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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영화 리뷰] 스페이스 인사이드 오브 어스

금기와 몽환적 탐미적 에로티시즘

스페이스 인사이드 오브 어스 The space inside of us (2019)

금기와 몽환적 탐미적 에로티시즘에 뒤섞인 욕망,살인 총통과 심리 파괴가 어울린 영화의 한계를 뛰어넘는 미적 쾌감의 걸작


에로티시즘 속에 보이는 독특하고 발칙한 상상과 살인 충동 속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의 몽환적 환상의 최고의 조합  


‘일식'이라는 말 자체가 ‘태양을 좀먹었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처지에서 볼 때 달이 지구의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의 시야를 정확하게 가려서 태양이 완전히 달의 뒤에 감추어져 버리는 것을 일식이라고 한다. 태양을 가리키는 한자가 날 일, 그날은 우리 인생의 날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루하루 지나는 인생의 날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식의 현상이라는 것은 즉 우리의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새로운 기운이나 상스러운 현상을 받아, 더 성장하고,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일식 현상의 자리에서 만난 마그마란 여자에게 대한 얀 이라는 인물이 느끼는 욕망과 충동을 에로티시즘과 가학적 폭력성이 잘 어울려진 작품이다. 


영상을 음산한 음악과 함께 하늘에서 깃털들이 떨어지며, 주인공 얀과 마그다의 뜨거운 욕망의 에로티시즘을 보여주면서 호기심을 자극한다, 마그다는 뜨거운 열정 속에서 자기를 죽일 거라고 남자에게 묻고 얀은 그렇다고 말한다. 마그다는 얀에서 왜 자길 죽이냐고 묻는다. 얀은 당신을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둘의 첫마남은 첫 음부터 얀의 욕망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개기일식 현상이 교차하면서 뭔가 특별한 암시를 의미한다. 그다음 장면은 얀이 창고의 나무 탁자 위에 마그다를 눕혀 놓고 손을 자른다. 얀은 이제 뭘 할 거라는 마그다의 말에 당신과 이별할 거라고 말하고, 이제부터 마그다의 유혹이 시작되고, 얀은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그녀의 팔을 자르기 시작한다. 마그다의 유혹 적인 눈빛, 그리고 개기 일식의 성그러운 현상이 시작되고, 얀을 달콤한 뱀의 혀로 유혹하는 마그다, 연을 자꾸 돌발한다, 자기를 원하느냐고? 


다시 유혹에 빠져 마그다의 육체에 빠져 있는 얀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와 교차 적으로 얀이 자르는 마그다 피에서 떨어지는 장면이 보여준다. 유혹과 살인, 그와 동시에 마그다의 유혹 적인 말들, 얀은 마그다의 팔을 자른다, 마그다는 계속 얀을 유혹한다. 고통스러워하는 얀은 마그다의 말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도끼로 내려친다. 그리고 다시 현실인지 과거인지 마그다의 보는 시점, 마그다 죽이려고 목을 조르는 느낌, 영화 장면을 교차 적으로 개기 일식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를 점점 혼란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도끼로 찍은 마그다의 시체가 일어서며 와전 일식이라고 말하는 순간, 전체는 어둠에 휩싸인다. 


그런 가운데 마그다는 얀 에게 유혹적인 목소리로 속삭인다. 침묵의 소리를 듣고 있느냐고? 그 소릴 거부했던 얀은 결국 그 소리는 얀을 환상에서 현실에 끄집어내며 영화는 과거인지? 현실인지? 모르는 아름다운 러브 테마가 흐르며 둘의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장면은 얀의 몽환적 환상일수록, 아니면 현실적인 모습일지 모르지만, 상당히 아름답고 에로틱하게 보인다. 그러면서 개기 일식이 끝나며 얀은 그녀에게 다가가며 몽환적인 상상과 개기 일식 끝나는 장면이 몽타주로 교차 적으로 빠르게 보여주며 시각적인 완성을 이룬다. 


<유키코> <프리컷 걸> 우리나라에서는 Eric Dinkian 감독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 대표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접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Eric Dinkian은 1999 년부터 텔레비전과 영화에서 전문 편집자로 일하고 있다. 2008 년부터 3IS 영화 학교 편집 부문을 이끌고 있다. 독창성과 강렬함으로 해외에서 인정받은 단편 영화의 작가이자 감독이다. 처음 영화를 보는 이들은 그의 작품에 매력을 느끼기는 몹시 어렵다. 사실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어려운 편이다. 그런데도 그의 작품에 깊게 빠져든 사람이라면 그의 작품에 대한 찬사를 끊이지 않는다. 앞으로도 이 감독은 영화계의 전설이 되어서 많은 영화인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회자되 인물은 분명하다. 


그의 영화는 일반 상업적인 대중 영화의 화법과는 완전히 다른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반응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에게도 전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고통이다.’라는 선입견은 우울한 건 보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그들은 밝고 행복한 영화와 만나기를 원한다. 하긴, 이 영화를 보다 느끼는 우울함을 부정하기란 힘들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몽환적이고 탐미에 빠져 있는 에로티시즘과 그의 욕망을 억제하는 살인 충동으로 교차 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욕망과 살인은 한 프레임 속에 존재한다. 


이 감독의 전작들을 보면 고통, 죽음과 연결하는 것이 에로티시즘이다. 이번에도 가장 상스럽고 거룩한 시간 속에서 느끼는 것은 한 여자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을 거부하고 뿌리치려고 노력하는 살인 충동이다. 감독의 영화에서 늘 느끼는 점은 역시, 뭔가에 대한 에로티시즘 속에 보이는 독특하고 발칙한 상상과 살인 충동 속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의 몽환적 환상이다. 그의 작품의 독특한 몽환성은 전에도 후에도 없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하여 에로틱한 환상에만 사로잡히지도 않는다. 


작품에 따라서는 욕망을 표현한 에로티시즘 만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 나 자신이 속된 느낌 이랄까? 차라리 본디 곳으로의 회귀와 그곳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따사로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영화 속에서 바라보는 영혼은 최고조로 고양 되기도 한다. 영화의 상영시간 동안, 기존의 틀에 박힌 시간은 부서지고 허물어진 현실이 에로티시즘을 가미한 또 다른 욕망의 허상이고, 허구적·몽환적 예술 세계가 영상의 미장센의 현실이 된다. 


에로티시즘에서 느끼게 되는 심장의 벌떡거림 만이 아니라, 칸트가 말하는 "오직 순수한 미적 판단들만이 가장 올바른 취향의 판단이다."에서 느껴지는 "미적 쾌감"을 느낀다. 보는 사람이 몽환적 상상과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하는 이외에 영화를 보는 내내 새로운 에로티시즘의 미적 쾌감과 몽환적 환상을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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