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리에 홀로 던져졌지만 살아난 이야기
오늘 어필리에이트 업계에서도 규모가 아주 큰 컨퍼런스를 다녀왔다. 첫 컨퍼런스인데다 주요 클라이언트들을 모두 만나야 하는 자리였는데 매니저도 없이 팀 대표로 혼자 가게 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컨퍼런스는 한 번도 안 가본 데다 가서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는데 덩그러니 혼자서 그 모든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해야 한다니.. 2-3주 전부터 생각만 해도 정말 큰 스트레스였다.
늘 그래왔듯이 나는 또 혼자 총대를 메고 전쟁터로 나섰다. 입사하고 나서 늘 이런 식으로, 아무런 트레이닝 없이 실전에 그냥 내던져지곤 했다. 매니저는 내 속마음도 모르고 가서 그냥 친구 사귄다 생각하고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고 즐기고 오라며 응원해 주었다.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고요 흑흑..
사실 이번 글의 제목은 내 동생과의 대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동생이 너무 기가 막힌 비유를 해서 이걸로 꼭 글을 써야지 했다.
작년 8월 말에 입사했으니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난 정말 이제 겨우 칼로 찌르는 법을 배운 것 같다. 디지털 마케팅의 D는커녕 정말 아무것도 모르던, 생전 처음 들어보는 업계로 와서 이제서야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위기 처리 방식이라든지, 클라이언트별로 어떤 방식이 통하는지 등에 대한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이제야는 버벅거리지 않고 내가 있는 업계와 우리 회사가, 내가 하는 일을 잘 설명할 수 있게 된 수준이랄까? 그런 내가 정말 맹수들이 드글드글한 사파리에 혼자 내몰린 것이다.
클라이언트 매니징은 우리나라 용어로 쉽게 말해서 '영업'과 비슷한 것 같다. 클라이언트들에게 내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고 협상하느냐에 따라, 좀 오버해서 이야기하면 매출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아마 제 목숨줄 까지도요,,) 특히나 이번 컨퍼런스에는 나의 20개 클라이언트들 중 절반 이상이 왔고, 매치스 패션, 네타 포르테, ASOS를 포함해서 내 포트폴리오 매출의 50% 이상을 담당하는 빅 글로벌 클라이언트들까지 모두 왔다. 그들은 팀 단위라 4-5명 그룹이었는데 우리 회사에선 나 혼자서 그들과 독대해야 했던 것. 게다가 오전 11시를 시작으로 오후 4시까지 정말 화장실 갈 틈도 없이 back to back 미팅 스케줄이었다. 한 클라이언트당 미팅 시간은 15분이라 짧은 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모든 집중력을 발휘해서 15분 내로 내가 하고 싶은 말에 대한 포인트를 잘 설명하고 이상적으로는 Deal Making까지 이끌어 내야 했다. (이 컨퍼런스의 이름이 그래서 'Deal Maker'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의 첫 컨퍼런스는 꽤나 성공적이었다. 우선 저 수많은 미팅 스케줄을 큰 잡음 없이 소화해냈다는 것에 뿌듯했고 제일 고민 많이 하고 걱정했던 Big 3에게서 내가 원하던 것들, 결론적으로는 우리 회사에서 원하는 방향에 대한 확답을 받아냈다. 무엇보다 늘 줌으로만 같이 일을 하다가 실제로 보니까 확실히 달랐다. 협상을 해내는 과정도 훨씬 빠르고 간단했지만 100% 사무적인 관계에서 어느 정도 농담까지 주고받는 사이로 발전했다고나 할까? 아 이래서 네트워킹이 중요하고 영업 할 때 실제로 피부 맞대고 얼굴 보고하라는 거구나 싶었다.
오후 5시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곤함이 밀려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동시에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와 이렇게 또 해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팀원들과 하는 정말 캐주얼하고 간단한 미팅도 벌벌 떨면서 했었다. 클라이언트들과의 미팅은, 미팅 전에 뭐라고 이야기할지, 예상 질문까지 시뮬레이션 하고 스크립트까지 다 써서 준비해야 마음이 편할 정도로 늘 부담감이 심했다. 영국/유럽 클라이언트들을 상대하면서, 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것이 나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약점이라고 해서 봐주는 사람이 당연히 아무도 없었으니, 혼자서 끙끙 앓아가며 이겨내야 할 숙제였다. 정말 혼자서 '독함'이라는 무기 하나로 사파리에 내던져졌고 요령 없이 칼을 마구 휘둘러대다보니 다치기도 많이 다쳤던 것 같다. 그런데 1년이 지난 오늘, 12개의 미팅을 혼자서, 스크립트 없이도 무리 없이 소화하는 수준까지 성장했다. 30명이 넘는 사람들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협상하고, 네트워킹 하고, 티키타카 농담도 주고받았다. (원래 마지막 네트워크 드링크까지 해야 퍼펙트 마무리인데 체력상 그건 정말 못하겠어서 바로 집에 왔음) 누군가에겐 '에이 그게 뭐라고'라고 할 수 있지만 1년 전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발전이다.
나는 'Comfort Zone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힘을 정말 종교처럼 믿고 주변에도 늘 강조한다. 1년 반 전, 한국에서 쌓은 모든 커리어를 뒤로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영국으로 올 때도, 바로 이런 성장을 기대했던 것이다. 입사하고 매일 생존 본능을 풀가동하다 보니 영어는 뭐 무서운 속도로 늘고 있고, 단순히 언어가 느는 것 이상으로 이 나라에 누구보다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는 것 같다. 아마 여기 와서도 마음 편한 일만 찾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어쩌다 보니 전쟁터에 혼자 내보내는 빡센 회사에 들어와서 패스트 트랙을 탔고 (이걸 좋아해야 해.. 말아야 해?) 그래서 더더욱, 한국에서만 쭉 있었더라면 절대로 느끼지 못했을 소중한 경험들을 많이 얻고 있지 않나 싶다.
스트레스 99% 날들 중에 오늘은 뿌듯함 1%의 날이다. 그리고 늘 그랬듯이 그 1%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동안의 모든 상처들을 치유해 준다. 사파리에서 드디어 사자 한 마리 잡은(?) 오늘을 기념하면서 이번 주 주말은 남자친구랑 맛있는 거 많이 먹고 힐링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