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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예진 Jan 18. 2024

사진을 디깅합니다

Part 1. 사진


시간을 달리는 카메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낡은 카메라. 1초의 고민도 없이 집으로 가져왔다. 1972년에 만들어진 미놀타 SRT 101. 곧장 카메라가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종로 세운상가로 향했다. 생경한 카메라 부품이 즐비한 오래된 수리점. 귀찮아하는 듯 보이는 수리공 할아버지의 태도에서 그리 가치 있는 카메라가 아니라는 걸 쉽게 눈치챘다. 수리비 12만 원은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큰돈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함께 잠들 줄 알았던 카메라에 새 생명을 불어넣기에는 전혀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골동품으로 남을 줄 알았던 카메라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데려오던 발걸음이 설렘으로 가득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날부터 카메라는 내게 ‘설렘’이었다. 처음 필름을 사서 인사동으로 출사를 나간 날. 한 컷 한 컷 신중히 셔터를 누르던 순간. 어떤 사진들이 찍혔을까 인화를 맡기고 기다리던 시간. 그러나 달콤한 설렘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부푼 마음을 안고 인화된 사진을 꺼냈을 때 받은 충격이 아직도 선연하다. 36 롤의 필름을 인화하면 초점이 제대로 맞은 사진은 10장 남짓. 그도 그럴 것이 수동 필름카메라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도 모르고 셔터만 눌러 댔다. 카메라의 이론은 잘 몰랐지만 요즘 카메라에는 없는 둔탁한 셔터음과 필름을 직접 감아야 하는 레버 등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카메라 자체에 끌렸다기보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고 기록하는 과정을 즐겼던 것 같다. 필름카메라의 셔터음이나 레버, 다이얼은 무언가 찍고 있다는 확신을 직관적으로 느끼게 했다. 곳곳에 남아 있을 할아버지의 손때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이 카메라로 어떤 세상을 담아 왔을까. 이 카메라는 50년 동안 어떤 세상을 봐 왔을까. 그중 절반 이상은 책장에 놓여 있었을 카메라를 더 많은 세상에 데려 나가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낡은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 필름 사진을 찍는 나에 심취해 있던 시절이라 다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사진은 알면 알수록 물음표를 남겼다. 잘 찍고 싶다는 마음은 의외로 쉽게 단념됐다. 무작정 의미 없는 컷들을 양산하기보다는 남들의 사진을 많이 봐야 했다. 세상에 멋진 사진을 찍는 사람은 너무도 많고 그런 전문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접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즐거웠다. 갓 성인이 된 내가 사진을 접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은 인터넷 서핑. 네이버와 구글에서 웹 서핑을 하며 내가 ‘좋아하는 사진’에 대해 찾고 또 찾았다. 어떤 사진은 꼭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나를 붙잡고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알듯 말 듯 마음을 간지럽히는 사진도 있고, 속마음을 꽁꽁 숨기는 사진도 있었다.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작가의 마음이 전해지는 사진도 있고 난해하고 어렵지만 머리에 오래 맴도는 사진도 있었다. 어떤 사진이든 셔터를 누르게 한 ‘결정적 이유’가 있으리라. 사진 한 컷에 담긴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유추해 보는 재미가 있었다. 한편 어떤 감상을 느끼기도 전에 마음에 안착하는 사진도 있다. ‘로베로 드와노’의 사진이 꼭 그랬다. 보는 순간 사진 속 피사체를 꼭 끌어안고 싶어지는 사진. 그 후로 사진을 찍는 일 보다 보는 일이 더 많아졌다. 한때는 사진가를 꿈꾼 적도 있지만 타인의 사진을 보고 사유하는 시간이 내 시야를 넓히는 데 더 도움이 됐다(고 믿는다).


인터넷에서 보던 로베로 드와노의 사진을 파리 퐁피두 센터에서 영접. 모니터 화면에 익숙한 탓인지 실제 사진이 너무 작아서 놀랐고, 그 작은 사진에 압도돼 또 한 번 놀랐다.



사진이 말을 건네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십여 년 전, ‘도쿄사진미술관’에 대해 알게 됐다. 사진 전문 미술관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부럽기도 했다. 늘 전시 스케줄을 체크하며 보고 싶은 사진작가의 전시가 열릴 때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도쿄 중심에는 캐논, 니콘, 펜탁스 등 각종 카메라 브랜드들의 갤러리도 있어 참새 방앗간 마냥 이곳에 들르는 일도 잦았다. 내가 재학 중이던 일본 학교에는 카메라를 좋아하는 일본 학생이나 외국인 유학생도 많았는데 국적과 언어가 달라도 카메라를 매개로 금세 가까워졌다. 카메라와 사진을 좋아하던 내게, 일본에서의 생활은 유토피아 같았다.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그러던 중 즐겨 보던 잡지 <BRUTUS>에서 여성 사진가 3인의 토크 이벤트가 열린다는 기사를 접했고, 방청객을 모집하길래 냉큼 응모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벤트에 당첨되어 어느 비 오는 겨울밤 홀로 이벤트장으로 향했다. 그날의 토크 이벤트는 14년이 지난 지금도 내 인생에서 손꼽는 꿈같은 날 중에 하나가 됐다. 그날의 감상을 당시 블로그에 기록했는데 일부 내용을 이곳에 공유한다.



  시노야마 키신과 여성 사진가 3인의 토크 이벤트에 다녀왔다. 예상외로 혼자 온 사람이 별로 없어서 외로웠지만 토크쇼가 끝난 후에는 ‘오늘 오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시노야마 키신의 제안으로 성사된 이번 토크쇼는 카와우치 린코, 나가시마 유리에, 우메 카요 3명의 사진가와 그녀들의 사진을 사진집이라는 작품으로 만든 출판사 편집자 3인의 대담으로 이어졌다. 3명의 사진가는 그녀들의 작품만큼이나 각자의 분위기가 너무 달라서 그 다양성이 재미있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람은 카와우치 린코. 그녀의 말 중 인상에 남았던 몇 가지. 첫 번째, 피사체는 사진가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피사체라도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에 의해 전혀 새로운 것이 된다. 그것이 바로 사진가의 힘. 두 번째, 사진이 좋은 이유는 피사체와의 거리감이다. 사진은 찍는 순간과 찍은 후 느끼는 감정이 달라지기도 한다. 내가 찍은 사진이라도 전혀 다른 타인의 것처럼 느껴지는 거리감이 좋다.

  나가시마 유리에는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왠지 나와 닮아 보였다.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카메라로 얼굴을 가릴 수 있어서. 숨어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좋다. 얼굴은 가렸지만 렌즈를 통해 피사체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이 좋다. 나가시마 유리에의 이 한 마디를 듣고 ‘카메라를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렌즈를 통해 나만의 세상을 보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우메 카요는 어리숙하고 어딘가 웃기지만, 좋아하는 아이돌 멤버에게 자신의 사진을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을 찍는다는 솔직함이 매력적이었다.

  토크쇼가 끝나고 뇌리에 강렬하게 남은 것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었다. 3명의 사진가는 닮은 듯 달랐다. 사진은 찍는 사람에 의해 전혀 달라진다는 그 당연한 사실이 놀랍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도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지. 재밌는 사진을 찍고 싶다면 재미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2010년 12월 10일



  늘 인터넷 화면으로만 보던 누군가의 ‘사진’, 그 이면에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목도한 날이었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어떤 카메라를 쓰든, 어떤 장소에서 어떤 피사체를 찍든 중요한 것은 사진을 찍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믿게 됐다. 때로 사진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더 많이 담아낸다. 사진은 내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진가의 마음을 슬며시 꺼내 보여준다. 이미 작고한 1900년대 프랑스 사진가의 사진이나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사진가들의 사진을 볼 때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의 정면에 있는 나와 사진의 이면에 있는 사진가가 나누는 무언의 대화. 어릴 적 누군가 몰래 사물함에 넣어 둔 편지를 발견했을 때처럼 설렘과 호기심, 묘한 긴장감까지 준다. 그 대화는 사진을 화면으로 볼 때 보다 손에 만져지는 사진집이나 엽서로 볼 때 더 농밀해졌고, 실사를 볼 수 있는 전시에서는 오히려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대화를 곱씹을 시간이 주어졌다.


유학 시절 참새 방앗간처럼 다녔던 도쿄사진미술관. 사진 애호가에게 도쿄는 유토피아 같았다.
시노야마 키신은 노년에 접어든 나이에도(당시 70세) 현역 아이돌의 화보를 촬영할 만큼 왕성히 활동했다. 후배 사진가들과 허물없이 교류하며 토크쇼, 잡지 인터뷰 등을 이끌었다.


마음을 보여주다


  내가 몰랐을 뿐이지 국내에도 한미사진미술관이나 고은사진미술관, 랄프깁슨 사진 미술관 등 사진전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이 몇 곳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그 외 삼청동 일대에 있는 크고 작은 갤러리에서도 종종 사진전이 열린다. 앞서 말했듯이 전시에서는 사진을 실제 인화 크기로 볼 수 있어 감상의 수준이 전혀 달라진다. 어느 나라를 여행하든 꼭 사진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을 찾는다. 프랑스에서는 퐁피두에 가서 염원하던 로베로 드와노의 작품을 만났고 영국 첼시 갤러리에서는 우연히 현대 사진가들의 그룹전을 접하곤 무척 인상적이어서 도록도 구입했다. 스페인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에서는 인터넷 화면으로만 봤던 만 레이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사진전을 종종 찾는 이유 중 하나는 사진을 통해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사진 한 컷에 담긴 스토리는 온전히 그 해석을 감상자의 것으로 돌린다. 구체적인 설명도, 많은 정보도 주지 않지만 빈 해석의 공간에서 감상자는 자유롭게 사유를 즐길 수 있다. 요즘에는 꼭 미술관을 찾지 않아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보다 다양한 작가의 사진을 쉽게 접하고 있다. SNS 계정이 사진가의 아카이브 자체가 되어 사진집이나 사진전으로 접하기 어려운 해외 작가나 국내 신진 작가들의 작품도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눈으로 본 모든 작품을 내 것으로 체화할 순 없지만, 타인의 눈(렌즈)에 담긴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나의 오늘이 달리진다.  


  찰나의 한 컷. 사진은 단편적인 동시에 연속적이다. 사진은 어떤 시간의 순간일 수도 있고, 어떤 순간의 연장일 수도 있다. 매일 찍고 찍히는 시대, 사진의 의미는 점차 넓어지고 이미지들은 범람한다. 소음이 많을수록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대의 말에 집중하듯이 넘쳐나는 이미지 속에서 사진 한 컷에 담긴 진심을 보는 일은 더 각별해진다. 최근에는 부모님이나 남편, 아이 등 가까운 사람들이 찍은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같은 곳에서도 우리의 눈은 서로 다른 것을 본다. 사진만큼 사람의 마음을 가시화할 수 있는 게 또 있을까. 그 마음을 보고 싶어서, 마음에 닿고 싶어서 늘 사진 곁에 머무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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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에디터와 번역가, 남에게 취향을 팔기보단 매번 본인이 사기만 하는 전직 마케터가 풀어내는 디깅의, 디깅에 의한, 디깅을 위한 에세이. 디깅을 처음 시작하는 분, 다수가 인정하는 프로 덕질러, 이 장르 저 장르 최애는 없고 차애만 가득한 우리 옆집 사는 분까지 두루두루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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