지작 거리며 다른 일을 하는 동안 기회를 틈타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헤이, 헤이."
별칭 '지옥의 수문장'. 멀대같이 큰 형이 자전거로 내 바퀴를 멈추었다.
"그거 도로 갖다 놔. 식빵에 껌이 웬 말이냐."
하여튼. 케빈에 버금가는 작전을 했다 하면 늘 앞을 가로막고 있던 건 아군일 줄로만 알았던 형이었다.
신은 거짓을 행하면 죄가 된다고 했다. 신실한 종교인은 아니었어도 형의 양심에 밀려 성경대로 나의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형은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나는 이 짓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할 정도로 참 나쁜 아이였다. 어쩌면 내가 형을 몰랐나. 바르게 성장하려면 올바른 행동을 책임감 있게 짊어져야 하는 것을.
여름방학이 끝난 후 3학기의 새 출발점이 시작되었다. 학교 가는 건 귀찮아도 할 건 해야 하는 추가 학습. 학교는 악력이 좋았는지 나머지 학생을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렇다. 나아지려면 자전거에 몸을 맡겨 크고 작은 언덕과 다리를 지나 즐거운 마음으로 배우러 가야 했다. 골목으로 이어진 도로변은 사각지대라서 자전거를 운전하는 사람은 혹시나 차가 오는지, 차를 운전하는 사람은 혹시나 자전거가 오는지 주위를 잘 살펴봐야 했다. 집에 돌아오던 길에서 자꾸만 차에 박을 뻔했다. 그날따라 이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초수학>을 두고 왔나 가방을 뒤져봤지만 잘 들고 있었다. 문구점에서 사놓은 학용품이랑 필통도 있었다. 그런데 이토록 불안한 건 왜일까? 집에 도착하자 고영희가 보이지 않았다.
"영희야. 고영희? 야옹! 야아-옹."
박사님이 별방에 나오시면서 소식을 들려주셨다.
"저기... 주호야, 안타까운 소식이 하나 있는데.... 영희가 자꾸 토를 하고 아파하길래 병원에 데려가 봤어. 진찰 결과가 유행성 장염이래. 길고양이들이 일반적으로 걸리는 고질병인데, 그 애는 면역력이 너무 약해서 치료했음에도 증상을 견디지 못해 하늘나라로 갔어."
무소식이 차라리 희소식이었을까. 대뜸 사라진 영희가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 선한 고양이는 대체 어디로 간 걸까. 그리고 약 2개월 뒤 추석에 비슷한 소식이 잇따랐다.
"호동이 엄마가 우울증에 걸렸대. 동경개가 국내에서 희소한 만큼 멸종위기급의 수 애들 터울이 필요했던 거지... 국가도 연구와 보존에 힘쓰고 있어서 결국 호동이가 왔던 곳에서 연락이 왔어. 호동이 데려가도 괜찮겠냐고 했지. 박사님은 수락했단다. 주호, 너도 많이 아쉽겠지만 호동이 엄마의 입장이면 아마 충분히 보고 싶을 거야. 우리 재미있게 호동이와 영희랑 놀았으니까 잘 되게 기도하자. 응?"
"그런 일이 있었네요. 호동이도 갔구나... 그래도 괜찮아요. 충분히 행복했는걸요?"
어린 마음에 눈물이 났지만 영희가 좋은 곳으로 가길, 호동이가 엄마의 사랑을 받길 기도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관계엔 영원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간이라는 명목을 재꾸고 소울메이트를 부둥켜안고 있다면 영원히 존재할 것들이다. 사라지지 않을 무던한 세속이었다. 나는 하느님께 빌었다.
부디 호동이가 늠름한 개로 자라 동경받는 문화견으로 남기를. 모자가 서로를 말없이 안아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