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신성
글들을 정리하다가, 부인이 건강했을 때 나누었던 대화를 기록해 둔 글 하나를 다시 읽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그저 산책길의 말로 흘려보냈던 이야기였지만, 지금 다시 보니 오래 남아 마음을 건드린다.
개인성과 에고이즘이 강해진 이 시대에, 공공성을 강조하고 타인과 함께하는 교육적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더욱 중요해졌다. 교육이 개인의 성취와 서열을 가르는 기술로만 기능할 때, 아이들은 함께 살아가는 감각을 배울 기회를 잃는다. 일제고사와 학력 우선을 내세운 교육감의 모습을 떠올리며, 과연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영랑호를 돌며 부인과 유치원에서 사용하는 개념 장난감과 놀이감, 놀이도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산책길에서 오간 말들이었지만, 그 대화는 생각보다 깊은 곳을 건드렸다.
장난감이나 놀이감이라는 말에는 대체로 ‘내 것’이라는 개인적 소유의 감각이 강하게 배어 있다. 아이가 쥐고, 차지하고, 혼자 완성하는 세계가 자연스럽게 전제되는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는 개인성뿐 아니라 이기성의 기운도 함께 스며 있다.
반면 ‘놀이도구’라는 말은 달랐다. 함께 사용하며 관계를 확장하고, 타인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가 끊임없이 달라진다. 사용법이 고정되지 않기에 창의적으로 연결될 여지가 열리고, 놀이 역시 개인의 성취가 아닌 공동의 경험으로 확장된다. 개념적으로도 공공성을 내포한 언어처럼 느껴졌다.
앞으로 ‘장난감’이 아닌 ‘놀이도구’라는 말로 사용하겠다는 부인의 생각에 나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말 하나가 사고의 방향을 바꾸고, 사고는 결국 교육의 태도를 바꾼다. 학급에서도 개인성보다는 공공성을 지향하고, 그 의미를 담아낼 수 있는 개념과 언어를 더 의식적으로 찾아 사용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인은 나보다 ‘언어의 정신성’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말이 단순한 명칭이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된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부인의 말은 늘 한 박자 늦게, 그러나 오래 남는다.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더 조심스레, 더 귀 기울여 그 말을 다시 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