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브랜드
사회 초년생 때 첫 월급을 받아 나를 위한 선물로 샀던 꼼데가르송 지갑. 그전까지 부모님이 사준 지갑만 쓰다가 생애 처음으로 나를 위해 사치를 부렸다. 인터넷 최저가보다 조금 더 돈을 주더라도 오프라인 매장에서 직접 만져 보고 사고 싶었다. 비싼 매장에 혼자 갈 용기는 없어서 친구를 꼬셔 함께 갔다. 태연한 척 매장 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어디서부터 구경해야 할지 몰라 금세 동공 지진이 왔다. 인터넷으로 이미 수십 번은 본 지갑이지만 "아, 이 지갑이구나." 하며 최대한 관심이 없는 척 살짝 들었다 내려놓는다. 매장 직원이 다가와 "찾는 제품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으면 괜히 다른 제품도 들여다본다. 절대 '저는 저 지갑밖에 살 돈이 없어요'를 들키지 않도록. 지금이야 얼굴 두꺼운 아줌마가 다 되어서 그런 눈에 빤한 허세는 부리지 않는다. 오히려 말이 많아져서 소재가 무엇인지, 관리법은 어떻게 되는지 이것저것 묻기 바쁘다. 심사숙고한(척) 끝에 고른 지갑을 계산할 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내 카드가 결제 안 되면 어쩌지?' '가격표에 적힌 가격이랑 다르면 어쩌지?' 등 몇 초간의 짧은 시간에 온갖 걱정이 다 들었다. 뭐든 '처음'이 그렇듯 내 첫 지갑 구입기도 달콤 쌉싸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여전히 꼼데가르송은 나를 위한 선물을 하고 싶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다. 재작년과 작년에 모두 셀프 생일 선물로 꼼데가르송의 블랙 토트백을 구입했다. 하나는 바게트 빵 모양의 길쭉한 가방이고, 다른 하나는 식빵 모양의 가방. 결코 쉽게 살 수 있는 가격은 아니지만 흔히 말하는 '여자들의 명품백'에 비하면 훨씬 저렴하다. 큰맘 먹고 샀는데 장롱에 모셔 두기만 한다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실제 매장 직원도 이 가방은 자주 들어야 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더스트 백에 넣어 장시간 보관하면 오히려 가방의 수명은 줄어든다고. 내가 구입한 두 가방은 사계절 내내 활용할 수 있고 캐주얼한 복장이나 격식을 차려야 하는 옷에 두루 매치할 수 있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다. 한동안 에코백이나 백팩만 메고 다녔는데 가끔 결혼식에 초대받으면 들고 갈 가방이 없어서 난감했다. 블랙 토트백은 결혼식이나 비즈니스 미팅에 갈 때, 심지어 장례식에 갈 때도 들 수 있다. 이런 간결함이 여전히 꼼데가르송을 좋아하는 이유다. 로고 하나 없는 담백함, 심플하지만 심심하지 않은 매력. 20대에 산 첫 꼼데가르송 지갑은 동봉 박스에 넣어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40대에 다시 꺼내 쓰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손때가 많이 묻었지만 여전히 쓸 만하다. 70세가 넘은 나이에도 꼼데가르송 MA-1 재킷과 블랙 백을 소화하는 윤여정 배우처럼, 꼼데가르송을 들 때면 나도 그런 멋진 할머니를 꿈꾼다.
꼼데가르송과의 첫 만남은 십 수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 유학 시절에 일본인 친구가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꼼데가르송 매장에 데려가 줬다. 태어나서 그렇게 크고 멋진 가게는 처음 가 봤다. 압도당했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평범한 유학생에게는 터무니없는 가격이라 아이쇼핑만 하고 나왔지만 '언젠가 꼭 갖고 말겠다'는 동경심이 그때 피어났던 것 같다. 외롭게 부유하던 이방인 신분이라 그랬는지 일본 정수의 브랜드는 하늘의 별처럼 한없이 높아 보였다. 그래서 요즘도 꼼데가르송 매장에 갈 때면 그때 감히 욕심조차 못 내던 어린 내가 떠오른다. 이제는 열심히 일해서 갖고 싶은 가방도 살 수 있는 어른이 되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삶인 건가 싶기도.
좋아하는 브랜드를 패션 브랜드로 한정한다면 열 손가락이 넘을 정도로 차고 넘치지만, 브랜드의 가치를 좇는 '디깅'의 관점에서 본다면 앞서 말한 꼼데가르송 정도가 아닐까. 단순히 끌리는 디자인보다는 쉽게 질리지 않고 손때 묻혀가며 오래 쓸 수 있는 면을 중시한다. 그래서 소재나 기능, 실용성도 따져 본다. 캠핑을 하며 자연스럽게 아웃도어 브랜드도 기웃거리면서 파타고니아나 아크테릭스, Rab 같은 기능성 의류 브랜드에도 관심이 많아졌다. 고가 제품이 많아 구입 장벽이 높지만 내가 추구하는 '손때 묻혀가며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에 부합하는 아이템들이 아닐까. 혹독한 자연환경에서 그 기능을 실감하면 고가의 가격도 왠지 수긍이 간다. 그리고 요즘에는 고프코어나 테크웨어 열풍으로 아웃도어 의류도 일상에서 부담 없이 입을 수 있다. 많이 입어야 그만큼 돈도 안 아깝고.
파타고니아는 한국에 진출한 지 10년 남짓이지만 비교적 짧은 기간에 국내 아웃도어 시장에 완벽히 안착했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일명 '뽀글이'라고 불리는 플리스 재킷이 유행하면서 아웃도어 브랜드의 소비자 연령층을 끌어올린 점이 성공 요인 중 하나다. 디자인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지속적인 친환경 경영 또한 디깅 소비자의 마음을 빼앗는다. 내가 파타고니아를 처음 접한 것은 국내 진출하기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학생 때 일본 패션 잡지를 즐겨 봤는데 거기에 나온 멋쟁이 언니, 오빠들은 꼭 'patagonia'라고 적힌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88년에 파타고니아 일본 지사가 설립되어 정식 아웃렛 매장도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브랜드였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색깔과 포인트 로고. 정말 갖고 싶다…… 쉽게 갖지 못해서인지 파타고니아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나를 애태웠던 파타고니아를 처음 영접한 곳은 시간이 훨씬 지난 뒤 일본 후쿠오카의 한 아웃렛 매장. 그런데 생각보다 비싼 가격에 바로 구매하지 않았고, 이후에 일본에 사는 지인을 통해 온라인 스토어에서 좀 더 싸게 산 후 해외 배송으로 받았다. 국내에서 살 수 없는 브랜드의 옷을 누구보다 빠르게 입어 보는 희열이란. 지금은 선뜻 손이 가지 않는 황금색 바람막이를 자랑하듯 신나게 입고 다녔으니, 생각보다 관심받는 거 좋아했네 나. 파타고니아가 한국에 정식 진출한 뒤에도 일본에서 구매 대행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제품 종류가 훨씬 다양하고 아웃렛 매장도 있어 가격 면에서 메리트가 있기 때문이다. 나만 알고 싶은 브랜드에서 지금은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브랜드가 된 파타고니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만큼 내 사랑이 조금 얕아진 기분이지만, 10여 년 전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내 첫 파타고니아 '플리스 베스트'는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옷 중 하나다.
오래전 좋아했던 세컨핸드 숍 중에 'Pass the Baton'이라는 가게가 있었다. 달리기 주자가 다음 주자에게 배턴을 넘기듯, 각자 사연이 담긴 물건을 위탁받아 새 주인에게 넘겨주는 곳이었다. 거기서 산 옷이나 가방에는 작은 종이쪽지가 붙어 있었는데 이전 주인이 옷에 담긴 추억을 기록해 둔 메모였다. 마치 "앞으로 이 아이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 같아서 왠지 모를 끈끈함을 느꼈다. 전 주인과 새 주인 그리고 우리를 잇는 물건.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처럼 어떤 물건과의 만남은 평생에 한 번뿐인 소중한 인연이 되기도 한다. 나의 10대, 20대, 30대를 함께해 온 물건에는 사진이나 일기에도 남아 있지 않은 나의 손때가 묻어 있다. 그래서 옷이나 가방 등을 살 때 "앞으로 얘랑 좋은 시간을 많이 보내야지"하는 마음가짐을 갖는다. 나의 첫 사회생활에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꼼데가르송 지갑과 수많은 캠핑에서 동고동락한 파타고니아 베스트처럼. 나의 물건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매주 목요일 발행
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