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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Feb 17. 2023

수습 끝, 영국에서 첫 퍼포먼스 리뷰

런던으로 이직 후 첫 업무 평가, 그리고 비자 이야기

 I would say, she has exceeded expectations


매니저의 위의 코멘트와 함께 6개월의 수습 기간이 끝이 났다. 한국에서는 사실 '수습'이라는 게 별로 의미가 없었는데 여기서는 수습 기간 동안 신규 입사자의 업무 능력에 대해 얄짤 없이 평가한다. 유의미한 성과를 보이지 못하면 수습 기간 내에 잘릴 수 있다. 


심지어 내 자리는 거의 지난 1년 가까이 공석이었는데, 이유를 알고 보니 내 매니저가 그동안의 입사자들을 수습 기간 내에 마음에 안 들어서 내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숫자가 무려 3명이라고 함....) 그래서 6개월 동안 더 바짝 긴장하고 일했던 것 같다. (이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에 대한 이야기는 곧 다음 글에서 다룰 예정) 다행히 매니저는 나를 마음에 들어 했고 정식으로 수습 해지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1월 첫 퍼포먼스 리뷰 세션에서 하게 되었다. 한국에서 매년 고과 시즌이 되면 매니저와 면담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어렴풋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그 정도로 극히 드물었고 제대로 된 '리뷰'를 한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대기업에서 일을 할 때는 아무리 일을 잘해도 근속연수에 해당하는 '승진 대상자'가 아니면 항상 내 평가는 B 아니면 C였다. 그런데 지금 회사는 쿼터별로 퍼포먼스 리뷰를 하고 1년에 1번, 1월에 연봉 및 승진 협상을 한다고 한다. 협상이라니... 한국에서 여태까지 내 연봉은 무조건 통보였는데 말이다. 물론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연봉 및 승진 협상 대상자에서는 이번에 제외되었지만, 내년 1월에는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다. 여기서 일하는 친구들의 조언에 따르면, 퍼포먼스 리뷰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는 사람은 정말 '호구'라고, 내가 잘한 것 그리고 회사에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조건 어필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한번 한국인의 '겸손함'은 여기서는 단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장 깨기 힘든 벽 중에 하나.


여하튼 퍼포먼스 리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면, 나는 2022년 Q4 목표 매출을 달성했다. 매니저가 첫 쿼터였는데 정말 잘했다고 축하한다는 말로 리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에게 잘한 점, 부족했던 점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았는데 잘 한 점으로는 업계, 직무, 런던에서 첫 직장, 모든 것이 처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배우고 적응한 것, 그래서 목표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부족했던 점은, 아무래도 너무 바쁜 시즌에 실무에 투입되는 바람에 우여곡절이 많았고 여러 클라이언트 매니징 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아직 부족하고 어색한 점이 많다고 했다. 나의 의견에 대해서 매니저는 전적으로 공감해 주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해내주었다고 응원과 칭찬을 해주었다. 그녀는 특히 나의 데이터 분석 스킬과 엑셀 리포팅/PPT 스킬, 그에 따라서 인사이트를 도출해 내는 것에 대해서 Impressive 하다고 했다. 그렇지 나 7년 가까이 데이터 분석하고 기획하는 일 한 사람이잖아..... 한국에서 기획 MD로 일했던 세월들이 역시 헛되지 않았다.


그러더니 나에게 피드백 줄 것이 딱 1가지 있다며 운을 뗐는데, 내가 너무 조용하다며 특히 팀 미팅에서 존재감을 좀 드러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클라이언트와 미팅할 때에는 늘 바짝 얼어서 긴장하는 것 같다며, 이 업계는 인맥 형성이 중요하니 관계를 위해서라도 농담 주고받고 편하게 생각하라고도 했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한 피드백이었다. 난 사실 매니저가 평가한 모습과 상반된 사람이다. 한국에서는 미팅을 하면 말을 많이 하는 축에 속했고 협력 업체 사장님들과 농담 따먹기 하고 너스레 떠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언어의 한계 때문인지 꼭 해야 할 말이 아니면 하지 않는 병에(?) 걸려버린 것이다. 


매니저에게 솔직하게 "나는 한국과 영국, 전혀 다른 2개의 자아를 가지고 있다"라며 웃었더니 매니저가 이유가 뭐냐, 혹시 언어 때문이냐라고 해서 그 이유가 가장 큰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영국에서 일하는 것이 처음이다 보니 영국의 오피스 문화에 대해서도 아직 배우고 있는 중이고, 혹시나 그런 면에서 내가 실수라도 하게 될까 봐 좀 조심스러운 면이 없잖아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녀는 웃으며


수, 넌 런던에 살고 있어. 런던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런 것에 너무 강박 갖지 마


라며, 그녀도 우리 회사에 워낙 다양한 국가 출신의 팀원들이 많다 보니 본인도 문화적 차이에 대해 많이 의식하고 배우려고 한다고 나더러 너무 맞추려고 할 필요 없다고도 했다. 정말 큰 힘이 되었다. 난 매니저에게 "걱정하지 마라,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점점 더 나아질 것이다"라고 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경험치가 쌓이고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격이 급한 나는 그걸 알면서도 매일 속이 터지지만..) 그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업무'에 대한 피드백은 딱히 없다는 거니까, 일은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는 뜻이겠지!


그렇게 꽤나 긍정적으로 훈훈한 리뷰를 끝내면서, 매니저는 앞으로의 나의 커리어 방향과 회사에 대한 기대에 대해서 질문을 했다. 나는 회사가 지금 진행 중인 geo-expansion(마켓 확장) 프로젝트에 내가 보탬이 되고 싶다며, 한국 시장 셋업 할 때 나에게 꼭 그 업무를 맡겨주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가장 큰 영국/미국/유럽 마켓을 담당하고 있으니 그동안의 경험들이 많이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랬더니 매니저가 아주 좋아하며 '네가 그 이야기를 안 했으면 서운할 뻔했어'라며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회사에서 장기적으로 오래 다니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나의 올해에 가장 중요한 화두를 던졌다. 바로 '비자 스폰서십'. 나는 Full-time 직원이긴 하지만 계약서 상으로는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끝나는 2024년 2월까지만 유효하다. 매니저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아직 워킹 홀리데이 비자가 1년이 남았지만 매니저와 단둘이 퍼포먼스 리뷰를 하는 지금이 기회다 싶었다. "나에게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Stability (안정성)이다. 내가 일하는 업계, 직무, 팀 모두 정말 마음에 들고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회사에서 비자 스폰을 해주면 다른 옵션에 한 눈 팔지 않고 업무에 집중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라고 거의 반 협박(?) 식의 제안을 했는데 매니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기꺼이 HR에게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했다!!!!!! 우리 회사는 워낙 외국인들이 많은 회사라 비자 스폰 해주는 것이 그리 생소하진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회사 입장에서는 꽤 비용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한화로 천만 원 넘게 든다고 들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다. 매니저가 바로 인사팀과 이야기한다고 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아직까지 100% 확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미리 이야기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규 워킹 비자인 Tier 2 비자를 받고 나면 영주권으로 향하는 여정의 첫걸음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 나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기회이다. 오늘부터 물 떠놓고 기도해야겠다. Fingers Crossed!


여하튼 영국에서의 나의 첫 퍼포먼스 리뷰는 좋은 소식들과 함께 긍정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첫해의 시작을 굉장히 기분 좋게 리드한 것 같아서 뿌듯했지만 이제 '진짜 시작'이라는 생각이 또 들면서 불안한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 (?) 여전히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와 중압감, 외국인으로서 불안한 현실 등 부정적인 감정들과도 매일 싸우고 있지만 그래도 지금 런던에 살고 있는 나의 현실이 내가 늘 상상만 하던, 그토록 바라던 꿈이라는 사실을 늘 상기시키며 오늘도, 내일도 힘을 내보려 한다.



내 핸드폰 배경화면. 내 이야기 같아서 힘들 때마다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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