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후세시 Mar 21. 2023

해외 직장 생활, 번아웃과 배움 그 사이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 이유

8월에 취업했으니 벌써 7개월이 흘렀다. 2월이 되면서 이제 정식으로 수습 기간도 해지되어서 이제 런던에서 노동법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직장인이 되었다. 한국에서의 수습 기간은 사실 표면적인 것이었고 길어봐야 3개월이었는데 여기서는 수습 기간이 보통 6개월에 진짜 업무에 대한 평가를 하기 때문에 그 사이 일을 못하면 얄짤없이 잘릴 수 있다. (오죽했으면 내 자리에 3명이나 스쳐 지나갔다니...)


요즘 테크 업계에 대규모 정리해고가 전 세계적으로 유행인데, 우리 회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사실 내가 입사하자마자 10%의 임직원을 내보냈는데 입사하자마자 칼바람이 부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우리 팀은 커머셜 팀(한마디로 돈을 벌어오는 팀)이라 회사의 필수 인력에 해당되는 자리였어서 이번 레이오프를 피해 갔지만 사실 대규모 정리해고에서 가장 우선순위는 외국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취업을 했지만 사실 좌불안석이었던 지난 수습 기간 6개월.


혹여나 있을 외국인에 대한 편견이나 disadvantage를 극복하기 위해 오롯이 나의 능력을 증명해야겠다는 생각 하나로 지난 6개월간 정말 열심히 일했다. 덕분에 좋은 채용이었다고 매니저한테 칭찬도 받고 가장 바쁜 시즌에 투입된 덕에 더 빨리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한국에서 잦은 이직을 하면서 늘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진 경험 덕분이었겠지... (여담이지만, 한국인들이 세상에서 일 제일 잘하는 거 진짜 팩트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나는 새해가 되면서부터 간헐적인 극심한 스트레스와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가장 큰 원인은 '클라이언트 매니징'이라는 나의 직무 특성 때문. 나의 업무의 90프로는 클라이언트를 상대하면서 그들이 원하는 목표와 우리 회사가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중간에서 아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메신저 역할이다. 한국에서는 늘 브랜드 소속이었으니 내가 오히려 클라이언트 사이드였기도 했고,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근데 여기서는 완전 반대 상황이다. 내가 매니징 하는 클라이언트는 20개 정도 되는데, 담당자들은 당연히 브리티시 혹은 유러피언들이다. 그들과 매주 혹은 매달 미팅을 해야 하고 (브랜드가 여러 개니까 결국 주에 3개-4개씩 클라이언트 미팅이 있는 셈) 매 쿼터마다는 QBR(Quarterly Business Review)를 해야 하는데 클라이언트들 상대로 45분 정도 그들의 쿼터 퍼포먼스에 대한 리뷰, 다음 쿼터를 위한 제안, 인사이트를 피칭해야 한다. 그리고 클라이언트 이외에도 협업해야 할 부서가 내부에 많아서 온종일 미팅만 하다가 끝나는 날도 있다.


내 영어가 아직도 정! 말 많이 부족하구나라고 느꼈던 순간이 미팅이나 피칭을 할 때인데, 단순히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과 수다를 떠는 수준 그 이상으로 클라이언트들에게는 내 의견을 설득력 있게 피력해야 하고, 전략적인 인사이트 도출과 더불어 최종적으로는 우리 회사에 유리한 Negotiation을 이끌어 내야 했다. 내가 어떻게 미팅을 이끌어 나가고 그들을 설득하느냐에 따라서 내 목표 매출, 회사의 매출이 달라지다 보니 매일매일이 정말 부담의 연속이었다. 클라이언트 피칭이 있는 주간에는, 정말 밤 11시부터 새벽까지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할 때도 있었다. 한 번은 주에 2개의 QBR과 4개의 클라이언트 미팅을 준비하다가 너무 힘들고 현타가 와서 '아 이러다 진짜 번아웃 오겠다' 싶을 정도로 심적으로 힘든 날이 있었는데, 마침 그날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How was your day today?'라는 질문에 그냥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전화를 붙들고 30분을 엉엉 울었다. 회사 때문에 힘들어서 운 것은 신입사원 이후로 처음이었다. 새롭게 일 배우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언어 장벽에 문화 장벽까지 느끼기 시작하면서 한국에서는 어렵지 않게 해 왔던 일이 여기선 내 맘대로 안된다는 사실이 나를 좌절시켰다.


나도 안다. 나는 여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 수준의 깊이 있는 영어를 구사할 수 없다. (그들이 나만큼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듯) 그리고 회사에서 UK/EU 팀에 전혀 백그라운드가 없는 외국인인 나를 뽑은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매니저가 늘 이야기하듯 난 이미 충분히 잘하고 있다. 내가 겪는 좌절감은 결국 적응만이 답이고,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라고 매일 아침 혼자 되뇌면서 일을 시작한다. 그렇지만 내 '부족함'이 당장 해결되지 않는 것이 사실 답답하기만 하다.


나의 지금 직장 생활은, 그렇게 '번아웃'과 '배움' 그 사이 어디쯤이다. 한 가지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게 힘듦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떠나 완전히 새로운 삶을 도전한 것에 후회가 없는 이유는, 그래도 매일이 '배움'이기 때문인 것 같다. 힘들지만 매일 나아지고 있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배운다. 꼭 거창한 것이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그날 모르는 영어 표현이나 단어를 알게 되면 늘 메모해 두는데, 그게 벌써 100개가 넘게 쌓였다. (내 영어가 처음보다는 +100은 되었다는 뜻이겠지) 아직까지도 스케줄에 클라이언트 미팅이 잡혀 있으면 이미 그 전날부터 스트레스를 받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처음엔 첫 미팅도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는데, 그래도 두 쿼터 정도 지나니 지금은 클라이언트와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리고 같은 팀에 있는 영국인 동료들과 언제 한 번 이야기 나눈 적이 있었는데, 모국어로 일을 하는 그들도 나와 비슷한 수준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 이건 단순히 언어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직무 자체의 문제였다. 그러면 안 되는데(?) 기분이 좀 나아졌다. 아마 나는 곧 4월 QBR 시즌이 되면 또 20 out of 10 레벨의 스트레스를 받겠지만, 내가 지금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것(=결국 내가 회사에서 해야 하는 업무)에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내가 바꿀 수 있는 것, 즉 나의 마음 상태에 집중하는 것 밖에 없는 듯하다. 하.. 근데 정! 말 생각처럼 쉽지 않다. 늘 나의 '부족함'만 지독하게 파고드는 나 자신과 매일매일 싸우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 스스로에게 좀 더 관대해질 수 있을까?


오늘 글은 평소의 글들과 다르게 다소 우울한데, 그렇게 간절히 바라던 런던 취업의 꿈을 이루고 나서도 (놀랍지 않게도) 인생은 늘 장밋빛이 아니라는 것을 공유하고 기록해두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그리고 오늘보다 더 나아질 내일을 생각하면서 조금만 '존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런던에 와서 취업 준비하면서 너무 힘들어서 울면서 썼던 글들, 그게 불과 1년도 안된 일들인데 지금 읽으면 '와 내가 이랬었구나..(독한 x....)' 하면서 그냥 웃어넘기게 된 것 처럼 내년 이맘때쯤, 아니면 뭐 한 3년 뒤쯤에는 아마 이 글도 웃으면서 읽게 되겠지 뭐. 하하!!



매거진의 이전글 런던 편도행 비행기 안에서 쓴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