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공원에서 신나게 놀고 온 다음 날, 아이가 독감에 걸렸다. 계절성 감기 외에는 크게 잔병치레가 없던 아이여서 독감 증상이 더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병원에서 아이의 독감 검사를 기다렸다.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이라서 콧 속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이 생소한 검사가 너무도 무서웠다.(아이 앞이라 괜찮은 척했지만 벌벌 떨렸다) 면봉의 길이를 보면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않을 수가 없다. “면봉을 살짝 넣었다 빼는 거야. “라고 최대한 차분히 말하며 아이를 안심시켰다. 동공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아이. 이내 용기를 낸 건지 울지 않고 씩씩하게 검사를 받았다.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잔뜩 겁먹은 눈과 긴장한 입술, 내 손을 꽉 잡은 작은 두 손. ‘용기란 이런 거구나’ 씩씩한 모습에 왜 이리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내 어릴 적 일화 중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에피소드 하나가 있다. 8살인가 병원에 예방 접종을 하러 갔는데 엄마가 데스크에서 접수를 하는 틈에 언니와 둘이 미친 듯이 뛰어서 병원을 탈출한 적이 있다. 내가 언니를 꼬신 건지, 언니가 나를 꼬신 건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온 힘을 다해 달렸던 기억. 그다음은 엄마 손에 끌려 진료실로 들어가는 기억. 주사를 맞고 엉엉 운 기억이 이어진다. 동네에서도 쫄보로 유명했다. 지금도 주사는 물론 병원에서 받는 각종 검사와 치료들이 무섭다. 그러나 아이를 키우면서 병원 진료는 피할 수도, 미룰 수도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닫고 있다.
아이의 독감 판정 다음날 나도 병원으로 향했다. 검사하지 않아도 독감이라는 걸 확신했지만 “그래도 검사는 받아야죠.”하는 야속한 의사 선생님. 면봉이 혹시 눈까지 찌르는 건 않을까 아니면 목구멍으로 나오는 건 아닐까, 파워 N답게 온갖 극단적인 상상을 해대는 사이에 면봉이 이미 코 앞으로 다가왔다. 두려움을 떨칠 수 있게 한 건 어제 아이가 보여준 용기였다. 있는 힘껏 내 손을 꽉 부여잡고 무서움을 떨쳐내려 애쓰던 그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내 아이도 했는데. 그 후로도 병원에서 주사를 맞거나 두려운 검사를 해야 할 때면 아이가 보여준 ‘용기’를 늘 떠올린다. 태생이 소심한 쫄보 엄마도 육아 앞에서 담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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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에서 돌아온 아이가 조잘조잘 들려주는 이야기가 좋다. 간식이 더 먹고 싶어서 선생님께 말했다는 이야기, 오늘 간식은 먹기 싫었는데 마침 엄마가 데리러 와서 좋았다는 이야기 등등. 아이와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부쩍 늘어난 아이의 용기와 인내심을 엿본다. 무엇보다 아이가 말하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다. 빨리 말해주고 싶어서 급해지는 말의 템포와 좀 더 우스꽝스럽게 재현하는 표정까지. 매일 하원 후 들려주는 ‘간식 이야기‘가 요즘 내 소소한 낙 중 하나다. 그 밖에도 누가 누구를 때렸다는 얘기나 누가 선생님한테 혼나서 울었다는 얘기 등 친구들에 대해서도 자주 이야기했다. 어느샌가 반 친구들 이름을 거의 다 알게 되었고 하도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런지 본 적 없는 친구들에게 내적 친밀감까지 생겼다.
집에서 조잘대는 습관이 밖으로 새지 않을 리 없다. 유치원에서 학부모 상담을 할 때 종종 민망한 적이 있었다. “엄마 아빠는 짠~하고 캬~해요”라며 술 마시는 흉내를 내거나 “우리 엄마 아빠는 어제 싸웠는데!”라며 유치원에서도 이런저런 TMI를 방출하고 있었다. 가끔 마시는 맥주 한 잔, 남편과 장난치듯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아이 눈에는 저렇게 보이는구나, 새롭기도 했다. 한편으로 아이가 하는 모든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친구들이 장난하는 모습이 싸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선생님의 정상적인 훈육이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다. 아직 상황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주관적인 감상이 앞서는 나이다.
아이는 유독 친구들을 잘 관찰하고 상황을 세심하게 핸들링할 줄도 알았다. 반면 타인의 행동과 말에 과하게 의미를 부여할 때도 있었다. 어느 날은 “오늘 OO가 날 밀치고 지나갔어”라고 말했다. 화가 난 아이에게 첫마디로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1번 “그래? 다치진 않았어?”, 2번 “어머! 걔는 왜 밀치고 갔대~”, 3번 “걔가 사과했어?” 대충 이 3가지 답 사이에서 헤맨다. 사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속에서 화부터 나지만 아이가 실제 일어난 상황보다 크게 받아들였을 수 있으니 일단 차분하게 생각해 본다. 갈등 상황이 늘 어려운 나는 그동안 “그래? 다치진 않았어? 근데 걔가 못 보고 지나간 건 아닐까? 일부러 그러진 않았을 거야”라며 상황을 좋게 마무리지으려고만 했다. 아이가 느낀 부정적인 감정을 최대한 빨리 털어내주고 싶어서다. 그런데 몇 차례 그렇게 말하다 보니 정작 받아야 할 사과를 못 받고 피해를 당해도 가해자를 이해하라는, 말도 안 되는 우를 범하고 있었다. 이후 비슷한 일이 있었을 때는 “실수라도 사람을 밀친 건 잘못이니 너의 상한 마음을 정확히 말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알려줬다.(정작 그런 거 잘 못하는 사람=나)
엄마인 나는 무조건 긍정하지도 반대로 부정하지도 않는 중용을 지키고 싶다. 물론 아이의 편을 먼저 들어주긴 하지만 아닌 건 아니라고, 너의 잘못이 있다면 그것도 정확히 알려주는 엄마가 되고 싶다. 살아보니 좋은 얘기만 하는 사람이 무조건 좋은 사람은 아니더라고. 지금은 그저 두 귀를 활짝 열고 뭐든 열심히 들어줄 때다.
매주 금요일 연재 중
육아를 하면서 느낀 단상을 적습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10년 차 엄마의 자아 성찰 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