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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후세시 Feb 28. 2023

런던 편도행 비행기 안에서 쓴 편지

런더너(Londoner)가 된 지 1주년

1주년 짧은 리뷰


2022년 2월 23일, 나는 편도 비행기 티켓과 2년짜리 워킹 홀리데이 비자 하나만 믿고 런던에 왔다. 만 7년 경력, 그만하면 괜찮은 수준의 연봉에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친구도, 가족도 아무것도 없는 곳에 모든 것을 걸었다.


한국에서도 두 달 이상 해본 적 없는 취준 생활을 30대에, 런던에서 6개월이나 했다. 예전에 썼던 글들을 보면 아직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아 나는 진짜 독한 X 이구나. 20대에 산전 수전을 이미 다 겪어서 그나마 이 정도였겠지만, 그래도 멘탈이 여러 번 흔들려서 무너지기 직전까지 간 적도 있었고 그 와중에 이사도 2번이나 했다. 통장 잔고가 거의 바닥이 드러났을 때쯤, 지금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또 6개월이 지났다.


1년 전과 1년 후 지금 나의 삶은 정말 100%, 아니 100000% 달라졌다. 1년 전에도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왔지만, 더더욱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어질 정도로 나는 지금 내 삶에 만족한다. 한국에서는 커리어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늘 정체된 기분이었다. 내 성에 차는 남자도 찾지 못해서 이럴 바엔 그냥 혼자 멋진 싱글로 사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겉으로 보면 꽤 괜찮은 삶이었지만 어딘가 모르게 부족했고, 늘 마음속 한구석에는 'I deserve better'라는 다소 오만하고 발칙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High Risk Taking의 대가가 이런 것일까, 지금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솔직히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는 한국에서보다 몇 배로 받는데 한국의 회사 생활은 늘 '으으으 이 병신 같음은 뭐지' 였다면 지금 회사에서는 '와 빨리 배워서 나도 잘하고 싶다'라는 생각이 매일 든다. 아직은 이게 내 천직이다!라는 생각은 솔직히 들지 않는데 (그냥 남의 돈 벌어먹는 회사 생활은 어딜 가든 뭐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나와 맞지 않는 업계를 탈출한 것만으로도 정말 대. 만. 족. 그리고 드디어, 내가 얘를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삽질을 했구나(?) 싶을 정도로 내 성에 차는 남자, 내가 꿈꾸던 파트너의 자질을 모두 갖춘 사람을 만났다. 한국에 도대체 왜 없나 했더니 9,000km 떨어진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호호. 여하튼 아직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들이 마지막 기회였던 워킹 홀리데이를 신청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경험하고 누릴 수 없는 것들이다. 내년에는, 5년 뒤에는 아니 10년 뒤에는 내 삶이 또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확실한 것은 n 년 뒤에도 한국을 떠나 런던으로 오기로 결심한 것이 내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잘 한 결정이라는 것. 그건 확실하다.


나에게 쓴 편지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에게 편지를 썼다. 분명히 타지 생활을 하면서 힘든 일이 생길 텐데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쓴 이 편지를 읽고 힘을 냈으면 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이루고 나서도 간절하던 초심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 이 편지는, 1년간 나에게 좋은 버팀목이자 동기부여가 되어 주었다. 그 편지를 여기에 공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수현아 안녕? 너는 지금 유럽 상공 덴마크 코펜하겐을 지나서 런던으로 날아가고 있는 비행기 안이야. 드디어 이 순간이 오긴 왔다 그치?


그동안 얼마나 노래를 불렀니.. 영국을 처음 갔었던 2012년부터 지금까지.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꼭 해외에서 살고 싶다는 꿈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졌잖아.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어. 넌 지금 굉장히 행복하면서 설레면서 또 두렵기도 막막하기도 하고 그럴 거야.


이렇게 나 스스로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인 것 같은데, 그만큼 내 스스로를 다독여주는 시간이 부족했던 것 같아. 지금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정말 The moment of your life를 앞둔 너에게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해주고 싶어서야. (혹시 알아? 이 편지가 나중에 너의 책 부록으로 들어갈지)


사실 돌이켜보면 그동안은 너에게 가혹했던 순간들만 많았던 것 같아. 여러 가지 의무들, 목표들 세우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거나 잘 안되면 자책하기 일쑤였지. 나를 가장 소중하게 다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인데…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어떠한 의무나 목표들을 나열하는 대신 응원만 해주고 싶어. 분명히, 영국에서 외국인으로 생활을 하다 보면 힘든 순간이 분명히 찾아올 거고 넌 마음도 여리고 눈물도 많으니까 분명히 눈물을 흘리는 순간도 많이 찾아올 거야. 힘들고 괴롭고 다 포기 하고 싶을 때마다, 이 편지를 읽었으면 좋겠어. 지금 영국 땅을 밟기 전의 너의 감정을 기억하고 비행기 안에서 편지를 쓰는 순간을 기억하면서.


첫 번째, 네가 영국행을 선택한 것은 네 인생의 가장 잘한 선택이자 두고두고 회자될 인생의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될 거야. 이 순간을 네가 오랫동안 꿈꿔오기도 했지만 가족들, 그리고 친구들 말대로 본인이 그것을 원한다고 해서 실제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어. 넌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편안한 삶을 다 버리고 Comfort Zone에서 벗어난 진짜 정말 멋진 사람이야. 20대를 돌이켜보면,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그때마다 어떡해서든 넌 위기를 극복하고 실패를 토대로 더 나아지려고 했어.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거야. 한국에서보다 더 힘든 순간이 찾아올 수 있지만, 그때마다 그냥 너 자신을 믿길 바래. 넌 분명히 그 위기를 충분히 극복하고도 남을 사람이야.


두 번째, 영어를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절대 스트레스 받지 마. 나도 알아. 이게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게다가 넌 완벽주의 성향이 있기 때문에 그 강박을 버리기가 더 힘들 거야. 근데 너의 모국어는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고, 지금 그 정도의 영어를 하는 것도 사실 대단한 거야.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있을 때도 생각해 보면 자신감이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완벽하게 못 할 바에 이야기도 잘 안 했고... 근데 지금의 너는 다르잖아! 성격도 많이 바뀌었고 자신감도 많이 생겼고 넌 정말 유쾌하고 재미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주변에 친구들도 많고! 그러니 영국에서도 너의 Bubbly 한 성격을 잘 드러내길 바라. 영어는 그냥 살아가는 데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수단일 뿐이고, 절대 완벽하게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 그리고 넌 흡수가 굉장히 빠르기 때문에 조금만 지나고 나면 매년 아니 매일 나아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거야.


세 번째도 두 번째와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인데, 정말 수현아,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네가 블로그에 직접 썼듯이, 완벽주의는 벗어나야 할 강박이고 100%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어제보다 나은 오늘’에 집중해 보자. 이미 인생의 Big Step을 밟았으니, 조금씩이라도 점점 더 나아지면 되는 거야. 그 과정에서 넌 분명히 성장할 거고. 해외 생활이라는 걸 시작하기 위해서는 환상도 어느 정도 필요하지만 너의 그 환상이 깨진다고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무너지지 말자. 모든 것에서 완벽하려 애쓰다 보면 사소한 것에서도 실망을 하게 마련이니까 소소한 행복, 소소한 희망을 갖는 것에도 만족해 보자고!


마지막으로, 너는 정말 소중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야. 넌 사랑하는 부모님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이고, 주현이에겐 멋진 언니이고 친구들에겐 재밌고 멋진 친구야. 타지에서 힘들게 살다 보면 그 사실을 잊기 쉬울 수 있는데, 힘들 때마다 영국 오기 전에 너를 응원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려봐. 힘들면 기대도 괜찮아. 넌 의외로 단순해서 힘들 때 그냥 울어버리거나 누군가에게 한탄하고 나면 또 금세 괜찮아지잖아!?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너의 뒤에 있는 든든한 지원군들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도 힘내보자! 그리고 넌 정말 소중한 사람이고 그걸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너 자신이야. 난 너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절대로!! 그러니 너를 똑같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만 곁에 두고, 힘들 때 스스로를 푸시 하는 대신 다독여주자 알겠지?


수현아 정말 지금까지 잘해왔고, 지금도 이미 잘 하고 있어. 멋진 인생이 널 기다리고 있고 넌 정말 잘 이겨낼 거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늘 기억하고 불확실한 인생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좀 더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보자! 으악 이제 방송 나오네, 40분 뒤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대….. 정말 이제 시작이다. Your journey has just started! 사랑해!!!!



23 February,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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