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마산의 전설

01]

by 언데드

* 본 이야기는 허구로 구상된 내용이며, 장소와 배경 및 실제 인물로 만든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나는 정오부터 한참 동안 산을 헤매다가 아홉 명의 의용병과 영수 삼촌 두 분을 작은 담장이 있는 공터에서 마주했다. 오래된 억새로 엮어 만든 지붕과 붉은 흙으로 둥그스름한 돌과 함께 대충 빚어 만든 집 옆에서 본 사람들은 어릴 때 마을에서 가끔 보였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마을에서 영웅으로 환대받았고, 각기 다른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몸에 퍼런 신기가 타오르는 걸 보자 다리가 떨렸지만 이내 정신을 중했다.

의용병들 뒤로 고개를 숙여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영수 삼촌들을 보고 안심이 됐지만 그보단 걱정이 앞섰다. 나는 뒷목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중국 표의문자 '새'를 두어 번 쓰다듬어 승냥이 영수인 메넬릭 삼촌의 정신과 연결해 자초지종을 들었다. 메넬릭 삼촌은 입이 무거웠지만, 숲새들이 날갯깃을 접는 걸 흘깃 보고는 정신감응을 통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녀석들이 얼마 전부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더니 함양 토벌대의 작은 성을 함락시켰어. 대장의 팔을 봐. 그토록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청중(靑蟲)에 감염됐잖나. 제길, 올해도 승산은 가망 없다고...!'


메넬릭 삼촌은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무거운 '으르렁'소리를 내었다. 민다나오 고원지대 무릉사원에서 지독하기로 유명한 어느 한 승려의 보좌를 맡던 루마드 삼촌이 대장처럼 보이는 거인의 주위를 맴돌며 진흙이 묻은 장화에 코를 갖다 댔다.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무릉사원은 평평한 고원지대에 화광암태바위 위로 지어진 필리핀의 오래된 도원이다. 수도승을 그만두고 조계종으로 종파 하여 파계승 리더로 거듭난 우드슨의 부당한 퇴마의식은 포악해진 환마군대를 일으켜 전레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진 곳이기도 했다. 그곳은 제자와 스승의 광기 어린 싸움의 역사가 있었다. 휴전의 침묵을 깬 차기대승의 수석인 우드슨의 포악한 성격을 감안하면 그가 벌인 전투는 일반적인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언제 벌어질지 모를 재앙과도 같았다. 공포, 그야말로 공포였다. 무적영웅이 나서서 사건을 금방 수습한다면 민생들 사이에서도 아무런 군말 없이 조용히 넘어갈 일이었겠지만 사건이 일어난 날 이후로 동승과 민생들은 그곳 주변에 가길 꺼려했다. 수인과 괴수형으로 몸을 변형시킬 수 있는 잠복에 능한 루마드 삼촌만은 조용한 접근이 가능했다. 루마드 삼촌은 환마와 일대 일로 대적해도 지지 않았으며, 장로 승려와 맞먹을 정도의 막강한 도력을 지녔고 또한 신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우드슨이 이끈 대군은 전쟁 끝에 승리했고 뒤늦게 삼촌이 도착한 현장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할 정도로 처참했다. 적갈색 로브로 가려져 목이 쪼그라든 환마들의 사체가 인간의 사체 외 섞인 채로 거리에 즐비했다. 유약이 발린 청동흉기에 찔려 전사한 보좌승려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전투현장에 널브러져 있었다. 돌담으로 이뤄진 바닥 곳곳에 길게 번진 핏자국이 멈춘 곳에 목이 잘려져 있었다. 무릉도원 대승의 잘린 머리가 눈은 채로 불로목이 있던 자리로 향해 있었다.


'...그때가 생각난단 말이지...얘야, 너만은 꼭...네 자신을 스스로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깊이 새겨들으면 좋으련만...!'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릉사원의 살아있는 심볼 '불로목(不老木)'은 환마의 왕이 수천년간 호시탐탐 노려왔다. 종국에는 환마리가 무릉사원을 침략하여 불로목을 수탈하는데 성공했다. 불로목은 선과 악으로 쉽게 변질되는 나무로 매우 이질적인 성질을 지녔으며, 환마무리와 승려대장이 쟁쟁한 전투를 벌이는 동안 전마경(電魔鏡)을 지닌 증원병사 환마가 불로목을 빼돌려 자신들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다. 무릉도원과 인근 지역은 불로목을 잃음으로써 불로목을 잃어 아픈 사람들이 더 이상 치료받을 수 없게 되었다. 루마드 삼촌은 그때의 잔인한 흔적의 냄새를 구체화하여 기억으로 떠올렸다. 그당시 전투가 끝난 며칠 뒤에 필리핀으로 온 영매 생님은 차갑게 식어버린 대승을 안고 몇날 며칠을 밤새 목놓아 울고나서 마드 삼촌과 함께 대승의 안식을 치뤘다. 그리고 며칠 뒤 영매 생님은 삼촌과 비행부적으로 한국에 다시 넘어왔다. 루마드 삼촌의 탐색본능은 대장의 안색을 살피는 보살핌이자 가녀린 위안이었다.


두 삼촌과 의용병들은 가까스로 신토불이 집 마당에 도착해 자신들을 맹렬히 쫓아오던 환마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우리 마을은 영매 생님과 승려대장이 함께 만든 강력하고 거대한 적색결계가 쳐져 있었기 때문에 환마들이 침범할 수 영역에 있어 안전했다. 환마()는 앞서 죽은 민생과 승려들과 영웅들의 사체에서 부활한 귀신목 영과에 해당하는 악귀로, 악신도들에 의해 거둬졌다는 정보가 대문짝만한 제목으로 조보에 알려진 바 있다. 추가란에는 [환마는 호리병에 거둬져 악신도들로부터 '강화의식'을 이행받은 뒤 환마의 덩치가 인간의 몇 곱절 불어났다]는 특이점 발견했고 이 사실을 의용병들은 서로 공유했다. 나는 여즉 우리나라에서 인간의 몇 곱절이나 커진 환마를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의용병들은 보았겠지만 만일 직접 대면했다면 그들을 상대할 자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가령 메넬릭 삼촌이나 루마드 삼촌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삼촌들은 '초대형 환마'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었기에 마주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했다.


잠시 최근에 세간이 떠들썩해진 원인을 떠올려보았다. 아 악신도들이 비대해진 환마를 추종하여 신으로 섬기는 곳이 있는가하면, 어떤 집단에서는 환마를 병사로 쓴다는 이야기는 현 의용병 대장이 3년간 머물렀던 전옥서의 밀서신을 통해 얼핏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환마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매우 드물어 마을 사람들을 포함해 외신의 군국병사들은 당최 알 리 없는 이야기로 들릴 것이다. 나는 어릴때부터 영매 생님과 영수 삼촌들, 간혹 전설을 아는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해서 환마가 있다는 걸 넘어 그들이 커진다는 것도 모두 진짜로 믿어왔지만 '영웅의 마을'로 불려지는 우리 마을에서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른들이 들려준 전래동화같은 미신을 진짜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환마의 공격은 모두 실체가 있었고, 그만큼 피해도 상당했으니까. 아마 처음으로 환마산에 처음 투입된 의용병들이 대거 상해를 입고 사망한 뒤로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환마의 존재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랑이나 곰 같은 산짐승에 당했겠거니 하며 환마에 대한 정보는 그저 우스갯소리로 일단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일일히 설명할 만한 사람이 의용병 중에 없어 마을에 잔치나 대행사가 있을 때마다 친구를 여읜 노인들이 회관 마당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 알려주었다. 그렇게 우리 마을은 점점 환마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좋은 소식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그래도 위험성을 알아야 마을이 수비에 대비할 수 있는데에는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마을 촌장님들의 대처는 해를 거듭할 수록 체계가 잡혀갔다.


의용병들은 포도대장이 주로 쓰는 흑색 모자를 조금 앞으로 기울어지게 걸쳤고, 모자 중앙에 달린 파란 깃이 새벽바람에 나부꼈다. 게다가 푸르스름한 기의 짙은 고동색 염주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붉은색과 노란색이 섞인 똬리가 모자와 챙 사이로 둘러져 있었고, 주렴이 위아래로 불어난 가슴을 쥐락펴락 할 때마다 덜렁거리는 염주는 허공을 오갔다. 게다가 사또복과 비슷한 명주도포를 갑나무처럼 둘렀고 성인 상반신만한 칼이 허리춤에 헐렁하게 채워져 있었다. 는 문득 두 갈래로 뻗어오른 고목에 누워 읽은 [난중일기]를 떠올렸다. 그들의 옷차림은 마치 신못저수지 둑에 출몰하는 적색 환마의 무리의 적인 영웅 병사 같았다. 그들은 얼추 고른 숨 밖으로 조금씩 서로의 눈치를 살펴 입꼬리를 올리며 서로를 '깜장 사또'라고 불러 댔다. 대장인 거신의 용병이 품에서 용단도 신장칼을 꺼내 손잡이 뒷부분을 열었다. 그러고는 근처에 있던 동료를 불러 무언가를 넘겼다. 가장 젊은 사람으로 보이는 청년이 호박색 호리병을 꺼내더니 대장이 준 것을 대장 입에 물려주고는 엄지 손가락으로 꾹 눌러막은 호리병을 흑색 담배끝에 갖다대었다. 어쭙잖은 자세의 청년이 호리병을 짧게 여닫고 대장은 깊게 빨아들였다. 그들이 흡연한 검은 연기는 국내산보다 연무량이 네 배 짙은 필리핀 산의 의용병의 귀중한 보급품 중 하나인 '현무연'이었다. 장작을 태워 피워올린 검은 연기처럼 쟂빛연기가 대장의 코와 입 밖으로 멀겋게 피어올랐다. 의용병 대장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청년에게 고개를 까딱여 뒤로 무르게 했다.


"휘유, 숨 좀 돌려야겠구만."


의용병들의 손에 현무연이 입으로 옮겨질 때마다 로 올라오는 뿌연 검은 연기가 시선을 빼앗았다. 그들이 감배를 태우는 행위는 어느 구석인가 영매 생님의 스승인 '영웅 할아버지'와 비슷했고, 간접적으로 그 냄새를 맡은 두 눈에서는 염주 위에 새겨진 문양이 더욱 특이하게 보였다. 동그라미 가운데 점 하나박힌 게 마치 사람의 눈동자가 그대로 박힌 것만 같았다. 굵고 거친 모든 염주알에 장인의 정신이 담긴 종눈들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고, 청량하고 음산한 기운을 잔잔하게 뿜어댔다. 또한 지금처럼 어둑한 시간에도 푸른 빛은 집 마당 전체를 비출 정도로 환히 빛났다. 그것은 '흉영도감' 특별부록에 상세히 기록된 대악무기로써, 환마의 영혼을 강제로 봉인할 수 있는 신비한 영물이었다. 단, 환마를 봉인하려면 영물에 힘에만 의존해서는 아니 되며, 부탄에서 2년간 회영술을 비롯한 다양한 주술을 배워야 했고 액인식을 치르는 과정 뒤에 경전도 외워야했다.

환마를 퇴치할 전사가 되려면 스무고개같은 인고의 협곡은 지당한 필수 과정이었다. 의용병들은 모두 이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선발된 무릉파의 일원으로, [무형국전 증패]를 쥐었다. 무형국전 증패라함은 암행어사의 마패의 역할과 같은 신분용비로, 신분제도로 정치판이 이뤄지는 국가에서는 희소가치가 최상급이었으며, 어느 국가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매우 귀중한 국보로 유명하다. 작은 땅덩어리인 조선에서 들은 어느 술쟁이 양반에 의하면, 이것이 국내에선 보기가 그렇게 드물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오늘, 나는 증패를 보지 못했지만 각자 하나씩 들고 있는 것쯤은 알았다. 영매 생님과 그 분의 스승님도 무형국전 증패를 늘 지니고 다녔다.


일행들 옆에서 서성이던 영수삼촌 중 한 분 메넬릭 삼촌은 진회색과 검은색이 한데 어우러진 승냥이었고, 다른 한 분인 루마드 삼촌은 날렵한 외모로 가냘프고 음침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여우였다. 아까말한 흉영도감 부록에서 본 정보로는 영수는 영매로부터 환마와 유일하게 대적할 수 있도록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짐승이었고, 무당 선생님들만이 데리는 특별한 '반마반수'로 기록되었다. 삼촌들은 '무뢰당' 출신 제자들이 높이 모시는 영매 생님의 오랜 친구이자 나의 '이간계종' 삼촌이기도 했다. 메넬릭 삼촌은 루마드 삼촌보다 덩치가 조금 컸고, 두개의 노랗고 푸른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루마드 삼촌의 발끝에서는 청록색과 검은 색이 섞인 불이 타올랐다. 영수 삼촌 둘은 내게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의용병 아저씨들과 젊은 청년인 형아는 영매 생님이 애지중지 키워온 '의붓아들들'이다. 의용병 부대는 아주 오래전부터 환마 소굴을 소탕하기 위해 모인 최정예 집단이다.


환마는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숲 속의 귀신 무리이다. 내가 어릴 적 영매 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어떤 숲 속에 발을 들여놓거든 그들을 항시 조심하라 하셨다. 이들은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흉내 낼 수 있으며 곤봉산의 도깨비들과 대적해도 힘에 부치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라고 들었다. 또한, 이들은 언제든 본 적 없는 사물이나 동물로 변할 수 있었고 낮에는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고 했다. 이들은 환마산의 주인이자 새벽에 가장 강한 힘을 가졌는데, 결계가 쳐진 마을을 피해다니면서 성을 공격했다는 흉외도 나돌았다. 의용병들은 환마들이 유일하게 나서서 돌아다니는 새벽에 그들을 생포하라는 노인의 임무를 받았다. 이번 임무는 어쩌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목이 타들었다. 그것도 하필 내가 아플때에, 약이 떨어져 약초를 캐러 갔다가 내려오는 그 잠깐의 사이에 이들을 마주한 걸까. 그래도 다행히다,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아서.


영매 생님은 왠지 그날따라 눈빛이 다르셨다. 분노와 슬픔이 벼린 칼날의 '복수의 눈빛'이었다. 친아들과도 같은 날 두고 여린 어깨에 손을 얹으며 "내 모든 것을 네게 맡기니 내 평생을 함께한 영수들과 함께 꼭 복수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두어 년 전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이제 막 열한 살을 넘긴 나는 의용병 아저씨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게 된 '최정예 의용병' 마을지킴이 대표로 쓸쓸히 남게 되었다.

영매 생님이 돌아가셨던 날은 공식적인 장례를 치를 새도 없었다. 오전 네 시가 되어 마을의 한 집에 불이나 대피령이 떨어져 혼비백산이 되었던 것이다. 짚 지붕이 불에 타올라 뿌옇고 짙은 먼지바람이 일고 상투를 쓴 양반 아저씨들이 흰 천으로 코와 입을 막으며 온 거리를 방방곡곡 헤매고 있었다. 아낙네들이 작열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가 마을 곳곳을 양반들과 함께 헤집었다. 먹먹해진 귓구멍으로 검게 변해버린 피가 다소곳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 왠 날!우리 집과도 같은 영매 생님의 지푸라기 지붕이 활활 타들어가고 있었다.


영매 생님이 돌아가시기 며칠 전, 나는 기풍마을에서부터 40리 떨어진 마을에서 담배를 즐겨 피우는 노인에게 맡겨졌다. 부모님의 역할을 해주셨던 영매 생님은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기시감이 깃든 어깨를 꼭 붙잡 흐느끼며 말씀하셨다.


"아가야, 넌 내 최고의 피조물이자 선물이자 축복이란다."

영매 생님이 세상을 뜬 소식을 나는 누군가에서 전해 들었다. 기억은 거의 날아가고 없었지만 그때의 말씀만큼은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나와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앞에 두고두고 하는 소리가 분명 '네 어머님이 돌아가셨어'랬다. 탈 것 하나 없는 가난한 동네였기에 친구는 맨발로 아랫동네에 언제 배웠는지 모르겠는 황급히 찾아와 소식을 전해줬던 것이다. 녀석의 부모님도 의문의 화재에 휘말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숯으로 남루히 남겨졌다. 녀석은 아마 마을 전체가 타버리자 소식통인 연이와 함께 중대한 소식을 전하러 살기 위해 발버둥치며 모연 마을로 도망쳐온 것이었다. 그 아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잘 살고 있다.

영매 생님은 '네가 환마 토벌 작전에 중심이 되려면 아랫동네 노인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하셨다.

그 노인은 고약하고 성질이 급했으며 파이프 담배를 결코 손에서 놓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처마 밑에 까치무리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희뿌연 담배 냄새가 하도 고약해서다. 노인의 집 안은 집현전처럼 수많은 책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곳에서는 환마와 도깨비, 영수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또한 영매가 하는 일, 인간 마음에 대한 책들, 약초의 효능에 대한 정보와 문서, 밥과 반찬 만드는 , 식이요법과 식사 예절, 무기 제조법, 부적 사용법 등등이 있었다. 죄다 내가 좋아할 만한 흥미있는 것들이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책이 좋아 영매 생님의 무릎 위에서 종종 전래동화를 읽다 피곤해 잠이 들곤 했다. 우리는 완벽한 행복을 누리는 '진짜 가족' 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면 책을 좋아하게 된 것도 영매 생님의 영향에 따른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 책이 모두 홀라당 타버리는 바람에 나는 노인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이거 이거 읽어봐도 돼요?"

노인은 입가에 잔주름을 보이며 실실 웃었다. 그러고는 "물론"이란 대답도 빼놓지 않으셨다. 빡빡하게 굴어도 보살펴주시는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맘 편히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가끔 연이나 또 다른 친구를 데려와 같이 수정과나 식혜를 먹으며 책에 대한 농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야기를 하다 '영매'나 '도깨비', '환마'와 같은 주제가 나오면 노인은 파이프 담배로 혹이 날 정도로 머리를 후려쳤다.

"그런 얘기는 어디 가서도 함부로 입에 담는 거 아니다!"

정신이 반쯤 나간 친구는 반쪽 눈을 깜빡이면서 혹 난 머리를 슬슬 비볐다. 그런 날이면 나는 노인과 팽팽한 눈싸움을 했다. 한대 더 맞는 사람은 울던 친구가 아니라 버릇없던 나였다.

"아, 눈 안 깔어!"

노인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일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던 건 오직 친구와 함께 있을 때였다. 노인이 잠시 장터로 나가면 우리는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실컷 나눌 수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파이프 담배를 한 모금 빨아보기도 하고, 침대 밑에 허름한 '귀부인 전'을 보며 왁자지껄 떠들며 웃기도 했다. 닭장에 있는 달걀을 꺼내 먹기도 하고, 뒷마당에 놓인 빗자루로 칼싸움을 하기도 했다. 노인이 돌아올 때가 되면 독수리처럼 시력 좋은 친구가 문방지에서 황급히 일러주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던 듯이 주구장창 책만 읽었다.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왜 빗자루 위치가 맞지 않느냐며 혼자 때아닌 역정을 내었다. 이상하게 그날따라 밥이 더 맛있었다. 남모를 일을 하는 게 뭐든간에 더 재밌으니까 그런 날이면 잠에 들때 웃음이 지어졌다.


영매의 유언으로 노인의 집에서 산지 어언 사 년째 되던 날, 뜻밖의 호외가 불었다. 의용병 시험을 치르던 호연지기 친구가 최정예 의용병에 합류하게 된 것이다. 몇번의 예비훈련과 실전 전투로 우리는 친구를 넘어 전우로써 의의를 다지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예의를 중시하던 노인은 웬일인지 8첩 반상을 꺼내놓고는 마을에 축제라며 사람들에게 막걸리를 돌렸다. 가난했던 영매 생님은 내 생일을 빼놓지 않고 3첩 반상이라도 차려주셨는데, 노인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보다 좀 더 호화롭게 대접해주었다.

노인은 마을의 영웅이자 장로였다. 그도 한때는 의용병 출신의 리더였다고 한다. 그가 은퇴한 이후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에 대한 전설이 쉬이 떠나가는 날이 없었다. 유경험자를 위해 국가에서 지원하는 일정한 수입금으로 모연 마을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의용병을 가장 많이 배출한 마을이기도 했다. 읍내에서 제일로 자부하는 마을은 읍내에서도 단연, 모연 마을이었다. 나 역시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 전설의 반열에 들었는데, 죽을뻔한 위기에서 홀로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의용병을 모집할 때 인원수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남녀 구분도 없었다. 나이는 최소 열두 살 이상이어야 뽑힐 수 있었다. 우리 병단은 대부분 젊은 남녀로 구분 지어져 있었다. 리더 왕눈, 왼쪽과 오른쪽에 의족을 찬 두 자매, 나의 절친인 여자애, 조용한 재현 형님, 이쁜 옥 누나, 하루 두 끼니만 먹는 듬직한 아저씨, 느긋하고 고지식한 아주머니, 그리고 나.

우리는 모연 마을에서 발탁된 4번째 의용병이자 최초로 국가에서 시험을 치러 정식적으로 승인된 특별 병단 '환마 토벌대'다. 1기는 처참하게도 나를 제외한 모두가 사망했다. 그들 중 내가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영매의 제자라서 그랬다.

영매 생님은 신기를 부려 환마의 공격을 막는 법, 환마를 따돌리는 법, 영혼을 흡수하는 법 등을 가르쳐주었다. 기풍 마을에서 내가 배웠던 건 모두 환마에 대한 것들, 대인 무술뿐이었다. 사람들의 기대치는 항상 높을 수밖에 없었다. 혼자 지쳐 울다 잠들기를 반복하던 중 영매 생님이 내게 말했다.


"아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함께 한다는 걸 잊지 말어라."


그땐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무슨 수로 나를 이해하겠다는 건지. 어린 나이에 의용병에 반강제로 합류하게 되었고 사람의 몸이 환마로부터 갈가리 찢겨 나가는 장면을 의도치 않게 목도했다. 죽음은 아주 짧고 단 한순간이었다. 부엌간에 숨어들어 깨진 단지 틈으로 환마들이 지나가기를 지켜봐야만 했다. 나이의 한도를 무시하고 특별히 영매 생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병단에 일찍 합류할 수밖에 없었다. 돈은 벌어야 했고, 할 줄 아는 일이 없으니까. 날 알아줄 부모가 없으니까. 이 작은 아이가 강해지기를 바라면서 영매생님은 등을 떠밀었다. 어렸던 나는 그게 사랑인 줄 모르고 한없이 미워만했다. 생님이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영매 생님은 당신이 떠나가시기 전, 부적과 책 하나를 내게 맡겼다. 허리춤에 묶은 동아줄에 책과 부적을 끼고 다녀서 잃어버릴 일은 없었다. 노인의 집에 온 뒤로 나만 알 수 있는 찬장 구석에 숨겨두었다. 친구는 이 사실을 몰랐다. 노인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이 책은 평생 소장할 하나뿐인 엄마의 하나뿐인 소중한 책이며, 그녀의 하나뿐인 유물이기도 했다. 언젠가 노인과 친구에게 이 사실을 말해줄 날이 온다면, 그때의 난 의용병의 리더쯤은 되어있을 것이다. 엄마는 알고 있었다. 내가 혼자 이렇게 고생할 것이란 걸. 영매 생님은... 그러니까 내 양엄마는 밤이면 밤마다 신에게 닿지 않을 기도를 줄줄이 읊으셨다.


"황송하기 아뢰오나, 제 아들에게 동방의 신장군이 깃들게 하옵소서. 부디 열심히 살고 있는 아이니 환마와 도깨비로부터 지켜주옵시고, 제 일 잘 해낼 수 있도록 눈여겨 봐주소서. 또한 신성한 마음 잃지 않게 하옵시고 또..."


엄마의 기도가 시작되면 나는 자는 척하다 말고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넘어오는 기도소리를 어깨 너머로 듣다가 새우잠으로 자기 부지기수였다. 복받쳐 오는 가슴을 달래주는 것인지, 꿈에서는 화창한 산과 사슴들이 노니는 풀밭이 펼쳐졌다. 그곳에서 마음껏 뛰노던 중 누군가 나를 쳐다보거나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지면 부스럭거리면서 꿈에서 깨어나곤 했다. 부스스하게 뜬 옅은 시야로 전해지는 엄마의 기도소리는 잔잔한 자장가로 들렸다.

꿈에서도 안 방에서도 엄마의 옥구슬 목소리는 또렷한 물방울로 나의 눈두덩이를 적셨다.

내가 부스럭 대면 엄마는 기도를 멈추고 촛불을 껐다. 나는 일어나 변소로 가면서 뒤돌아봤다. 엄마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문간을 붙잡은 한 쪽 어깨에 힘이 빠졌고 옅은 한숨이 나왔다. 엄마는 나를 잘 알았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가장 많이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뒷모습이었다.


변소를 가던 길은 늘 차갑고 축축했다. 온통 검은 뱀장어가 기어다닌 흔적처럼 질척이던 진흙바닥이었고, 썩은 물이 고여 퇴적된 지반처럼 어두운 쪽으로 다양하고도 흉측한 색들의 조합이 드러났다. 깜깜해서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이 곳은 보이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처참한 수렁이었고 자칫 멈추면 왠지모르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불쾌한 곳이었다. 응어리진 무언가를 힘껏 배출하는 일이. 검은 진실을 알리는 바보같은 일이. 내 말이. 밉고도 사랑스러웠다. 우리 모자에겐 기도가 곧 책임감이었다. 어머니의 염원한 간절함이 신께 가닿을 것 같지 않았다. 일기장이 너덜해지도록 검은 꽃길을 이어붙이는 일로써 더이상 희망을 놓는 일은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편히 잠에 들지 못했다.


청충(靑蟲):

전마경(電魔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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