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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데드 Aug 19. 2022

엎질러진 물

이제 물은 엎질러졌다. 내가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세상은 기필코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았다. 또한 다양한 이유를 빌미로 작은 세상에서 기어 나와 힘없이 스스로 팔을 휘적거리는 작은 개구리를 못살게 굴 자들이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괴롭힐 것이란 것도 알았다. 그럴 때면 오랫동안 하찮은 몸뚱이를 지켜온 방어기제가 나를 지켜줄 것이란 것도 알았다. 그 말인즉슨, '궁지에 몰린 쥐', 아니 '궁지에 몰린 개구리'가 더 올바른 표현일 테다. 아무런 학위 없이 현재까지 살아온 내 모습은 그저 배움 없이 살아온 하나의 조촐한 '신의 피조물'일까. 고아원이란 우물 밖은 생각보다 더욱 험난한 세상이었다. 그 우물이 이젠 엎질러진 것이다. 


어설픈 헤엄에도 응원을 하는 지인들이 있다. "힘내."라던가 "잘할 수 있어!"와 같은 피상적인 응원이 아닌 묵직한 위로다. "무너져도 좋으니까 일단 해 봐." "안 되면 어때, 다른 거 잘하면 되지." "내가 있어줄게."

묵직하다 못해 정신 차리라고 꿀밤도 먹여준다. 멍하니 있는 자신을 다른 영혼을 통해 볼 때면 '너 정말 뭐 되려고 그러고 있느냐'는 말이 목젖을 통해 나올 텐데. 진심 어린 응원을 하는 이들은 참 유하다. 부정적인 편으로 관대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어떻게든 비틀거려도 좋으니 하겠다는 거 될 때까지 한 번 해봐라라는 의미 같다. 


미심쩍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 텐데 어떻게 그들은 보잘것없는 행동을 골라서 하는 내게 위로의 말을 건넸을까? 왜 곁에 있어줬을까? 뜻밖의 용기에서 희망을 본 걸까?

아,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물에서 헤쳐 나와본 자들은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넌 안 돼"라는 말을 듣고도 귀를 닫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에 최소한 한 번쯤은 뛰어들어본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무장하고 영리를 겸비한 사회적인 책략가, 경험의 선배(이들 중에는 나이가 조금 어린 사람도 있다), 대처자, 고군분투하는 자들이었다. 이제 막 하고 싶은 일에 몸담아 뛰어든 지금.

내가 그들을 통해 배운 건 '물을 엎는 방법'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는 일'이었다.  

덕분에 털이 다 빠진 새양쥐에서 개구리로 진화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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