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중순의 졸업식 끝에 알로이시오 36기 졸업생인 우리는 후배들에게 받은 꽃다발을 위로 던지며 지난 15년간의 감사함을 졸업식에 참석한 모든 분들께 표했다. 크리스 크리스티 양복을 입은 내가 자신이 아닌듯한 기분이 들어 왠지 어색했다. 연간 8만 원, 하계와 동계로 나뉜 두 번의 피복비를 지급받아도 뜯긴 것이 대부분이었기에 새로 산 옷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세정 회장님의 후원으로 졸업식 며칠 전에 양복을 살 수 있었다. 나는 졸업식에서 훌쩍거리며 복잡한 감정으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때 모르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졸업식을 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학생?"
'어떠냐고요? 보다시피 이렇게 슬프게 서서 상큼하게 즙이나 짜고 있습니다. 마치 물 한가득 머금은 식당 행주처럼 말이죠.'라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아무 말도 못 했다. 인터뷰 카메라를 받는 것이 오랜만인 것과 동시에 카메라 울렁증이 있었던 나는 약간의 멀미 현상과 구토 증상이 올 위기를 대비해 우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했다. 그 효과는 탁월하긴커녕 오히려 울보로 흐느끼는 모습만을 남기고 있었다. 카메라는 여전히 주위를 빙빙 돌았다.
"너무 먹먹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가 가장 큰 걱정입니다. 이럴 때 부모님이 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생각이 듭니다. 친구들이 사회에 나가 갖은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떳떳이 나아갔으면 합니다. 스스로에게도 하고 싶은 말입니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PD님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라는 멋진 신념을 던지시고는 조용히 사라지셨다. 그를 붙잡으려다 울고 있는 현실을 깨닫고 조명이 비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감사합니다."
졸업식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가려던 찰나, 양어머니와 삼촌이 꽃다발을 안겨주셨다.
"졸업 축하한다! 뭐 먹고 싶어?"
나는 서둘러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어머니, 삼촌... 짜장면이 먹고 싶어요."
두 분은 먼저 양로원에 일이 생겨 가봐야 한다고 하셨다. 엄마는 현금 20만 원을 쥐어주시며 꼭 의미 있는데 쓰라고 당부하셨다. 결국, 친구와 그의 여자 친구를 포함한 셋이서 남포동 영화관 근처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음료를 마시고, 머리 하는 데에 돈을 거의 다 썼다. 평생 받아보지 않은 금액을 짧은 시간 내로 소진하다 보니 공허감과 자책감이 돌돌 밀려왔다. 이렇게 쓰면 안 되는데, 안되는데, 안 되잖아...
무감각하게 느껴지는 죄책감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없었다. 쓰라린 양심에 땅거미가 질 즈음, 저녁이 되어 친구들과 술자리 모임에서 새로운 시작을 기리기 위해 전철을 타고 모임 장소로 향했다. 힘 넘치던 친구는 얼마 안 가 헛소리꾼 최고봉이 되었다.
"노래방으로 가자!"
나는 딱 잘라 거절했다. '아직 너희들처럼 취업도 하지 않았으니 오늘은 여기까지!'로 하기로 하며 제안을 사양했고, 당장에 쏟아지는 잠결을 따라 보육원 침대에서 마음 편히 자고 싶었다. 잠과 술은 비틀대는 머릿속에서 주사위로 야바위를 반복적으로 학습했다. 눈꺼풀이 내려갔다 일어서기를 밥먹듯이 하는 동시에 풀린 다리는 친구들이 이끄는 방향으로 '갈까 말까'를 즐겼다. 이놈의 정신머리를 '던질까 말까' 하다가 결국 야바위를 멈춘 손에는 잠이 들려있었다. 몽롱해진 정신이 어느새 어두컴컴한 건물에 들어서 불이 꺼진 어두운 복도를 지나 화장실 입구에 머물렀다. 참았던 토가 쏠려 나왔고 화장실 입구를 뜨겁게 적셨다. 술에 잔뜩 취한 상태로도 정리강박의 충동이 일어나 걸레도 빨고 화장실 쓰레기통을 비웠으며 오염부위를 청소했다. 아침이 되자 화장실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첫 동창회는 그렇게 끝나버렸다.
'최종 합격 아주스틸'
"제가 합격했다고요?"
"일단 합격했으니 다행 아니겠나?"
학생부장 선생님은 대기업에 가고픈 친구와 나를 번갈아 보시며 생활 기록부에 침을 찍어 발라 넘기셨다. 친구는 물음표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합격한 건 좋은데 사무직을 지원해야겠네."
나는 친구와 같은 회사로 발령 났지만 다른 분야인 생산직으로 정해졌다. 단돈 400만 원을 쥐고 홀몸으로 생활해야 했던 터라 그나마 빌붙을 곳이 회사 기숙사와 월급이었다. 이것이 없으면 앞길은 깜깜하고 영영 예측할 수 없는 미로를 거닐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만두지 않으려 했다. 깡으로 버티며 일단 살아야 했다.
20살, 사회에 홀몸으로 박스 두 개와 함께 구미의 한 중소기업 사내 기숙사로 이사를 갔다. 면접을 봤을 당시엔 대리님과 사원 누나가 우리의 딱한 사정을 아시고 배웅 하주신 학부장 선생님께 감사의 경례를 하고 우리를 책임지셨다. 참 감사한 분들이셨다. 그러므로 꼭 보답하고 싶다. 우리를 품어준 분들은 이렇게나 따뜻하고 온정 많은 사람들이었다.
사회로 나와 처음 들어서게 된 회사기숙사는 너무 무서웠다. 한 형님이 기숙사 식당에서 TV를 보다 관리자 주무님을 보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주무님께 안내를 받고 궁금한 점과 알아야 할 사항, 기본 수칙 사항을 하달받았다. 2층 맨 끝방이 우리의 생활실로 정해졌다. 2인실에 퀸 사이즈 침대 두 개와 옷장 두 개, 작은 책상 두 개. 방에 있는 전부였다. 거주할 공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보육원에 살았던 그때가 정말로 천국이었다.
회사 첫날, 현장 대리님은 우리를 불러 모아 둥그런 원을 만들었다. 나는 회사 최초 최연소로 입사한 새파란 신입이었고 이 회사의 최소 연령대가 30대 중반인 것을 대리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외주 업자는 대부분이 지긋이 나이 드신 연장자 작업자들이셨다.
현장은 S5공정과 Blanking(블랭킹) 공정, 두 섹터로 나뉘었다. S5주변은 검은색 고무 스키드로 깔린 야드와 포장 및 재고와 불량으로 차곡차곡 쌓인 보관장이 있었고 앞뒤로 자동문이 달려 있었다. 호이스트 천장크레인 3대와 도르래 체인 및 훅 무게 포함 각각 S5 전용의 크레인 7톤, 패킹 전용 3톤, 블랭킹 전용 5톤이 있었다. 블랭킹 전용 입식 지게차 두 대는 내부에, 가공팀 전용 좌식 지게차 왕복용 2대(S라인)는 외부에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 업무를 정리해 보면 대강 이런 식이다.
1. 언코일러(Unciler)
PDF 리더기 사용 - 코일 라벨 확인, 원자재 입고 및 취급 담당.
호이스트 천장 크레인 (C-훅 포함, 7톤) 기사, 자제 정리 및 비품 취급.
2. 인스펙터 (Inspecter)
품질 검사, 제품 측정 및 교정, 스크랩 처리.
3. 패커 (Packer)
제품 포장, 부자재 입고 담당.
4. 오퍼레이터 (Operator)
작업 총괄 및 업무지시, 메인 설비 작동 및 설비보수.
21살 사원 1호봉 / 회사 1년 차.
일이 너무 힘들고 상사의 부조리에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돈이 없다 보니 새로운 경험에 부딪힐 깡도 없었다. 주로 패킹과 인스펙터를 담당했다.
22살 사원 2호봉 / 회사 2년 차.
동기 친구 한 명이 고층 건물에서 스스로 뛰어내렸다. 또 다른 동기 친구는 소주를 마신 뒤 220V 콘센트로 목을 감아 열심히 쌓아둔 책을 걷어차며 세상을 떠났다. 사망원인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 동안 나는 범인을 찾아내어 어떻게든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범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심 한 충격과 극심한 자기혐오에 빠졌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학창 시절에 자주 놀았던 친구는 남자 친구와 함께 놀라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오는 차를 보고 놀랐다. 핸들을 꺾자 가드레일이 감싸진 코너 너머로 차량이 뒤집혔다. 차는 계속 굴러 깎인 산으로 형성된 협곡 아래에 떨어졌고 전원 차량 내부에서 사망했다. 안치실에서 본 친구의 흉터 가득한 얼굴은 몇 년이 지났는데 전혀 잊히지가 않는다.
장례는 선배님들의 감사한 도움으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 재단은 스스로 떠나간 이들의 장례미사를 하지 않았다. 남은 우리가 무연고자로 떠난 친구이자 가족의 무덤을 지켜주었다. 출신 선배님들의 제안으로 앞서 떠나간 두 친구들을 무연고자 무덤에 맡겼고, 10년의 유효한 약정이 지나면 모두 유골함 밖으로 나와 흩뿌려져 우주먼지가 될 예정이었다. 영원히 우리 마음과 시정할 불멸의 약속이었다.
23살 사원 3호봉 / 회사 3년 차.
제법 언코일러를 할 줄 알게 된 시기. 보통은 한 달 만에 마스터하는 과정을 나는 3년이 걸렸다. 야간근무를 할 때마다 "저기 다른 공정에서 빵 가져와"라는 조장 명령을 듣고 그대로 시행했으나 빵 쟁탈전에서 진 다른 공정 조장이 직접 찾아와 거듭된 발길질과 뺨을 후려쳤고, 소리 질렀다. 굉장히 싫었다.
24살 사원 4호봉 / 회사 4년 차. 인생 탈주가 간간이 떠올랐지만 참았다.
4박 5일의 추석 연휴를 이용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새벽부터 인천으로 떠나 필리핀이 모국인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해외로 떠났다. 그녀에게 남은 건 오직 필름 떨어진 민트색 폴라로이드 사진기. 그녀도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사랑했다. 다만 철이 없었던 나는 사랑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 경험 부족이 원인이었다. 찢어질 듯이 슬펐고 그녀에게 지울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정말 미안했다.
잠시 휴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급조해 떠난 여행이었지만 비행기는 중국에서 결항되고 말았다. 기껏 환전한 현금이 물거품 사라지는 소리도 없이 쓱싹하고 사라졌다. 호구인지 착한 건지. 자신이 캐나다 교사라며 메일을 준 이에게 한국돈 30만 원을 주고 답장이 없는 것이 그의 베리땡큐 한 보답이었다. 자신감 있게 떠나간 <나 홀로 여행>은 완벽한 실패였다. 메신저로 친구에게 부탁 후 어렵게 티켓을 구매할 수 있는 금액을 꾸려 귀국하자마자 돈을 빌려준 친구 통장에 즉시 입금했다. 만약 그 친구가 없었다면 나는 필리핀에서 어떻게 되었을까? 어떠한 여행도 다시는 가기 싫었다.
1월 23일. 사내 작업자의 불찰로 인한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작업자가 설비에 말려들어가 즉사했다. 며칠 뒤 공정별로 조의를 표하라는 사장님의 지시사항을 받았다. 비서를 통해 현장 팀은 순차적으로 장례식에 참석했고 담배를 피우던 중 전화가 걸려왔다. 중학생 3학년 때 1년간 같이 생활했던 후 형이었다.
"어, 주호야. 요한이 장례식 하고 있다."
한이 형은 스스로 살기를 포기해 떨어지는 배경을 붙잡았다. 환각이라도 본 걸까. 아니면 희망이 보인 걸까.
유일한 구제방법이 아닌 걸 알면서도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왜. 그딴 지랄 맞는 길을 택한 걸까.
25살 사원 5호봉 / 회사 5년 차. 정말 세상을 떠나버리고 싶었다.
오래된 연장자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발전 없는 스스로가 조장도 그 무엇도 아닌 자신이 너무 미웠다. 누구는 3년 만에 조장을 다는데 5년이 되어서도 검사하는 일만 병신같이 하고 있으니 회사에 대한 미안함과 죄송함이 사무쳤다. 과장님도 주의를 자주 주며 조장님의 명예에 칼집을 냈다. 내리 갈굼 문화가 경직된 회사 분위기에 심리상담을 해보고, 일을 못하는 것에 대한 논의도 서술해 보았지만 그딴 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지각 반성문 열일곱 장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의 무기력한 감정으로 무감각하게 살았다. 어떻게 살아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연사를 벗어날 길을 막아 줬던 건 같은 지역에 살았던 후배 덕택이었다. 술도 마시고, 노래방도 가고 정말 철없는 자의 허무함만큼 시간이 딱 맞게 사라졌다. 몇 개월간 같이 생활했지만 치근 덕거리는 동거생활이 불편해 동생을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야 했다. 졸업 후 이백만 원을 빌렸던 친구는 잠적하다가 갑자기 주소는 어떻게 알았는지 제 발로 찾아와 빌린 돈으로 산 블랙박스와 비디오 게임 VR을 내밀면서 자신의 생일선물로 오토바이 헬멧을 사 달라고 하는가 하면, 사십오만 원을 빌린 친구는 되려 "갚기 싫다고!!!" 하면서 빌린 사람에게 오히려 역정을 냈다. 학창 시절에 피복비를 뜯어 살살 웃으며 돈을 꼭 갚겠다던 망할 놈의 친구는 작년에 이미 자진 낙하로 세상을 떠났고, "어느 은행입니다."의 허술한 변조 음성으로 사기 치려던 친구는 역발상을 이용해 조장님께 폰을 넘겨 경찰 현장에 있는 걸로 위장. 범죄를 미연에 방지해 사기를 되받아쳤다. 불안정했지만 퍼펙트 한 게임 같은 인생이었다. 20대 인생 차트는 초반부터 해서 중반까지 추락 방향표를 찢고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5년의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이곳을 떠나간 친구들이 있어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늘 뒤처지는 포지션에 놓여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인생은 원래 이런 건가 하는 허무감. 그리고 무력감. 잦은 자책으로 인한 우울감.
사랑도, 배움도, 삶도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것 없었다.
생사 크로스 개노답 삼 형제는 홀로 남겨진 방안에 비디오 게임 중독과, 은둔형 외톨이와 아미노를 보상으로 제공했다. 덧이어 알코올 중독과 골초, 유흥 중독은 불필요한 사은품으로 광고성 해시태그처럼 나를 사지로 밀어 넣었다. 때론 극심한 상상으로 신너 통에 빠져 라이터를 붙일까, 전자레인지에 라이터를 돌릴까, 떨어져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나는 결심하고 이곳을 벗어나기로 했다. 어디든 좋았다. 친구와의 통화 끝에 합격률 70% 특효약인 친구의 사내 추천서로 대기업 합격 소식을 통보받은 날, 조장님은 기껏 이렇게 키워놨는데 어딜 가는 거냐며 닭똥 같은 눈물을 보였다. 누가 뭘 키웠다고. 악마새끼를? 미운 정이 더 많았지만 남은 업무시간에 몰래 야외에서 고기도 구워 먹어 보고, 단합 캠프에서 바닷바람을 마시며 인삼주도 먹어보고, 과메기 한가득 담긴 상자도 선물 받은 추억이 스쳤다. 회식에서의 기억은 그 추억들보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좋은 경험이라고 보긴 개뿔.
다음은 대기업에서 일했던 공정 업무다.
제1 공정 - WINS (Wafer Inspect)
Wafer 입고 및 투입, 제품 검사, 제품 라벨 확인,
불량품 반납, 재고 조절.
제2 공정 - Wb1 (Wet Bench1)
Wafer 식각, Wafer 무게측정 (sampling) , 유해물질 취급.
제3 공정 - POCL (Diffusion)
Wafer Dopping, 면저항 측정.
제3-1 공정 - Oxidation (CO2)
제품 면저항 효율 증가, Wafer 산소 증착.
대기업 면접 1차부터 2차 면접까지 눈물을 머금고 말 한마디 제대로 못했지만 운이 좋게 합격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비리운이 좋았다. 대인기피증에 업혀 터져 나온 실소와 울음 섞인 목소리는 "절 뽑아주세요."라는 위선 발린 눈물로 연민과 측은 심을 방어막 삼아 겹겹이 누적된 위기를 어리석게 밀고 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겨우 업무역량이 높은 사람을 대체할 수 없는 모자란 자신 앞이었다. 주변에 회사 사람이 지나다녀도, 행인들이 지나다녀도, 처량한 바람이 불어도 늘 혼자였다.
외롭고, 힘들고, 슬프고, 울고 싶었다. 목놓아 마음껏 울었다. 희로애락의 쾌감에 빠져들어 밤의 정기로 사라진 심장에 안전 기지 삼아 흉터와 문신들로 까만 피부를 가렸고, 술로 희석시켰으며, 희뿌연 담배로 가렸고, 후드를 끝까지 뒤집어썼다. 심한 콧소리와 축농증과 코로나로 코를 막았고, 이어 플러그와 이어폰과 헤드폰과 귀이개로 귀를 막고, 마스크와 선택적 함묵증과 침묵과 가래침과 구토와 위액과 색욕적인 세 갈래 세 치 혀로 입을 꿰매면서도 가끔씩 날카롭고 소름 끼치는 가시를 징그럽게 내뱉었다. 주머니로 검은손이 들킬까 함부로 꺼내지 않으면서 행여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을까. 들킬까. 누군가라도 알아보지 않기를 간절히 빌고, 빌고, 또 빌어서 날이 갈수록 병마에 걸린 구루병 걸린 내 손톱은 갈수록 날카로워져 쇄골, 안면, 목, 어깨, 팔, 손목, 발목, 무릎, 복숭아뼈, 대퇴, 둔부, 허벅지, 종아리, 안구, 귀이골, 귓불, 콧등, 검지, 중지, 약지, 엄지, 손바닥, 새끼손가락, 손톱, 손톱 반달, 겨드랑이, 각종 치부, 머리, 정수리, 구레나룻, 허리, 등, 갈비, 눈꺼풀, 속눈썹, 입술, 눈두덩이, 양 볼, 턱, 울대, 전신 피부를 보기 좋게 피가 쏟아져 나오도록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박박 박박박박박 긁으면 내가 원하는 대로 사라질까. 없어 질까. 소멸될까. 지워질까. 떠나갈까. 보이지 않을까.
과연 살 수 있을까.
죗값을 그만 받을 수 있을까.
슬픔을 영영 떠나보낼 수 있을까.
웃을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일 수 있을까.
살 수 있을까.
제발 그만.
이제 그만.
그만. 그만. 그만.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