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고니아>가 잃은 <지구를 지켜라!>의 눈물
2003년은 한국 영화에 있어서 다시 없을 황금기였다. 지금은 전설이 된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클래식> 등과 같이 한국 영화사에 남은 작품들이 어떻게 한 해에 개봉했는지 의문일 정도다. 지금은 거장이 되어버린 감독들의 초기작들이 쏟아져나온 축복받은 해에 마냥 웃지 못한 걸작이 있었으니 그 영화가 바로 <지구를 지켜라!>였다.
<지구를 지켜라!>는 코믹스러운 홍보 문구, 우스꽝스러운 포스터를 통해 코믹 영화로 홍보된 것과는 다르게 매우 상반되는 반전을 지닌 영화였다. 그렇기에 당시 많은 관객들은 영화를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고, 이 영화는 평단의 호평과는 다르게 관객수를 10만명도 채우지 못한채 막을 내린 영화가 되었다. 그런 저주받은 걸작이 2020년대에 들어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된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자 한국의 영화팬들은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감독으로 <더 페이버릿>, <가여운 것들>로 유명한 요르고스 란티모스가 앉고 <유전>, <미드소마>로 장르의 대가가 된 아리 애스터가 제작을 맡자 그 관심은 기대로 변모하였다. 그렇게 주목을 받은 영화 <부고니아>는 예상대로 평단의 호평을 등에 업으며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과 여우주연상 등에 노미네이트 되는 등의 쾌거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영화를 보는 내내 원작인 <지구를 지켜라!>와의 비교를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본작의 화면 구성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시대와 국가적 배경에 맞게 바뀐 등장 인물들의 성향들은 그저 이야기를 반복하는 저열한 리메이크가 아님을 증명했고 테디가 어머니를 회상하는 장면들은 수려하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훌륭했다. 허나 그 이상의 울림을 주는 무언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원작 <지구를 지켜라!>의 경우 낙차가 매우 큰 롤러코스터 같은 영화다. 우스꽝스러운 분위기의 인물들 그리고 각종 소품들을 통해 극의 분위기를 가볍게 만들었다가 주인공 병구의 이면에 있었던 깊은 이야기를 들추며 급변하는 서사적 낙차를 훌륭하게 만들어냈다. 특히나 병구의 과거는 가혹한 체벌 문화를 비롯한 탄광 노동, 중화학 공업의 발달 도중에 발생한 수많은 산업 재해까지 대한민국이 발달해온 일련의 과정에서 기술적,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성공하게 만들어온 요인들이 결국 현재의 대한민국을 병들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는 역설을 말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주인공인 병구는 화려한 발전의 이면에 존재했던 상흔을 그대로 품은 존재로 묘사된다. 모두가 이상하게 바라보고 우스꽝스럽다며 무시하지만 비극적이게도 그는 우리 사회가 계속해서 덮고 무시했던 사회 문제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폭발과 광적인 집착, 편집증적 증세들은 당위성을 얻는다. 자신을 병들게 한 세상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했던 한 남자의 처절한 일대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면서도 우리 역시 또 다른 병구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든다.
반면 <부고니아>의 경우 의도적으로 감정의 낙차를 줄여놓은 채 화면 속 인물들을 관찰하는 현미경과 같은 영화다. 극이 시작했을 때부터 테디와 도니는 정상적인 인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넘어 위험한 인물처럼 보인다. 성적 욕구를 없애야 한다며 화학적 거세를 하는 등 원작에 비해서 더 과감하고 위험한 인물인 것처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원작에 비해 납치한 CEO가 외계인인지 아닌지에 더 궁금증을 느끼도록 관련 대사들을 축약하고 묘사를 간소화하여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에 더해 본작 역시도 테디의 어머니가 살충제로 인해 피해를 받았음을 묘사하지만 원작의 그것에 비해서 묘사는 간소화 함과 동시에 그들이 의미하는 지구의 범위는 키워놓았다.
원작의 경우 병구가 걱정한 지구는 결국 탄광 노동자였던 아버지, 화학 공장 노동자였던 어머니의 아픔을 무시했던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가깝다. 반면 테디가 걱정하는 것은 벌들이 죽어 전 인류의 식량이 감소하는 종족적 측면의 비상 상황을 나타낸다. 이러한 극명한 대비는 병구가 사회적 문제에 의해 병들어버린 개인을 비추며 세상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존재라면 테디는 인간이라는 종이 자신들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어리석은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즉, 병구와 테디는 각각 사회적 맥락 속 한 개인이 겪는 문제와 전 인류적 문제에 대한 담론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부분에서 <부고니아>를 보는 내내 <지구를 지켜라!>와의 비교를 멈출 수 없었다. 누군가는 <부고니아>의 수려한 화면 구성과 연출에 더욱 감명받을 것이고 냉소적 회의에 더욱 큰 공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로 틀린 것이 아니다. 색감이나 연출, 화면 구도와 카메라 움직임까지 외적인 측면에서 <부고니아>는 많은 발전이 있었던 리메이크작이고 본작의 냉소적 회의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질 수 없는 자세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가치를 지님 역시 자명하다.
하지만 세상이란 잔혹하고 인간이란 어리석은 존재라는 냉소적 관찰보다 잔혹한 세상과 어리석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청유문이 더욱 가슴에 와닿았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예술이란, 영화란 관객으로 하여금 허구와 현실을 동일시하게 만들어 세상을 바꿀 힘을 지닌 매체여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