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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Oct 28. 2022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

'살기 좋은 나라' 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

영국으로 가기 결심한 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응원해 주었지만 '한국만큼 살기 좋은 나라도 없는데 왜 굳이 불편한 타지 생활을 하려 하냐'라는 걱정 어린 시선도 많았다. 20대 때는 막연하게 '해외 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면, 30대에 한국을 떠나기로 선택한 것은 나에겐 로망보다는 철저히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과연 한국이 나에게도 '살기 좋은 나라'일까? 늘 의문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경험과 느낌이라 조심스럽지만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을까 싶다.



한국에서 가지지 못했던 것들을 찾아서...


워라벨


대학 졸업하자마자 24살부터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동안 진짜 일만 하면서 치열하게 열심히 살았다. 업계의 특수 상황일 수 있지만 복지나 처우가 좋다는 대기업에서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시 퇴근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야근이 많았다. 스타트업에 다닐 때는 며칠 연속 밤을 새우기도 했다. '20대의 열정'이나 목표를 위해서는 돈이나 시간이 희생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돌이켜보면 나에겐 항상 퇴근 후 삶이 소중했는데 워라벨을 추구하는 사람은 커리어에 열정이나 욕심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기도 했다. 그나마 최근 몇 년 동안은 나라에서 주도해서 주 52시간(참고로 여기서는 주 40시간 근무도 많다고 생각한다.)을 추진하기도 하고 이미 많은 기업에서 근로 조건을 좋게 만들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주변을 돌아보면 워라벨로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직까지도 한국에서의 워라벨은 일부 사람들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나는 내 커리어와 커리어 밖의 삶 둘 다 지키고 싶었지만 한국에서는 둘 다 이루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젠더 감수성


딱히 모나지 않은 성격인 내가 유일하게 날을 바짝 세우며 발작 버튼을 눌릴 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여성 인권', '양성평등', '페미니즘' 등 젠더 이슈와 관련한 공감 능력 부재를 느낄 때이다. 아마 대한민국의 모든 여성들이라면 공감하겠지만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을 시작으로 나에게도 페미니즘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한국 사회의 만연한 '여성 혐오'가 점점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해를 거듭할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심해지는 젠더 갈등에 진절머리가 났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던 정치인도 결국 '여성 혐오' 범죄를 피해 갈 수 없었고, 인식을 바꾸기 위한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특히 남성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백래쉬는 그칠 줄 몰랐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한국의 젠더 감수성 부재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히 사회적 문제라는 것이었다. 나라의 근간을 건드리거나 이 나라에서 혼자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이상 한국에서 페미니스트란 홀로 싸우는 외로운 잔다르크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성 불평등'은 범 지구적 문제라 영국에도 여전히(당연히) 성차별이 존재하고 아직 완벽한 양성평등을 이룬 나라는 이 지구상 그 어디에도 없지만, '여성 혐오' 문제가 사회 전반적으로 철저히 도외시되는지, 그래도 모두가 경각심을 가지고 있는지는 정말 큰 차이이다.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사회에서 현실에 순응하며 살 것인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나아지고자 노력하는 사회에서 살 것인지의 문제였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커리어 (특히 여성으로서)


위의 '젠더 감수성'과 연결되는 내용인데, 커리어 우먼으로 장기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져 봤을 때도 한국에서는 힘들겠다고 느꼈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진 선배들이나 친구들을 보면 여성으로서 커리어와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신의 능력에 가까워 보인다. (정말 x 100 이 세상의 모든 워킹맘들 진심으로 존경한다.) 요즘은 맞벌이가 기본 디폴트이긴 하지만 '육아' 와 '커리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쪽은 아직까지 여자이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주변을 둘러보면 임원들은 죄다 남성들이었고 그나마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여성 임원들은 싱글이거나 (싱글이면 싱글이라고 욕함) 가정이 있더라도 많은 희생을 치르거나 존경 대신 '저 여자 독하다'라는 평가를 받곤 했다. 그렇게 주변에서 안 좋은 예시들을 워낙 많이 보다 보니, 내가 한국에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얻는 이득이 무엇일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가족'이 주는 행복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얻게 되는 '베네핏'을 이야기하는 것) 결혼 후에 여자들에게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내가 과연 커리어 우먼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의 대답은 No였다. 한국의 출산율이 낮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여성과 남성 임금 격차에 대한 OECD 자료 - 31.1%과 14.3% 사이에서 당연히 후자를 고를 수밖에...


다양성


한국은 '다양성'과는 사실 거리가 먼 나라이다. 아주 어린 나이부터 똑같은 교육을 받으면서 자라고, 당연히 대학은 가야 하고 졸업하면 회사를 들어가야 하고 30대 초반쯤에는 당연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사회가 정해놓은 틀과 정답에서 벗어나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국민 의식 수준이 높고 국민들끼리 비슷한 생각을 하고 단합이 잘 된다는 (내가 한국에 대해 가장 리스펙트 하는 부분) 장점이 있지만 사회의 정답에 따라가기 급급하다 보니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혹은 알더라도 그 욕구를 누르며 사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나는 20대 중반까지 '정답'에 가까운 삶을 살다가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이 이끄는 대로, 정답과는 아주 먼 선택들을 하며 살았는데 그 과감한 선택들이 그동안 나를 엄청나게 성장시켰고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의 조언을 전혀 듣지 않았기 때문인데(?) 한국에서는 사실 그런 마인드로 사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나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선택들이 정답의 유무를 떠나 그 자체로 존중받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나는 나중에 내 자식들도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본인들이 진짜 원하는 선택을 하며 살길 바란다. 얼마 전에 직장 동료가 한 말 중에 가장 와닿았던 말이 있는데 - "There is no definition of Londener (런더너에는 정의가 없다)" - 내가 런던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나이, 인종, 성별, 출신 국가, 성적 취향 (sexuality) 등 상관없이 모두가 어우러져 사는 곳, 가장 나답게 살 수 있는 곳.




그래서 영국은 완벽한 나라일까?


이 세상에 완벽한 나라는 없으니 당연히 정답은 No이다. 영국도 단점이 아주 많은 나라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장점이 많이 없어진 데다 요즘은 정치적인 이슈로 정말.. 개판이 따로 없고(?) 특히 런던의 경우, 살인적인 물가와 집세로 기본적인 인간다운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많다. 나는 한 달에 1300파운드(한화로 약 210만 원)의 월세를 내는데, 여전히 2명의 사람들과 주방을 셰어하고 냉장고에서 높이 한 뼘 정도의 1칸만 내 자리이라 음식을 마음껏 두지도 못한다. 그리고 밖에서 외식을 한 번이라도 하게 되면 최소 30파운드(한화 5만 원 이상)는 가볍게 쓰고 주 2일만 사무실에 나가는데도 교통비가 한 달에 20만 원 가까이 나온다. 밤 9시 이후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은 꿈도 못 꾸고 가끔 당하는 은근한 인종 차별에 거기다 동양인 여자로서 당하는 희롱까지... 어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는, 위의 모든 단점들을 모두 상쇄시키는 장점들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런던에 와서 가장 성장 가능성이 큰 업계와 직무로 이직했고, 업무에 완전한 자율성이 주어진 것은 물론 내가 원하는 대로 재택근무/오피스 근무를 선택할 수 있어서 워라벨 만족도도 아주 최상이다. 타인의 시선에 신경 쓰기 보다 나답게 사는 법,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다양한 사람들을 정말 많이 만나다 보니 편견도 사라지고 매일 새로운 인사이트를 얻으면서 식견도 넓어지는 것을 느낀다.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 재단하고 판단하지 않는 친구들(물론 한국에 있는 친구들도 마찬가지지만), 직장 동료들, 나를 '동등한 파트너'로 생각해 주는 젠더 감수성이 높은 남자를 만나서 행복한 연애도 하다 보니 여기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살기 좋은 나라' 란?


'살기 좋은 나라'의 정의는 사람마다 매우 다르다. 내 주변에는 해외에서 오래 살았더라도 나와는 반대로 한국이 최고라며 돌아간 사람들도 있고,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더라도 영국이 아닌 다른 나라를 선택한 사람들도 많다. 각자에게 맞는 라이프스타일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고 그런 맥락에서 한국은 나의 옵션에서 제외되었을 뿐이다. 나도 가끔 영국에 살면서 불편을 겪을 때마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한국이 그립다. 무엇보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해 주는 가족/친구들,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 편리한 생활 등... 한국의 장점을 말하라고 하면 끝이 없고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울 때가 더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에서 언급한 4가지가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이런 류의 글을 쓸 때마다 조심스러운 것이, 나는 소위 말하는 '탈조선' 이 마냥 정답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해외 생활에 대한 지나친 로망은 오히려 경계해야 한다. 타지에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한다는 것은 절! 대! 쉬운 일이 아님을 매일매일 피부로 느끼면서 살고 있다. '살기 좋은 나라'를 판단하기에 앞서 본인의 성향과 더불어 내가 진짜로 뭘 원하는지, 내가 죽었다 깨어나도 바꿀 수 없는 가치관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정말 다시 한번 본인의 comfort zone에서 벗어나는 것을 추천한다. 아직도 매일매일이 챌린지이지만 그래도 너무 행복하고 런던으로 온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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