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런던 생활 만 1년 차의 고민
10년 전, 영국 노팅엄에서 1년 동안 교환학생이었을 때, 한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는 바람에(?) 내 주변은 몇 명의 외국인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다 한국인 친구들이었다. 1년 내내 거의 한국어만 쓰다 한국에 돌아왔고 수업을 영어로 듣다 보니 다행히 귀는 트여서 돌아왔지만 어쩌면 인생에 한 번 밖에 없을 귀중한 순간을 한국 사람과 연애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헤어지고 나서는 늘 후회가 됐었다. (미안해 전남친아) 그리고 이번에 런던으로 오고 나서는, 최대한 현지인들과 부대껴 살리라 다짐 아닌 다짐을 했었다.
그렇게 2월에 런던으로 와서, 여러 외국인 친구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고 범블 BFF 기능 (범블은 원래 데이트 앱인데 '친구' 사귀는 카테고리가 따로 있음)을 통해서 만난 2명도 운 좋게도 너무 좋은 친구들이었다. 영국에 온 지 얼마 안 된 사람 치고는 꽤 많은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고 아직까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낸다. 굳이 한국인 친구를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로컬 친구들을 사귀어서 얼른 이곳에 적응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가끔 한국 친구들이 그리울 때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가끔 수다 떨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인 남자친구까지 생겼다. 조는 데이트를 할 때마다 로컬들만 아는 맛집, 펍, 바 등 이곳저곳 소개해 주었고 정치나 사회 문제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은 친구라 나에게 영국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나 인사이트도 많이 공유해 준다. 무엇보다 모든 소셜 이벤트에 나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덕분에 그의 모든 친구들(우리나라로 치면 초, 중, 고, 대학 모두)을 소개받았다. 그들도 태어나서 쭉 영국에서 산 영국인들이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도 잦아졌다. 통화를 할 때마다 언제나 내 안부를 묻는 그의 부모님과 어딜 가든 나를 챙겨주려 하는 스위트한 동생들까지... 작년 크리스마스에는 그의 집에 초대받아서 3박 4일 동안이나 함께 지냈다. 또 다른 가족이 생긴 느낌이었다. 그렇게 현지인 남자친구 덕에 영국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성향과 특성을 갖고 있는지 등 '찐 영국 문화'를 효과적으로 경험하고 체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만나고 나서부터, 점점 그렇게 영국 사람들이 주변에 많아지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미국 본사의 유럽 지사라 영국인들과 함께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주로 유러피언들)들이 모인 글로벌 기업이다. 예전 글에도 언급했지만 우리 회사는 담당하는 마켓마다 팀이 나누어져 있는데 (크게 영국/유럽, 미국, 아시아-태평양(APAC)) 나는 영국과 유럽 마켓을 담당하는 팀에 있고 주로 영국을 베이스로 한 클라이언트들을 매니징하고 있다. 우리 팀은 나까지 4명인데 매니저 포함 2명은 영국인이고 1명은 독일에서 태어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영국에서 산 사람이다. (즉, 거의 영국인이라는 뜻) 중국인 동료들이 몇 명 있긴 하지만 그들은 APAC 시장을 담당하고 있다. 나는 우리 팀에서 유일한 '비(非) 영국인'이다. 매일 영국 내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고, 매일 영국인 팀원들과 미팅을 하다 보니 하루 종일 영어만 듣고 영어로 말한다. 가끔 같은 나라 출신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서 그들의 모국어로 대화하는 것을 볼 때마다 묘하게 부럽기까지 했다. 왜냐면 나는 우리 회사에서 유일한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취업과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나의 일상은 한국과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시차도 9시간이다 보니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 한창 깨어 있을 때 나는 잠을 자야 하고, 내가 오후 5-6시쯤 퇴근을 하고 비로소 자유 시간이 되었을 때는 한국은 이미 깊은 새벽이다. 이렇듯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살고 있다 보니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도 예전만큼 주기적인 소통이 힘들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자는 동안 친구들의 단톡방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있는데, 모든 것을 캐치 업하고 내가 답장을 할 때에는 이미 대화가 다 끝난 상태.. 여하튼 이렇게 글을 쓰거나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가끔 카톡 할 때, 그리고 가족들과 통화할 때 말고는 한국어를 쓸 일도, 입 밖에 낼 일이 없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영어만 쓰다 보니 가끔 꿈도 영어로 꾸곤 한다. 사실 내가 원했던 환경이고 덕분에 빨리 적응할 수 있으니 마냥 좋을 줄만 알았는데, 영국 현지인들의 삶에 내가 점점 발을 들일 때마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어색함과 불편함, 그리고 외로움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혼자 괜히 혼자 동떨어지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한국에서의 나의 장점은, 어떤 환경에서도 빨리 적응하고 사람들과 쉽게 친해지고 융화되는 것이었는데, 이미 나는 외적인 모습부터 융화가 되지 않는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주목받듯이 백인 중심 사회에서 아시아인인 내가 외적으로 튀는 것은 당연한 건데, 한국에서는 당연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것이다 보니 처음에는 그게 정말 괜히 어색하고 불편했다. 런던은 정말 다양한 인종, 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런던을 제외하고는 여전히 백인의 비중이 훨씬 높아서 한 공간의 수십 명의 사람들 중에 나 혼자 "coloured person"인 경우가 꽤 비일비재하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지만, 아직까지도 가끔 어색할 때가 있다. 언어에서 오는 한계도 분명히 느껴졌다. 아무래도 한국어만큼 영어를 쓰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보니, 한국에서는 굉장히 웃기고(?) 농담도 잘하고 밝은 사람인데 여기서는 조용하고 차분한 사람 그 자체랄까... 한국에서 주류의 삶을 살다가 영국에서 마이너리티가 되니 그 두 삶의 괴리감에 괜히 나 스스로가 실망스럽고 가끔은 주눅이 들기도 한다. 이게 바로 '진짜' 타지에서 사는 기분일까? 그동안 내가 너무 나이브했던 것일까.
아직까지도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찾지는 못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지만 그럴수록 더 그 생각에 사로잡히는 기분이랄까.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다 보니 사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한국인 친구들은 물론, 백인이 아닌 친구들과 직장동료들. 이미 나보다도 훨씬 예전부터 피부로 느껴왔던 사람들. 5년을 살아도, 10년을 살아도 비슷한 기분을 느낀다고 하는데 이제 온 지 갓 1년이 된 나는 오죽할까. 개인적으로 '인종 차별'과 '여성 혐오'는 나아질 수는 있어도 절대 사라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굳이 '차별'과 '혐오'까진 아니더라도 '다름'에서 오는 미묘한 구분, 그리고 그들과 나는 영원히 같은 카테고리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생각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듯하다.
어쩌면 굉장히 염세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다르게 이야기하면 내가 바꾸고 싶다고 해서 바꿀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결국은 "그냥 받아들이자"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다고 해서 한국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또 추호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6개월 동안은 어떻게 하면 이 마인드 셋을 바꾸지? 라며 스스로에게 회초리질을 계속했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실 이건 단순히 강한 멘탈을 가진다고 해서 극복할 수 있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이제 어느 정도 정착의 궤도에 올랐으니, 다음 나의 미션은 마음속 깊이 있는 이 생각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그냥 받아들이기" 이상으로 많은 고민과 사색,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장기적인 프로젝트로 이 주제에 대한 글을 자주 써보려 한다. 나중에 나와 비슷한 고민과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정말 좋은 콘텐츠가 될 수 있길 바라며..
* 그리고 비슷한 고민과 인생 선배님들의 조언들 언제나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