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꺼내지 못한 말들

어디에서나 모두들 잘 됐으면 좋겠다.

by 언데드

소파에 앉은 나는 평소에 잘 안 보던 TV를 켰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치익.


삶의 기로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개인의 자유지만, 부디 죽음만큼은 선택하지 않도록 그 자유권만은 침해해야겠습니다. 언젠가 세월이 지나 추억을 떠올리면, 삶을 선택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시간은 비로소 증명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을 더 나은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줄 것도 의심치 않습니다.


저 또한,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정도를 넘어선 무례와 실례, 자신과 모두를 향한 광범위하고 무지한 대우. 이는 베풀어야 할 사랑이 턱없이 부족해서였습니다. 메마른 감정에 그 어떠한 유형의 사랑을 들여놓아도 쉽게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마른땅에 작은 물컵만 들이붓는 격이었습니다. 사랑이 고팠나 봅니다. 더 달라고 소리쳤나 봅니다. 때문에 먼저 세상을 스스로 떠난 이들의 심정을...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큰 사랑도 아닌 그저 '작은 관심'이었습니다. 떠난 사람에 대한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된 향수처럼 진해집니다. 태우지 않은 사진 같은 추억에 의해서 말입니다. 사랑은 불멸적이자 필존적인 존재인 것입니다.

지구가 인류를 끌어당기는 힘인 중력은 하나의 책임입니다. 이 세계 이 나라에 우리가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내 생애에 대한 책임이 뒤따르게 됩니다. 이 책임을 너무 버겁다 생각하면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자주 들게 마련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일수록 그때그때 가볍게, 위트 있게, 간단하게 살아봅시다.

중력이 사라지지 않듯, 사랑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오늘도 떠난 이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생애에 대한 고찰과 떠난 이들을 기리는 연습을 해야겠습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 차라리 살겠습니다. 사랑하다 후회 없이 떠나겠습니다.


민재 형, 형 이름만 들으면 착하고도 곱상하기도 한 선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하필이면 경주에서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하고 이름이 똑같네요. 그 사람도 민재거든요. 김민재. 형과는 다르게 키도 크고 빼빼 말랐지만 착한 건 제 형이랑 똑같이 닮았습니다. 기억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보육시설에서 바자회 행사에 참여했을 때, 입구에 있던 형이 제 이름 세 글자를 불러 바로 절 알아보셨습니다. 세월이 지나도 전 네 살배기 아이처럼 여전했나 봅니다.

맞아요. 제가 네 살 때 형이 복사를 섰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재혁이 형하고 초등학생 때 같은 반이었지요. 아마 엠마누엘 반이었나요? 그랬을 겁니다. 언제 한 번 밥 먹자고 해놓고 우린 네 살 이후로 한 번도 밥을 먹은 적이 없죠. 가을이 되면 형 생각이 자주 납니다. 이상해요... 바자회 행사기간이랑 맞아서 그런가 봐요. 언제 한 번 봐요, 우리. 현생에서는 앞으로 해야 할 일도 많고 책임져야 할 일이 많아서 당장은 힘들 것 같아서 미안해요. 형, 하늘나라 가면 밥 사드리죠. 그리고 전 형 사진 가지고 있으니까 그림으로 남겨 놓을게요. 보고 싶으면 꺼낼 때 괜찮아질 것 같아서요.


명옥 누나. 안녕하세요. 전 선배님이 아직도 기억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여름방학에 영어 가르쳐주셨을 때 말이죠. 정말 즐거웠어요. 즐거웠다는 말과 다르게 다른 친구들은 지루했는지 잠자기 바빴죠. 하하. 한창 클 때였나 봐요. 그래도 같은 출신으로서 이렇게 편지를 쓰니 감회가 새롭네요. 한동안 편지 쓰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걸까요? 꿈이 좌절되어 죽음이란 벽을 마주했을 때 얼마나 상실감이 크셨을지... 그때의 기분을 저는 서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된 것 같아요. 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게 되더라고요. 저희 사이에 생긴 인연은 놓지 않을래요. 저... 아무래도 좀 더 살아보고 싶거든요.

초등학생 때 보았던 성탄 예술무대에서 'We wish a merry christmas'를 부르는 6학년 누나들이 있었어요. 전 초등학생 1학년이었는데 그 누나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그중에 명옥 선배도 합창 멤버였죠. 그 일담을 학교 조회시간에 교탁 앞에 선 선도부 선배님께 얘기했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하냐면서 맞장구 쳐주셨어요. 평소엔 건망증이 심하다가도 특정 사건을 이미지화시키는 저의 이상한 능력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현실과 사후 세계의 접합점을 잇는다고 볼 수 있겠네요. 아무튼, 왠지 기분이 좋아요.

<갓파 쿠우와 함께 여름방학을>이라는 애니메이션을 보여주셔서 감사했어요. 전 영어공부 열심히 해서 여길 뜨려고요. 짧은 기간 안에 많은 것을 이루지는 못해도, 느려도 일단 해보려고요. 선배 꿈과 같지 않아도 비슷한 걸 해보고 싶었거든요. 한동안 영어에 관심을 꺼두고 있었는데 좋아하는 것에 관심 끄는 건 도무지 안 될 것 같아요. 아! 선배보단 누나로 부르는 게 좋아요. 먼 훗날에 뵈어요.


민환아, 얼마 전 너에 대한 편지를 인스타그램에 써놨어. 널 미워한 글을 쓰고 나서 미안해지더라. 그래,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해. 네가 나를 괴롭힌 것보다 더 기분 나쁘게 생각할 만한 사람도 많을 텐데 고통이 커서 그랬는지 괜히 큰소리치듯 울분을 담아 편지를 썼던 것 같다. 정말 미안하다. 널 용서하면 안 될 거란 말과 다짐들 전부 남김없이 취소할게. 이젠 용서할게. 이렇게까지 널 미워해서 미안해. 내 인격이 성숙한 어른으로 덜 성장한 시기였을텐데 너무 많은 걸 바라서 그랬나? 나, 이제 더 이상 네가 밉지 않아. 성불하길 기도할게.


은서야,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운 날이 참 많았다. 고등학생 3학년 때 넌 체육 선생님이 하고 싶댔지. 그래서 체육과에 지원했었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우리 사이엔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 미래에 대해서 말이야. 난

미술관을 차릴 거라고 했고 디자이너도 하고 싶다고도 했고. 뭐, 그때 했던 이야기완 다르게 현재는 글 쓰는 작가를 하고 있지만. 이 직업이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런지 요즘은 흐지부지 해. 의욕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들더라고... 이럼 안 되는데, 그렇지? 아무래도 난 기계는 아니니까 잠시 쉬어가는 타임이라고 생각해. 올해 초반에 너무 열 내고 달려와서 그런 것 같아. 조금씩 해나가야 될 것들을 확 앞당겨서 하는 건 역시 무리인가? 내년이 되면 나는 그토록 바라던 대학생이 될 거야. 졸업이야 조금 늦겠지만 지금 시작하는 게 늦지 않았다 생각해. 쉰 내지 예순 살에 대학 다니시는 분들도 많은데 우리라고 뭐, 늦은 건가?

아니지. 결국 마인드가 중요한 것 같아.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았다 같은 마인드 말이야. 한때는 나 자신이 너무 느리다는 생각을 했어. 행동도 그렇고, 생각도 그렇고. 그런데 그게 사람의 천성이래. 느린 기질과 빠른 기질이 있다나? 상담 결과를 확인 보니 전자더라고. 한국의 급한 기질이 완화되길 바라. 그래야 스스로 생을 포기할 사람들이 강박에 덜 시달리게 될 테고, 자기혐오를 비롯한 반동이 감소되겠지. 음, 이건 그냥 내 의견일 뿐야. 그래서 나는 더더욱 한국이 포기를 장려하는 국가가 아닌 차원에서 더 나아졌으면 좋겠어.

우리 꼭 한번 보자. 은서야. 정말 많이 보고 싶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네가 눈물 흘렸던 게 아직도 생생해. 난 아직도 그 버스를 현생에서 타고 있나 봐. 종착점에 가는 중에 버스가 많이 흔들려서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토가 쏠려. 검은 봉지는 항상 챙겨야겠더라. 그래야 버스 청소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 준비를 미리미리 해야 종착역에 갈 시간이 앞당겨지는 게 이젠 몸으로 느껴져. 유턴하기엔 무리야. 그런 거 할 시간 없거든.

내비게이션이 있기에 이젠 길을 잃지 않아. 나, 재미있게 살아야겠어. 하차할 정거장이 어떨지 궁금하거든. 물론 그게 내 삶의 종착지가 아니란 걸 알아. 또 다른 탈 것이 기다리고 있겠지. 버스 다음엔 뭘까. 기대가 돼.

사실, 이제 막 오래된 마을버스에서 내린 참이거든. 우리가 탔던 버스는 시내버스였지만. 그때가 되면 난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지도 몰라. 나는 인간만이 가진 본성에 대해 다시 고찰했고, 평가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알게 되었거든. 내 성공은 브런치 작가 발탁이 끝이 아냐. 이제, 겨우 시작인 거지. 지켜봐 줘. 어디까지 가는지. 미움의 앙금이 마음에 남을수록 남을 더 싫어하게 돼. 핑계야. 패배자들의 가십거리와 안주가 되는 셈이지. 미움 따위 버리기로 했어, 구겨진 악보처럼.

난 평가받기를 좋아하지 않아. 남을 평가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그걸 즐긴다면 인생 자체가 아마 거대한 오락거리가 아닐까 싶어. 마치 마조히스트나 사디스트처럼 말이야. 지금의 난 그 간극을 오가는 중인 것 같아. 이 굴레를 벗어나려면 밸런스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좋겠지. 인품의 그릇이 넓은 사람이라면 자기감정이 많이 담긴 글을 쓰지 않는 게 능사야. 그걸 두고 사람들은 전문가, 혹은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고 해. 그 영역에 포함되는 사람이 되기엔 난 멀었어. 어려서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이상 사회초년생은 아니니 이 정도는 인지해야 인지상정이겠지.

당분간 SNS를 멀리 할 거야. 이상하게 나를 돌아보는 과정에서 남의 얘기에 날 깎아내리고 있더라고. 그래서 퇴근할 때는 무조건 폰을 꺼놓기로 했어. 미디어가 판치는 요즘의 내 상황에선 가장 큰 오락거리이자 약점이니 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어. 내가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는 동안 다양한 공격을 받을지도 몰라. 그런데 그거 알아?

내 천성은 벌꿀 오소리인 거.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위아래 없다는 뜻이야. 고집불통, 독불장군이라는 별명이 붙는 이유야. 정말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면 그때 나는 진심을 담아 반격하거든. 천성은 역시 못 버리더라. 악하게 보이면 어때. 내 인생에서 1순위는 나니까.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 다른 핑계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게 즐거움 1순위라면 그때부터는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시간이란 거야. 느꼈어. 망할 순간들을. 그때가 되면 스스로를 반추하는 과정에서 자기혐오와 자기애가 동시다발적으로 느껴지더라고. 자기애가 넘치게 되면 위험해. 자기혐오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우리 인간은 중용이 필요한 거지. 남을 함부로 평가해서도, 규정해서도 안 돼. 허심탄회한 말들이 때론 누군가에게 내적 욕구를 자극시킬 수 있는 반면, 때로는 비교를 하게 만들기도 해. 그럴 때일수록 나는 외부의 자극 요소를 끊고 자신에게 집중할 상황을 만들 거야.

그래, 나아가기로 했어. 나아지기로 했고. 더 이상 좌지우지되지 않아. 갈길만 가는 거야. 서론이 길어 본론도 딸려 나온 것 같네. 결말은 아까 말했지. 난 내 갈길만 갈 거야. 그러니 지켜봐 줘. 남자 친구분께 이 말 전해줘. 많은 친구들이 결혼했거든! 우리 잘 지내고 있으니까 은서야. 하늘에서도 네가 아름다운 결혼했길 바랄게. 좋은 하루 보내.


희진아, 참 먹먹하지만 혼자 떠나갔을 그 마지막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 여겨져. 나는 '청소 오빠'라는 유투버의 영상을 보고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어. 또 다른 하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님이 말씀한 것처럼 죽음은 삶에 내재되어 있다는 게 더욱 진실하게 느껴져. 2년 전의 나는 거울 속에서 대체 무엇을 본 것일까.

죽음? 회생? 음, 결과적으로 봤을 때, 둘 다 아니야. 나는 오늘 새로운 진화를 봤어. 고된 일을 하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어. 그건 바로 관계의 진화야. 사실 같이 일하는 직원분과의 마찰이 조금 있었거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내 뜻이 되지 않는다고 조종하고야 말겠다는 의도로 굳은 신념 말이지. 그게 존재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지켜왔던 철학을 시수해야 한다는 뜻이 되겠지. 이것이 충족되지 않을수록 인지부조화를 겪게 돼. 하필이면, 시기란 게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벼랑으로 몬 단 말이야. 그러곤 이상한 선상에 놓이게 해. 상황이 시기를 맞게 되면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슬픈 감정이 더 독하고 푸르게 변해버려. 우울에 골이 난단 말이지. 자기애도 마찬가지야. 긍정적인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존감으로 변하겠지만 부정적으로 성장하게 되면 자기혐오로 되어버려. 너무 간단하면서도 복잡 미묘한 게 사람 감정이야. 그래서 평범한 우리는 이를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을 득도한 사람, 진화하는 사람, 깨어있는 사람으로 규정하곤 하지. 부러워. 그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그들과 닮도록 한사코 노력할 거야.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고 지쳐도. 숨고 싶어도, 사라져 버리고 싶어도. 네가 있는 곳에 두 발이 있고 싶어도. 그곳에 도달하지 않으려 노력할 거야. 내가 내뱉은 말이 누군가에겐 거짓으로 보여도 신념은, 자초한 결정은 결코 저버리지 않아. 내 삶의 모토야. 기도할게. 친하던 안 친하던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냐. 네가 이미 정한 건 죽음이지만, 어려운 고민 끝에 한 결정을 존중하고 이해해. 이 글을 보는 누군가가 있다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지하길 기도할 거야. 희진아. 하늘에서도 네가 잘 있길 바라!


혜원아, 캘리그래피 잘하고 있니? 하하. 잘할 필요는 없다만 그래도 네가 가고 싶어 하는 길이었으니 여전히 네 꿈을 응원해. 세상에 비록 너의 육신이 없어도 다른 세계에서 꿈을 이어가길 기도할게. 내가 다시 보육원 학교로 온 전학 첫날, 넌 입구에서 내게 인사를 건넸어. 그러니까 너의 존재는 결코 허투루 지나칠 수 없는 존재였어. 적어도 내겐. 보육원을 나온 뒤의 1년, 다시 보육원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기대한 건 환영이었어. 하지만 반대였지. 왠지 아니? 왕따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더 이상 밉지 않아. 무엇보다 미워하는 것.... 나는 완벽하게 포기해 버렸거든. 덕분에 인생을 건졌지. 알 수 있었어. 내가 민환이의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했을 때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를. 바로 미움이야. 난 혜원이 네게 서럽거나 밉다는 감정은 없어. 오랫동안 얼굴 보고 같이 지냈던 친구들도 당시에 남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이 모자라서 시기하거나 미워하는 감정이 있다는 게 아쉬웠지. 뭐, 좋아. 육지를 떠나간 모든 친구들이 결국은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 높은 바람에 아쉬운 결과를 남기게 된 거야. 솔직히 말할게. 아쉬워. 네가 있었더라면 우리가 어느 모임에서 만나 인생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을까 해. 미안하고 너무 그립네. 어째서 신은 모든 인간의 감정을 이토록 무뎌지게 하는 걸까. 이해할 수 없더라. 신이 관장하는 영역은 어찌할 수 없나 봐. 성공한 사람이든 성공하지 못한 사람이든 신의 영역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니까 말이야. 아주 조금 인간의 한계를 넘보려 해. 인문학에 관심이 선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해. 인간을 얼마나 알면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걸까 궁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신이 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 암, 그렇고 말고. 여태껏 세상의 파도를 거쳐도 살아남은 우리들은 이제 아픔을 받아들이기로 했어. 정직한 시간에 떠밀려오는 파도를 보고 말이야. 태풍이 지나쳐도 상관없어.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살 거야. 절대 그럴 거야. 그림자에 누워 이 세상을 함께 구경하자. 영원히.


요한이 형. 형에게 안부를 전하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 미안해. 태후 형이랑 전화를 한 그날 밤, 회사에서 사고사로 장례식에 참석하고 있던 참이었어. 그런데 1월 23일 내 생일 전날이었던 그날에 형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어. 우린 피로 이어진 형제는 아니지만 같은 혼혈인으로써 박사님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는데.... 형은 그런 선택을 했구나. 그래. 존중해. 그런 선택을 한 것도. 그런 판단을 한 것도. 그런 용기를 낸 것도. 형이 세상을 떠난 이후로 엄청나게 많은 혼란과 좌절이 찾아왔어. 마치 꿈에 나왔던 형처럼 말이야. 아직도 기억난다. 형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트로트를 부른 게.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깐 잘해-."


후회해. 있을 때 잘해줄걸. 있을 때 관심 가져보고, 진중한 대화나 해볼걸. 술 한잔 하자는 그 약속 지킬 걸. 만나줄걸. 형이 세상을 떠난 날 박사님께서 장례식에 오셨다고 태후형에게 전달받았어. 작업복을 입고 있는 내 모습이 초라하기도 했고 그 모습에 미워지기도 했어. 형이 떠날걸 미리 알았다면... 의형제의 기로가 이런 결말을 맞게 되다니.

난 가끔 형에 대해 신께 얘기를 해. 술 마실 때 말이지. 소용없더라고. 슬픔을 공유하려 노력해 봤자 현실은 나아지지 않았어. 비참한 현실에 실낱같은 희망이 생기길 바랐는데 요행이더라고. 아-, 조금은 알겠어. 형이랑 같이 1년을 지냈지만 더 이상 형의 육신은 이 세상에 두발을 딛고 있지 않다는 걸. 회피형 인간은 이토록 친인척의 죽음에 대해 무엄해지기도 하고, 무뎌지는구나. 스스로를 다루기 어려워. 그래서 좀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기로 했어. 책을 통해서... 성공한 사람들을 통해서 말이야. 그들이 어떻게 고난을 딛고 앞으로 다시 나아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새로운 관점의 획득과 정서발달과 기존의 차원을 뛰어넘는 통달을 위해서야. 몰랐던 나를 찾기 위한 여정이기도 하고. 형을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어. 그땐 경호를 봐줄게. 형이 현생에서 경호일을 했던 것처럼. 괜찮겠지? 나는 누군가에게 지켜지길 바랐어. 난 이젠 더 이상 소심하지 않아. 자존감을 깎으려는 비관적인 사람에게 맞서는 자세를 취할 줄 알게 되었지. 나아졌다고 생각한 스테이지에서는 모든 게 초기화 돼. 인생이 그렇더라. 배움을 잃지 않고 나아갈 거야. 가끔 비틀리거나 풍파 따위와 파도에 꺾여도 말이지. 형, 진심으로 사랑해.

가끔 이렇게 말하고 싶을 때가 있었어. ADHD인 걸 알게 된 이상, 이젠 형에게도 말하고 싶어. 형, 사랑해. 그리고 너무 보고 싶어. 우리 혼혈인들은 사회에 나와 겪는 불편한 점이 참 많은 것 같아. 사람들이 보통 겪는 불편한 감정 같은 거 말이지. 피부가 까맣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왕따를 많이 겪었어. 씨발, 우리 술 한잔 할 여유가 이렇게 없었을까?

더 이상 자신이 검열의 늪에 먹히는 건 보기 싫어. 형이 이맘때 비슷한 위치에 도달했다면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싶네.. 뭐, 아무튼 자기혐오의 끝은 자살일 거야. 자살의 원인은 모든 사람이 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그런 파격적인 결말은 맞이하기 싫어. 성공 또한 파격적이겠지. 긍정과 부정의 갈림길에서 이후의 선택에 따라 자살과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나뉘지 않을까? 기숙사에서 작은 돈을 빌리면 안 되겠냐는 게 형의 마지막 연락이었어. 의형제인 우리의 연락의... 결말이지. 21살이었던 당시에 나는 벌었던 돈을 지키기 위해 회사 기숙사에서 한 발자국 내딛기 어려운 사람이었어. 앞으로 형이 이루고자 육상 선수가 되는 꿈, 하늘에서 잘 실현되길 바랄게. 그쪽도 분명 우리 사회와 같은 세상이 있을 거라 믿어. 꿈을 이루는 날이 오면 웃는 얼굴로 마주했으면 좋겠어. 난 이 사회에서 형을 떠올리고 있을게. 매일이 좋은 하루이기를!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저는 당신들께 비록 피를 이어받은 친손자가 아니지만 항상 손자라는 생각으로 소신껏 살아보고자 합니다. 저희가 마음으로 본 시간이 참 길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난 1년간 저희는 한 집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요한이 형도 같이 있겠죠. 거기 있는 세상으로 넘어가면 당신들 곁에 영원토록 머물겠습니다. 때가 되면 전 괜찮은 인생을 살고 있을 테죠. 지금 여기서 겪는 찰나의 후회도 언젠간 '아, 그랬었지!' 하는 순간으로 남아있겠고요. 여즉 영락없는 철부지로 살고 있지만, 더 이상 죽음의 영역에서 고민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전 죽음의 영역에 시간이 다할 때까지 발을 들이지 않을래요.

2008년, 할머니 방에서 경주마라톤을 보며 라볶이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화창한 오후였는데요. 가장 평화롭고 따뜻한 날로 기억에 남습니다. 힘들었을 때 생각나던 그 기억을 통해 고통을 버틸 수 있었어요.

우리 가족 품으로 입양된 동경개 '호동이'도 생각납니다. 시고르자브 종인 얼굴은 꿀떡과도 같아서 귀여워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할머니는 많이 무서워하셨다가 나중에 귀여워하셨죠. 앞으로 우울한 기분이 들거나 슬프면 호동이를 떠올리면 되겠어요. 이거 꽤 괜찮은 방법인 것 같네요?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뵐 때가 보육 시설의 사립병원이었어요. 제가 살았던 곳이요. 교수님께서 옆에 같이 계셨는데 전 하교를 하고 온 참이라 바로 돌아갔어야 했어요. 할머니께 짧은 인사를 드리고 난 뒤로 많은 생각에 잠겼나 봐요. 임종을 앞둔 할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을지.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시는 교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을지. 감이 안 잡히더군요. 무릇 중학생 2학년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 같아요. 아하! 알겠어요. 그 시절을 기점으로 모든 죽음에 무뎌지기 시작한 것이. 사실 저는 무디지 않았는지도 몰라요. 그저 '무뎌졌다'라고 믿어왔기에 모든 감정이 '무뎌졌다'라고 느낀 것이겠죠. 죽음에 대한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아요. 양파는 까면 깔수록 맵잖아요? 죽음도 매한가지더라고요. 철없다는 전제로 죽음에 대해 무뎌졌다라... 그런 생각이 철없었죠. 20살 이후부터 전 죽음과 가까웠던 걸지도 모르죠. 생전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셨던 관심과 사랑은 제가 어른으로 성장하도록 큰 도움이 되었어요. 분노가 한층 누그러진 걸 알고 나서 말이죠. 누군가의 눈높이에 자신의 쓸모를 가늠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전 자신을 믿어보려 합니다. 당신이 주신 사랑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궁무진하고 광활한 활력입니다. 그 영역 안에서 성과 열을 다해 전생을 바쳐야지요. 제 젊음과 함께 흩날려간 시간은 의미 없는 시간이 아닐 것이라 믿습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는 기회의 바람이 분다고 해요. 동감합니다. 이젠 가봐야 할 시간이 되었네요. 그동안 곁에 오래 머물러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오늘도 좋은 하루가 되었길 바라요.


요안나 수녀님! 수녀님께서는 재단에 계시면서 성인 마더 테레사로 불리셨어요. 외모와 인품이 닮으셔서 그랬다고 들었어요. 저와 친구가 레지오 활동(천주교 종교활동)을 하면서 수녀님을 많이 떠올리며 얘기를 나눠봤는데요, 부끄럽지만 요안나 수녀님이 엄마 수녀님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들었습니다. 저는 닮고 싶고 좋은 어른을 만나면요.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마음이 과연 잘 전달되었는지... 전달되었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엄마 수녀님께 듣고 싶은 말이 있어요.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는 더 잘 될 거야.'


우리는 부모님이 없어도 충분히 잘 해낼 수 있어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는 경향이 크기 때문에 그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될 수 있지만요. 그 믿음을 뒷받침해 주셨던 분이 바로 수녀님이세요! 세상에나, 무뚝뚝한 제가 수녀님을 상상하면 표정이 이렇게 밝아진답니다. 때로는 돌아서서 혼자 많이 울었어요. 수녀님의 작은 말 한마디예요. 마음 여린 제게 얼마나 많은 힘이 되어주셨는지... 시설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처음 들게 해 주셨어요. 수녀님 곁에 양파를 까면서 콧노래가 절로 나왔답니다.

고등학생 3학년 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님의 기념일을 맞이해서 그림대회가 열렸던 적이 있어요. 당시 제가 그렸던 그림을 설명해 드릴게요. 지구 가운데에 신부님이 계셨고 양 옆으로 남학생과 여학생이 검지를 치켜들어 허공을 가리키며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었어요. 그림을 심사하신 수녀님들은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큰 사람으로 성장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염원을 담아 대상을 주신 게 아닌가 몰라요. 수녀님의 바람이 우리의 바람과 일치하는 걸까요? 미사가 끝나고 체육관 무대에 쭈뼛쭈뼛 서면서 의심이 들었어요. '제가 이 상을 받을 자격이나 있나?'라는 생각과 함께요. 제 포부가 담긴 그림이었는지 많은 분들이 박수를 치셨어요.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정이었어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은 흔치 않았는데... 결국 그 경험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거겠죠.

맞아요. 인생은 꽤나 복잡해요. 실패와 성공은 우리 하루 24시간 안에서 헤엄치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제보다 늦게 일어난 5분에 대해 낙담하는 걸 실패라고 가정한다면, 5분 일찍 식사시간을 지키는 건 성공이라고 가정할 수 있어요. 이미 수녀님은 아셨겠지만, 저는 살면서 이 간단한 원리를 어렵게 깨달았답니다. 자랑은 아니어요! 좋은 어른은 틀린 말을 하지 않으시더라고요. 수녀님 덕분에 저는 저 자신에 대한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가지기로 했어요.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고, 이 마음 평생 간직하겠습니다.

수녀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7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깨달음을 얻는 하루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지켜봐 주세요.


우린 어떻게든 잘 될 거예요.


야근이라는 이유로 저는 부산에 수녀님의 장례식장에 참석하지 못했어요. 이기적이었죠. 어떻게 그랬을까 하는 후회와 죄책감이 들었어요. 퇴근하는 차 안에서 핸들에 머리를 박으며 울었어요. 니힐리즘(무신론자)에 갇힐 뻔했죠. 같이 일하던 동생은 저와 레지오 활동을 했는데요. 울면서 수녀님을 꼭 봐야겠다며 빨강 마티즈를 끌고 구미에서 부산까지 운전했죠. 하지만.... 저는 그러지 못했어요. 잠에 들기 전에 수녀님 생각만 온종일 했던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못나서 수녀님을 뵈러 가지 않은 게 큰 후회로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어요. 하지만 수녀님은 언제나 제 가슴에 웃으며 살아계시답니다. 맑은 하루가 될 수 있길 빌어요. 그리고 기도해요. 아참, 참고로 저는 회개하는 중입니다. 하하하! 사는 것이 그렇죠. 신부님 곁에서 웃는 얼굴로 개원식 액자 사진처럼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요. 나의 사랑 마더 테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