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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Oct 19. 2023

독 발린 창

01

중년의 하수인인 마테스는 냇가에서 노새에게 물을 먹이고 있었다. 그즈음 새로운 왕 즉위식이 진행되어 성에서 나팔소리가 울렸다. 궁전 외곽에 잠시 휴식시간을 즐기던 마테스가 궁전을 올려다보았다. 새로운 왕의 즉위식에 참가한 민중들의 함성소리가 담긴 축하와 환영식을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허름한 보를 머리에 두른 아낙네들은 손수 땋은 십자수를 건네주는가 하면, 아이들은 화덕에서 구운 치즈빵과 돌빵이 담긴 바스켓을 헌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새로운 왕으로 위임된 아스랄 왕은 왕정 내에서도 훌륭한 인품과 민중을 대하는 태도가 올바르게 평가된  국왕으로 기대받는 몸이었다. 즉위식은 이제 막 시작했고, 은빛깔이 반짝이는 왕관을 쓴 아스랄 왕은 궁 앞에서 민중들에게 감사하다는 표현을 하는 의미로 한 손을 위로 번쩍 들었다. 마테스는 만족스러운 듯 콧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언덕을 올라 자신도 행사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새 위로 오른 마테스는 목 부위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자, 이만하면 많이 먹었네. 어서 궁으로 돌아가렴."


2시간 뒤, 행사가 끝난 후 민중들은 모두 제자리로 흩어졌다. 그날 궁전에서는 오페라가 진행되었다. 연회장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돌판의자가 무대를 기준으로 빙 둘러졌고, 연화장 중간에 띄워진 2층 관람석은 반달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2층 관람석에는 공연 안내를 도와줄 하수인 마테스와 아스랄 왕과 그의 아버지 섀턴, 막심 백작과 비브리 공작, 왕정 내 사서들과 신하들이 빈자리에 모두 착석했다. 아스랄 왕은 잠시 자리를 비우려 했고, 섀턴은 웃음을 지었다. 공작과 백작은 뒤로 조금 물러나 왕이 지나가도록 공간을 터 주었다. 전나무 종이로 된 연극목차를 펼쳐든 마테스는 공연 순서 안내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 하수인이 양쪽으로 커튼을 뒤쪽으로 밀어갔다.  

첫 무대는 아스랄 왕이 연극으로 장식했다. 1층은 모두 민중과 하수인들이었고, 무대에 선 아스랄 왕을 보자 술렁였지만 호위대가 나서서 지지했다. 아스랄 왕은 민중을 위해 헌신적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어 했던 특이한 왕이었다. 


"왕이 무대에 서다니... 웃기지도 않는군."

"그러게 말이야. 체통을 지킬 줄 모르는 건가?"

"무엄하다 이놈! 그 입 다물지 못할까!"


왕은 자신이 욕을 먹어도 민중을 다그치지 않았다. 민중을 체포하려는 호위대를 멈춰 세우고 연기를 이어서 진행했다. 그는 이른 나이에 왕이 된 자신의 비애를 <햄릿>에 등장한 왕자를 연기하면서 관중에게 직설적으로 표현했다. 아낙네들은 눈물을 흘렸고, 아이들은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하수인들은 왕의 처절한 연기를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아스랄 왕의 연기가 끝나자 연회장에서는 다시 한번 큰 박수가 울려 퍼졌다. 그는 공손한 한쪽 팔을 안으로 굽어 인사를 하고 다시 2층으로 돌아왔다. 

다음 공연은 성악가였다. 늙은 여인의 감미로운 목소리는 옥수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녀와 함께 등장한 남편은 작은 공연단의 지휘자 출신이었으며, 무용가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였다. 또한 그는 여인의 오페라가 끝난 후 그림 공연을 선보였는데, 아스랄 왕의 얼굴을 <슬픈 새>라는 제목으로 표현했다. 그의 기법이 무엇보다 독창적이었다. 낙서 같았지만 낙서는 아닌, 그렇다고 예술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한 작품이었으므로 귀족들에겐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서민 출신들에게는 야유를 샀다. 그는 자신의 그림은 어떠한 가격으로도 책정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자격은 오직 왕에게만 있다고 했다. 


"제가 그린 이 거대한 까마귀는 인간의 마음이며 본질입니다. 즉 아스랄 폐하의 완전체라고 볼 수 있지요. 하나 이 그림은 팔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아스랄 폐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성악가의 남편은 무대에서 내려와 호위무사에게 그림을 전했다. 


"왕께 전해 주시오. 내 첫 소원이자 마지막 소원이오. 전 다음 공연이 있어서 이만..."  

 

성악가와 남편은 가는 길에 박수를 받았다. 아스랄 왕은 2층에서 고맙다고 경의를 표했고, 성악가 부부는 사람들의 폭발적인 반응에 두 손을 내저었다. 그들이 퇴장한 뒤 연회의 일부인 연극이 끝났다. 민중과 하수인, 귀족들은 함께 성찬을 즐기러 궁 밖으로 나왔다. 궁전 밖은 만찬을 위한 백색 보의 테이블이 여러 개 놓여 있었고 귀족은 귀족대로, 하층민은 하층민 대로 앉지 않았다. 계급 가를 것 없이 서로가 함께 어울려 앉았다. 아낙네는 아이들과 함께 귀부인들의 취미를 공유했고, 귀족들은 금잔에 담긴 술을 즐기며 하층민들의 놀이에 흥미를 보였다. 냇가에서 물수제비를 하는 자들, 벌주를 벌칙으로 놓고 림보를 겨루는 자들, 천으로 눈을 가려 술래잡기를 하는 자들이 궁전의 테라스에서 한눈에 보였다. 마테스는 궁에 홀로 남은 아스랄 왕에게 정말 축하한다며 자신을 따라와 보라고 했다. 


"어딜 가는 겐가? 난 오늘의 주인공이니 밖으로 나가야 하네."

"왕이시여, 제가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있사옵니다. 오늘이 아니라면 영영 못 볼지도 모릅니다."

"그래, 잠시 시간 내보겠네. 안내하시게."


마테스는 아스랄 왕을 2층 회단의 커튼이 있는 방향으로 안내했다. 하수인이 커튼을 열자 다른 궁전의 회관이 그들 앞에 펼쳐졌다. 왕은 놀라는 기색 하나 없었다. 오히려 침착하게 자신의 키만 한 롱기누스 창을 가다듬는 사이 창 끝에 연보랏빛 독이 뭍은 것을 확인했다. 


"마테스, 내 창에 독이 발린 이유를 아는가?"

"알다마다요, 폐하."

"그래, 이유가 뭐지?"

"독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진실? 어떤 진실을 말하는 건가?"

"저희 왕실의 연회장은 사실 가짜입니다. 폐하께서 서 있었던 무대는 수십 년 간 인간에게 학살당한 악마의 후손인 데사야 군주가 설치한 환각의 덫입니다. 무대를 가장한 독늪은 이미 폐하의 몸에 퍼졌을 테지요. 창 끝에 고인 독은 이미 당신이 중독상태임을 이야기합니다. 자, 이제 곧 진실을 볼 것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오페라 부부와 민중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때 마테스의 사슴 같은 맑은 눈이 검어졌고, 연갈색이었던 곱고 곱슬한 머리는 하얗고 거칠게 변색되었다.  


"그들은 모두 불지옥에 타 죽었습니다. 안타깝게도요. 또한 오페라 부부는 독에 중독되는 대신 석화되었습니다." 


마테스의 얼굴을 본 왕은 잠시 물러났지만 도망치지 않았다. 


"이보게, 마테스. 자네는 왜 우리 왕국 하수인으로 지원했는가?"

"당신을 죽이기 위함입니다. 저는 폐하의 넓은 아량과 선함을 믿고 다가섰지만 인간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인간에게 학살당한 조상님들의 말씀을 듣고 저는 끔찍하게 견딜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참으로 교만하고 야만 합니다. 모두 남김없이 말살해야 합니다.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테스! 진정하게. 난 자네의 주종자 이기전에 친구일세. 잠시 시간을 주게나."


아스랄 왕은 마테스를 진정시켰고 외형이 바뀐 마테스는 킁킁거리며 커튼을 두 번 당겨 왕국을 바꾸었다. 마지막에 아스랄 왕의 눈에 보인 궁전은 허름하고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군데군데 거대한 거미줄도 쳐져 있었다. 


"폐하. 복수는 이쯤에서 무르기로 하지요. 다른 보여줄 것이 있습니다. 위로 따라오시지요."


2층 난간을 붙잡은 왕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다리가 풀렸지만 말없이 마테스의 뒤를 따랐다. 마테스는 회관 뒤편에 있는 첫 방의 문을 열었다. 내실 안에 한쪽 다리가 부러진 의자에 앉은 회빛깔 미라는 몸을 비죽 내밀며 앉아 있었다. 미라는 손과 발이 밧줄에 묶여 있었고 턱은 완전히 벌여져 몸에 닿아 있었다. 의자 주변엔 인간 크기만 한 새끼 거미들이 돌아다녔다. 다음 방에는 아무도 없었으며 인간을 고치로 가둬만든 알집이 바닥에 가득 찬 상태였다. 간간히 거미줄에 감긴 사람들이 끙끙거리며 움직이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방. 어미로 보이는 거대한 거미가 천장에 붙어 있었다. 그 거대한 괴물이 이동할 때마다 넓은 왕정 내부에 둔탁한 메아리가 울렸다. 검고 얇은 다리를 가진 거미는 언뜻 봐도 대형마차 8대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컸다. 내실 옆부분은 모두 뚫려 있었고 천장이 거의 다 깨져 거미가 몸을 밀어 넣은 상태였다. 성전 복도가 훤히 보였다. 거미가 몸을 비집을 때마다 대리석 덩어리가 쾅쾅 떨어졌다. 마지막 방은 첫 궁전의 왕좌였다. 아스랄 왕이 왕좌에 손을 내밀며 다가가자 마테스는 왕의 목을 기사단검으로 잽싸게 그었다. 왕의 눈은 붉게 물들었고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악의 구렁텅이에 빠진 늪지옥으로 변했다. 그때 나는 꿈에서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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