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리와인드

전부 기억하기로 해요.

by 언데드

나는 리모컨을 꺼내 들어 무관심한 표정으로 TV를 켰다.


삑.


이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25년 전으로 돌아간다.


'여긴... 어디지?'


가진 것 없는 아이들이 모인 곳, 무방비 상태인 이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도착한 곳이다.

잃을 것 없는 이들은 각자의 위대함을 소비할 곳이 없어 낡은 지갑을 여닫기를 반복하다 낙심하며 푹 덮었다. 이곳에서 나온 대부분의 이들은 세상이 두려워 눈과 귀와 입과 코를 막았고 미세하게 열린 손틈으로 간신히 숨을 쉰 채 헤매며 살아가고 있다.


어둠에 잠식된 늪지에서 바라본 곳이 바로 여기, 우리가 밟았던 건물 바닥이다.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영롱한 샘이자 성수인 장소, 소년의 집.


"분명 따뜻한 마룻바닥에서 자고 있었는데..."


치이익-. 삑.


고아는 일반가정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 비해 인적 및 자원적인 차원에서 열등한 부류로 간주되어 '사회적 약자'로 불린다. 왜냐하면 첫째, 부양할 가족이 없으며 오로지 단신으로 생활하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직접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 사회법인재단의 그늘 아래 보호를 받는 것이 사회적 약자로 불리는 이유다.

보호 대상 아동이 고아로 된 상황은 다양하면서도 천차만별이다. 당시 나는 재단이라는 화단 안에서 자라는 온실 속 화초였다. 어찌어찌 얻은 일용할 하루를 담당자 수녀님을 통해 이어나갔다. 집 하나 없는 길바닥에서 거리생활을 했더라면 그나마 부지했던 목숨이 더욱 위태로웠을 것이고, 남은 인생이 말도 안 되게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보다 큰 위험을 안아야 할 상황을 마주하지 않은 덕에 사회 보육시설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 보다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정적일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묵혀둔 내면의 시커먼 어두움은 쥐도 새도 모르게 커져만 갔다. 안정적인 삶은 불안정한 길바닥에서 안정이란 영역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자아를 수차레 위협했다.


삑.


「토크 마카크 원숭이 암컷인 그렘린을 소개합니다. 태어난 지 9주밖에 안 돼서 작고 연약합니다. 그렘린에게 자연은 위험한 곳이죠. 무서운 포식자들도 있고, 무리 안의 경쟁도 치열합니다. 다른 무리가 목숨을 위협하기도 하죠. 새끼 원숭이의 셋 중 한 마리는 생후 1년을 못 넘기고 죽습니다. 그렘린은 배울 게 많습니다. 그것도 서둘러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요. 금부터 그렘린을 만나 보시죠.


나는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삑.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오은영 박사님에 따르면, 아이가 음식을 잘 먹도록 돕기 위해서는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어린아이일수록 질식에 대한 공포가 커 음식을 삼키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안법은 '아이가 음식을 잘 섭취하게끔 도와주는 것이고,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어릴수록 공포가 크다는 것 정신이 예민하며 안정적이지 않으므로 신심이 민감하다는 뜻이다.

나는 촉각이 매우 예민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같이 있을 때 별다른 이유 없이 싸움을 시작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은 상황에 내키는 기분대로 행동한 것도 많이 예민해서였다.

'어떻게 하면 예민한 아이를 진정시킬 수 있을까?'

우선 아이가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주변환경을 설정하는 것이다. 새로운 환경으로 변화를 주기 위해선 아이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어른의 주된 관심과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식사하는 공간을 아이가 편하게 느끼는 공간으로 만들어 주고, 웃는 얼굴로 대화하고, 큰 음식을 작게 잘라주는 것이다. '난 항상 네 곁에 있어'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아이가 그 감정을 느끼고 편안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법이다.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를테면 몬스테라 화분을 식사자리에서 보이는 곳에 들여놓는다던지, 보드라운 상아색 커튼으로 창문을 살며시 가리던지 하는 것들이다. 그리고 아이 스스로 밥을 잘 먹을 수 있게 각자로서의 의견을 물어보고 생각할 수 있게 여유를 가지는 것이 예민한 아이들을 도우는 최선의 방법이다.


삑.


'당신의 고행길은 무엇었나요?'


삑.


"어어, 야! 쟤 알리 아냐? 알리! 알리!!"


내 별명은 알리였다. 초코파이, 빠삐코, 비비빅, 알리바바 등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삑.


"여러분, 잘 놀다 왔어? 앞으로 5시간 걸릴 건데 휴게소에 세 번 들를 거예요. 휴게소마다 10분 정도 있을 거니깐 천천히 갔다 와요."


삑.


'알거지.'


나는 겨울에 듣던 멜로디가 떠올라 취한 사람처럼 콧노래를 불렀다. 삑.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우리 썼던 하모니카는...


리모컨에 침이 튄 건지 화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몇 번 바닥을 두드리고 나서야 리모컨이 다시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삑.


... 종종 놀이기구를 문제없이 탔지만, 왠지 모를 어둠과 공포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에 묻혀 가려진 사람들의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작은 주목과 호기심은 내 인생을 뿌리째 흔들었고 홍수법이 도저히 먹혀들지 않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뒤틀린 자에 이상한 공간을 건넨 세계는 에스컬레이터가 향하는 아래, 심연으로 뒤엉킨 거울을 보여주며 아래로 이끌었다. 이 마저도 저주받은...


삑.


'이상한 애.', '특이한 애.', '어울리기 싫은 애.', '이해하기 어려운 애.'


삑.


인터폰은 보통 중요한 일로... 특정 학생을 호출할 시에 걸려왔다... 학생이 전화를 받으면 해당 층의 수녀님이나 보육사 선생님께 잘 전달해야 했다. 만약, 정보전달에 오류가 생기게 되면 책임 묻는 상황으로 넘어가고 그 학생은 혼쭐났다. 해서 학생들은 가급적 인터폰이 울리면 근처에 가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있었다. 간혹 책임감 있는 친구는 곧잘 인터폰을 받았다. 화장실을 가려던 중 때마침 인터폰이 울렸다.


삑.


'포기할까? 아니면 그냥 해?'


불편한 감정에 새살이 돋기 전, 얼른 제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그때야말로 공포를 직접 마주해야 할 때라는 걸 직감했다. 몸 닿는 것이 예민했던 난 고통을 감수하기로 하고 앙다문 입아래 턱으로 전부 눌러버렸다.



삑.


그토록 죽음을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 곡옥진 날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이들이 알려주었다. 살 맛난 인생은 어제도, 오늘도, 미래도 아니었다.


삑.


내가 상처받은 것은 우연 혹은 필연일까.

우연이라면 축복받은 사고일까.

필연이라면 불행을 타고난 운명일까.


삑.


맹농아였던 헬렌 켈러는 어린 시절에 폭력적인 면모를 보였으나 가정교사로 있던 설리번의 가르침을 받아 위대한 사회사업가로...


"집이 있으면 좋겠어요."


으응, 나도 그래. 삑.


슬프지만 지금은 웃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


삑.


"갈게요. 당신이 서 있는 곳으로."


띵-동. 삑.


"박사님, 우리 진짜 박사님 집에 는 거예요?"

"그럼. 앞으로 형과 지내재밌을 거야. 기대되네!"

"형이요?"

"응, 이따가 교수님 하고 같이 올 텐데 한이라고 아니?"

"아! 그 형 알아요! 키 크고, 운동도 잘하고, 잘생겼고, 착하던데. 헤헤."

"그렇구나. 잘됐네~. 아까 얘기하려던 거 마저 들려줄 수 있겠니?"


현관 등에 비친 한이 형은 자신보다 한참 작은 날 보고 "안녕, 주호? 오랜만이네."라고 했다.


예, 누구세요? 삑.


"오오 움직인다. 움직여! 놀이기구 타는 것 같아. 그렇지?"


삑.


"쟨 아마 지옥 같을 거야."


"여긴 너무 춥고 어두워."

"내가 꺼내 줄게."


삑.


"야옹~애오옹."


"이게 뭐야? 고양이야?"


"영희야. 고영희? 야옹! 야아-옹."


거 배달이죠? 습. 길고양이인가... 귀찮게. 하, TV나 마저 봐야겠다. .


'이딴 세상 살기 싫습니다. 거기 있다면 작은 도움이라도 주세요.'


삑.


"졸업식을 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학생?"


"합격한 건 좋은데 사무직을 지원해야겠네."


웃을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일 수 있을까.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삑.


리모컨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았다. TV화면이 꺼지자 검은 스크린에서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검은 눈자위를 가진 사람이 이상한 말을 해댔다.


확인된 치료제가 없는 이 질병, 10~30%는 무조건 사망하는'미정 시한부 폭탄'이다. 보호 종료 아동 출신들은 대게 이 질병을 최소 하나쯤 갖고 있었다. 기계화되어 가는 인간 가축. 트라우마라는 진드기. 불치병이자 치료 및 개선이 일시적으로만 가능한 3차원적인 병. 이름하야 '아노미.'


그만해.


여긴... 세상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소년의 집. 고아는 집 하나 없는 길바닥에게 배울 게 많지. 아이가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은 노력이야! 잘 놀다 왔어? 앞으로 가... 내 인생아, 뒤엉킨 중요한 일을 그냥 해.

공포를 직접 마주해. 그토록 죽음을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살맛 난다. 당신이 서 있는 곳으로 가면 재밌을 거야. 안녕, 주호? 오랜만이네. 움직여! 내가 꺼내 줄게. 야옹! 야아-옹.

합격한 건 좋은데 사무직을 지원해야겠네. 거기까지야. 내 이야기는.

나는 나비라고 해. 날개 없는 길고양이지. 반가웠어, 모두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