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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Dec 01. 2022

영국에서 만난 케미 99.9% 보스

ENFP 직장인을 회사의 노예로 만드는 법

그동안의 숱한 이직으로 배운 점이 있다면 회사 사람들, 특히 보스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처음엔 다 좋아 보여도 결국엔 함께 일하면서 산전수전을 겪다 보면 상대의 본성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물론 이건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용되는 듯하다) 내 경험에선 그 기준이 입사 후 대략 3개월에서 4개월이었는데 그래서 새로운 곳에서 일을 하게 되더라도 동료들에 대해 섣불리 좋다/나쁘다 판단을 내리지 않게 되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7년이나 하고 런던으로 이직한데다가, 기존에 하던 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커리어를 시작했기 때문에 취직한 기쁨도 잠시, 한국 회사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문화도 언어도 전혀 다른 영국에서 과연 직장인으로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걱정부터 앞섰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모든 게 기우였다. 운 좋게도 정말 좋은 동료들을 만났고 특히 나와 케미가 아주 잘 맞는 보스를 만나서 (애초에 완벽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목도 99.9%라고 함) 이 회사에 꽤 오래 다닐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느낌이 든다. 모든 직장인이라면 공감하겠지만, 나와 잘 맞는 상사를 만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그래서 오늘의 글은 나의 보스에 대한 헌정글이다.


8월에 입사했으니 이제 만 4개월 차에 접어들었고 10월부터 내 담당 클라이언트가 생겼다. 우리 회사는 이커머스와 관련된 곳이라 11월 블랙 프라이데이, 12월 크리스마스, 복싱 데이, 연말 등 가장 중요한 쇼핑 이벤트들이 이 시기에 몰려있기 때문에 하필 아주 바쁜 시기에 실무에 투입이 된 것이다. 가장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회사도, 팀원들도 많이 예민해진다는 뜻이라 바짝 긴장을 했었다. 그리고 진짜 정말 정말 정말 바빴다. 나로서는 새로 일도 배워야 하는 데다 모국어가 아닌 아닌 영어로 영국의 굵직 굵직한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늘 2배의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잘해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압박과 나의 (아직 완전히 버리지 못한) 완벽주의 성향이 겹쳐져서 블랙 프라이데이 직전 2주는 "와 이렇게 일하다가는 번아웃 오겠는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다 보스 덕인 것 같다. 나와 케미가 잘 맞는 몇 가지 이유를 정리해 보았다.



1. 나를 언제나 춤추게 하는 칭찬

내가 제일 좋아하는 1번 이유. 나는 칭찬에 정말 약한 편인데, 그녀는 늘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특히 회사에서 내 능력을 인정받고 칭찬을 받게 되면 그날로 회사에 목숨을 바쳐(?) 일을 한다. 그만큼 칭찬은 나의 가장 큰 동기부여이다. 담당이 생기자마자 전임자가 싸놓은 똥을 치워야 하는 상황이 있었는데 매우 화난 클라이언트를 한 달 정도 상대하면서 좋은 협의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때 클라이언트와 주고받았던 이메일들이 있는데 매니저가 이메일을 프로페셔널하게 아주 잘 쓴다고, 나보고 일을 굉장히 빨리 배운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도 종종 그때가 생각난다. 땀 흘리며 3시간 동안 메일을 쓰던 순간.... (그리고 그 클라이언트가 사실 내 최애 브랜드 중에 하나인데 그 이후로 그 브랜드 옷을 안 사 입게 됨...ㅋㅋㅋㅋ그정도로 트라우마였다.)

칭찬을 날리는 보스와 그에 맞춰 춤추는 나

그리고 그 사이에 동생 결혼식 때문에 2주 동안 한국에 다녀왔고 돌아와서 11월 초에 보스와 캐치 업 미팅을 했다. 이것저것 업데이트 이후에 나보고 일은 좀 어떠냐고 하더니, 포트폴리오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정말 잘 하고 있고 나의 업무 능력이 impressive 하다는 피드백을 주었다. 그리고 임원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좋고 얼마 전에도 본인이 임원에게 내 칭찬을 했다며 아주 Good hire (좋은 채용)라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더 잘해달라고 했다. 정말 그때의 기분이란...

그날 너무 기뻐서 남긴 인스타그램 스토리... 그리고 그날 자축한다며 엄청 먹음(?)

마지막으로 지난주 블랙 프라이데이 직전, 회사 매출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인 클라이언트들에게 굉장히 좋은 협상을 따냈고 그것을 전체 팀 미팅에서 공유했는데 보스가 마지막에, 나에게 Special Shout-out을 하겠다며 임원, 팀원들 다 모인 자리에서 나를 공개적으로 칭찬을 했다. 팀에 조인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정말 좋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그리고 모든 팀원들이 박수 쳐주면서 축하해 주었다. 정말... 내 매니저는 어떻게 하면 나를 일을 하게 만드는지 너무 잘 알아... (?) 그동안의 스트레스와 고생이 그녀의 칭찬 한마디로 모든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보스의 칭찬은 정말 나를 춤추게 한다.



2. 항상 팀원들의 상태를 체크하고 서포트 함

그리고 내가 보스에 대해서 리스펙트 하는 점인데, 항상 팀원들의 상태를 체크한다는 것이다. 한창 모두가 바쁠 때에도 늘 팀원들에게 1부터 10까지 스트레스 레벨이 어느 정도냐고 물어본다. 11월 중순 한창 스트레스 받을 때, 스트레스 레벨이 9 정도 되는 것 같다고 얘기하니, 본인이 뭐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지 물어보고 필요한 부분은 늘 서포트 해주었다. 그리고 늘 이렇게 바쁜 것은 아니라며 조금만 힘내자고 팀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업무 방식에 대해서도 늘 리뷰를 하고 현재 프로세스에 대해서 고칠 점은 없는지 팀원들의 의견을 항상 묻는다.


10월 초에 담당 클라이언트를 맡고 나서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에, 솔직히 일을 잘 해내는 데는 걱정이 없는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는 것이 조금 걱정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넌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고, 그래서 너를 채용했다"라며,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서 걱정이 된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건 시간이 지나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고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도 어려워하는 일이니, 앞으로 필요하면 클라이언트 상대로 프레젠테이션 연습하는 거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 영어 실력에 대해서도 걱정할 수준 전혀 아니라고 충분히 잘 하고 있고 내가 그냥 괜한 걱정 하는 거라고 안심시켜주었다. 난 늘 내 자신에게 야박한데, 막상 저런 말을 듣고 나니 정말 힘이 되었다.



3. 자율성 부여, 그리고 정확한 피드백

나는 철저히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을 선호해서 나와 최악의 궁합은 '마이크로 매니징' 하는 상사이다. 그녀는 어쩔 땐 이렇게 디렉션이 없을 수가 싶을 정도로 철저히 팀원들의 자율에 맡긴다. 그리고 결과만 보고받는다. 정확한 디렉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어쩌면 최악의 단점일 수 있지만 나에겐 정말 최고의 장점이다. 나는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정말!정말 싫어하고 정답이 없이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정답을 찾아 나가는대서 희열을 느끼고 특히나 나를 믿고 일을 맡겨주면 누구보다도 더 완벽하게 일을 해내는 사람이다. 디렉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겐 알아서 척척 일을 하는 부하직원이 당연히 잘 맞을 수밖에. 뭐나 뭐니 해도 이 부분에서 보스와 내가 궁합이 잘 맞는 것 같다.


그래도 그녀는 절대 방치는 하지 않는다. 팀원들에게 일을 모두 맡기면서도 중요한 피드백은 빼먹지 않고 해준다. 중요한 클라이언트에게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에는 꼭 함께 참석하되 자료나 발표 방식에 대해서 절대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언제나 나의 의견과 방식을 존중해 주고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다 등 부족하거나 보완해야 할 부분에서는 꼭 피드백을 해준다. 비난이 아니라 건설적인 조언을 해주는 것. 나의 성장에 꼭 필요한 부분이다.



4. 전혀 권위적이지 않음

한국에서 직장 생활이 가장 힘들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위계질서와 권위적인 분위기였는데 그녀는 그것들과 거리가 굉장히 먼 사람이다. (매니저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팀 전체 분위기가 그렇다.) 여기서는 직급 호칭이 없이 모두가 이름을 부르기 때문에 언어가 주는 힘도 물론 있다. 나도 그녀에게 말을 걸 때 이름을 부르고, 갓 대학을 졸업한 인턴도 나이가 지긋한 임원을 부를 때 이름을 쓴다. 업무 지시를 내릴 때에는 여기서도 탑 다운(상명하복)이지만, 그 외에는 철저히 수평적인 분위기이다. 내 보스는 팀원들이 자기를 '매니저'라고 부르는 것을 오히려 어색해한다. 저번에 클라이언트에게 "My manager OO"라고 소개를 했더니 나중에 웃으면서 그렇게 소개하지 말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별난 클라이언트가 있으면 같이 욕도 해준다. '친구처럼'이라는 수식어는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한국에서 경험했던 수직적인 상사와 부하 직원의 관계보다는 확실히 편하다. 고민이 있으면 털어놓고 모든 것을 공유할 수 있는 '선배'라는 표현이 가장 알맞을 것 같다. 이런 감정을 느낀(?) 상사는 머리 털 나고 처음인데 상사의 눈치를 본다거나 정치를 해야 하는 불필요한 감정보다 업무에 더 에너지를 쏟을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 외에도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거나 철저히 개인주의 성향인 것도 나와 케미가 정말 잘 맞는 요소이다. 그리고 다른 동료들도 내 보스가 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티가 난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다. 나는 회사를 늘 연애와 비교하곤 하는데 좋은 상사를 만나는 것과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과정은 정말 유사하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을 찾아 나서기보다는, 나와 성향이 잘 맞는 사람, 나와 생각과 가치관이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는 최악의 남자친구였지만 그 이후의 상대들에겐 최고의 남자일 수 있고, 나에겐 최고의 남자친구가 그의 전 여자친구에겐 잊고 싶은 기억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겐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지금 나의 보스는 나에게는 정말 좋은 상사이고 좋은 시너지를 내는 관계이며 나와 99.9%의 케미를 자랑하는 사람이다.


아주 바쁘고 예민한 시기를 잘 견뎌냈으니 앞으로도 회사 생활이 지금처럼만 재밌고, 또 적당히 스트레스 받으면서 좋은 상사/동료들과 함께 매일 성장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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