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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Aug 02. 2024

7살의 자유


처음으로 혼자 놀이터 간 날

핸드폰도 없이 아이가 혼자 놀이터에 갔다. 겁도 없이 아이를 혼자 밖에 보냈다. 친구 핸드폰을 빌려 두 번 걸려 온 전화. “엄마, 나 분수 놀이터 쪽에서 놀아도 돼?” 위치를 옮길 때마다 나에게 알려주는 아이의 모습이 낯설다. 전화기 너머로 듣는 아이의 목소리는 너무 생경하고 서운할 정도로 또랑또랑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실시간 위치 보고에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다. 슬쩍 놀이터 쪽을 배회하기도 하고, 베란다 창문에 딱 붙어 까치발을 한 채 놀이터를 염탐하기도 했다. 아파트 곳곳에 설치된 CCTV(입주민이 볼 수 있는 시스템) 화면으로 놀이터를 수시로 체크하기도 했다.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끝까지 미루고 싶었지만 아이에게 핸드폰을 사줘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언제까지 친구 핸드폰을 빌리게 할 수 없어서 며칠 후 아이에게 첫 핸드폰을 사주었다. 정확히는 집에 잠들어 있는 구형 아이폰 SE를 개통해 주었다. 앱 사용에는 제한을 두고 전화, 카카오톡, 카메라 정도의 기능만 허가했는데도 아이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너무 빠른 건 아닐까’ 수없이 고민하고 후회도 했지만 실보다 득이 많은 선택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스마트폰에도 게임이나 오락 앱을 깔았지만, 스크린 타임을 걸어 두니 크게 실랑이할 일 없이 아이 스스로 사용 시간을 제한했다. 나도 못 지키는 스크린 타임 제한을 아이는 ‘약속’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켜 나갔다.  반성하자, 나 …… 무엇보다 아이 손에 핸드폰을 쥐어 준 후부터 우리의 생활이 훨씬 자유로워졌다. 나의 퇴근이 조금 늦어지는 날에는 아이에게 곧바로 연락을 줄 수 있었고 아이는 혼자 다닐 수 있게 되니 친구들과 더 자주 놀 수 있었다. 작은 스마트폰 하나가 서로에게 자유를 쥐어 준 셈이다.

아이가 잠든 밤이면 아이의 스마트폰을 수시로 검사했다. 불안이 사라졌나 했더니 또 다른 불안을 낳았다. 카카오톡으로 친구들과 나눈 메시지를 확인하고 유해한 앱이나 사이트가 없는지 뒤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그만하자‘ 싶었다. 이제 막 손에 들어온 자유가, 너무 꽉 쥔 손에 물러 터져 버릴 지경이었다. 이건 자유가 아니라 감시지. 감시로부터 해방되기로 했다. 오늘 친구랑 어떤 카톡을 주고받았는지, 어떤 유튜브를 보고 어떤 게임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내가 몰라야 하는 것도 있는 거겠지. 내 유튜브 알고리즘이나 인스타그램 둘러보기를 남편도 모르는 것처럼. 작은 스마트폰 하나로 아이에게 프라이버시가 생겼다.

아이가 핸드폰도 없이 처음 혼자 놀이터를 간 날로부터 수없이 많은 날이 지났다.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학원도 갔다. “잘 모르면 엄마랑 통화하면서 가”라는 말에 “버스에서는 전화 통화하면 매너가 아니니까 카톡으로 하자“던 아이. 정류장을 떠나가는 버스를 보며 그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고작 2 정거장 거리지만 오늘의 작은 성공이 앞으로 널 더 많은 곳으로 데려가길. 제 두 발로 부모의 울타리 밖 더 넓은 세상으로 걸어 나가길, 기꺼이 바랐다.


*


취향 존중

7살이 된 아이는 부쩍 옷에 관심이 많아졌다. 이제는 “아이브 언니들이 입는 짧은 크롭티”나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양말” 등을 입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요구한다. 아이를 키우는 소소한 행복 중 하나가 예쁜 옷을 입히는 재미가 아닐까. 그런데 아이가 클수록 ‘예쁜 옷’의 기준이 나와 달라지고 있다. 지금까지는 엄마 아빠가 예쁘다고 하면 예쁜 줄 알고 순순히 입었는데 이제는 아이에게도 ‘취향‘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 자식이니까 내 취향과 비슷하겠지, 하는 생각은 오산.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힘들게 구한 옷들은 이제 너무 화려하다며 쳐다보지도 않는다. ‘에잇, 비싸게 산 건데……’라는 속마음을 꾹꾹 누르며 손가락은 이미 당근 앱을 누른다.

아이는 이제 입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등을 스스로 선택한다. 아이가 자신만의 취향을 찾아 나가자 나는 착각에 빠졌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진리를 아이가 알고 있다는 착각. 알 턱이 있겠나. 예를 들어 날씨에 안 맞는 긴 외투를 고집스럽게 입고 나와서는 덥다며 벗었을 때 “그거 네가 입는다고 고른 거니까 입기 싫어도 네가 들고 다녀야 해”라고 알려줘야 한다. 안 그러면 “엄마 이거 들어줘”하면서 당연한 듯 내게 넘겨준다. 카페에서 케이크와 음료가 먹고 싶다고 이것저것 시켜 놓고는 몇 입 못 먹고 배불러할 때 “그거 네가 먹는다고 시킨 거니까 남기지 않고 먹어야 해“라고 알려줘야 한다. 안 그러면 음식 낭비, 돈 낭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자유에 따른 책임까지 가르쳐야 하는 게 부모의 역할이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 상황에서 ”네, 엄마“하고 고분고분 따르는 아이가 몇 명이나 될까. 하지만 아이와의 갈등을 무릅쓰고서라도 가르쳐야 한다. 그 책임을 배우지 못하고 어른이 되면 세상 살기 참 힘들어진다. 내가 한 선택이라는 것을 모르고 날씨 탓, 음식 탓, 남 탓, 세상 탓 그저 탓만 하는 어른이 된다. 아이가 클수록 가르칠 게 많아진다. 부모도 자라야 한다. 1살을 키울 때와 7살을 키울 때 나는 달라야 한다. 유독 그런 조급함에 사로잡히는 날이 많아졌다. 이내 “그래서, 나는 좋은 어른인가?” “나는 잘 자란 어른인가“라는 물음에 다다랐지만 명쾌한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고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처음 입은 크롭티와 어른스럽게 묶어준 머리에 신나서 춤을 춘다. ‘그래…… 네가 책임감이 뭔지 알겠니?’ 너무 까불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스스럼없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반갑다. 마음에 썩 들진 않아도 크롭티를 좋아하는 아이의 취향을 존중하기로 한다. 아이의 취향과 선택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것. 그게, 책임감을 알려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



미래에서 온 육아 일기

매주 금요일 연재 중

육아를 하면서 느낀 단상들을 적습니다. ‘아이가 나를 키운다’는 말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10년 차 엄마의 자아 성찰 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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