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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Aug 14. 2019

소녀의 얕은 숨소리와 가족의 밥 씹는 소리

영화 <우리집>의 시선에 관하여

*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얕고 낮게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뒤이어 들려오는 남녀의 불안하고 높은 언성.

열두 살의 여름을 보내고 있는 하나(김나연 분)가 매일 호흡하는 곳은 위태롭다.

매일같이 높은 언성으로 다퉈대는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며 가쁜 숨을 내쉬는 게 하나의 아침이다.

아이들보다 더 아이들처럼 다투고, 어쩌면 초등학생의 말싸움보다도 더 유치한 어른들의 언쟁.

이 전장 같은 곳에서 얕고 낮게 색색거리는 하나의 가쁜 숨소리에는 그 모든 고민과 상처, 난감이 담겨있다.


영화 <우리집>에서 (하나의) '우리집'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하나의 불안한 숨소리로 모든 걸 설명한다.

늘 품 안 가득 무거운 짐을 양손으로 안고 다니는 하나는, 어린 나이에 세상의 모든 짐을 떠안은 것처럼 보인다.

일찍이 걱정 가득한 얼굴을 가져버린 하나는 우리 가족이 이대로 사이가 완전히 나빠질까 봐 무섭다.

액자에 끼워져 있지 않았더라면 기억조차 희미했을 시절에 찍은 가족사진을 바라보는 하나.

우리 가족의 표정이 온전히 담긴 바다여행 사진이다.

'이날 이후로 우리 가족 다 같이 여행 간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결심한 하나, 엄마와 아빠에게 문득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 가족여행 가요. 바다로"


일곱 살 유진(주예림 분)이의 유일한 친구는 언니 유미(김시아 분)다.

그래서 언니는 친구요, 엄마이자, 언니 자체다.

엄마와 아빠는 일을 하러 먼 곳에 계신다고 했고, 이 자매를 보호할 수 있는 건 집과 그들 자신뿐이다.

그나마 잠깐씩 전화로 엄마 목소리를 듣는 건 작은 안심이다.

열한 살 유미는 유진이 배고프면 먹을 걸 줘야 하고, 사라지면 찾아야 하고, 울면 달래줘야 한다.

그래도 둘에게 조금 넓은 '우리집'은 왠지 막연하고 유일하게 그들을 영원히 보호해줄 것만 같다.


요 며칠 새 잦아진 주인아줌마의 부름.

우리집인데 자꾸 모르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방 안 구석구석을 살펴본다.

우리집인데 우리집이 아닌 이 상황을 유진이는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미 여섯 번인가, 일곱 번 정도 이사를 해왔지만 이사는 늘 싫고 두렵다.

크고 작은 박스를 모으는 걸 좋아하는 유미는 집 안에 박스로 만든 또 하나의 집을 지을까, 생각한다.

 "우리집은 진짜 왜 이러지?"
"내가 지킬 거야 우리집, 너네집도"


영화 <우리들>로 아이들에 대해 우리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던 사려 깊은 시선을 보여준 윤가은 감독의 신작, <우리집>은 '가족'과 '집'에 관한 이야기다. 매일 위태롭게 다투는 엄마 아빠를 보며 불안을 삼키는 유미, 멀리 떨어진 엄마 아빠와 또다시 이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삼키는 유미와 유진. 세 소녀의 우연 같은 만남 이후, 하나는 가장 언니로서 우리집과 유미유진집(너네집)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사명을 갖는다. 이 세 소녀의 시선, 그중에서도 하나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만 영화는 흘러간다.


윤가은 감독이 말하길, 이번 영화를 찍을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라고 한다. 카메라의 시선을 아이들의 눈높이와 최대한 맞도록 하고, 그 아이들이 보지 않는 것을 굳이 따로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는 거다. 그 말은,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으로서 체험한 불안과 착잡이 곧 결국 아이들이 온전히 느꼈을 감정이란 말과 같다.


영화 <우리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어쩌면 어른과 가까워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보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예민하고 섬세하지 않을까. 그렇담 이 세상에 무뎌져 버린 우리보다, 그들에게 이 세상의 문제들이 눈에 더 잘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그만큼 그들이 세상의 문제를 고스란히 겪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집>을 보고는 이 생각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아이들은 아프고, 나도 아팠고, 세상의 생채기가 무뎌질 때 즈음 나는 아이의 시선과 기억을 잃었다.


'집'이라는 세계
"그건 어른들이 알아서 할 일이에요"

"실례 좀 할게요"

서울에 상경하고 혼자 살 자취방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잦았다.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에 사는 일은 물론,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을 구하러 다니는 일은 더욱 고통이었다. 계약이 끝나가는 집을 중심으로, 집주인과 함께 타인의 온기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을 둘러보는 건 왠지 모르게 (집주인이 아닌 집주인에게) 매번 죄송스러웠다. 게다가 그 집에 살던 이가 잠시 외출이라도 했을 때라면, 집주인은 고민 없이 마스터키로 집 문을 열고 대수롭지 않게 방을 구경시켜줬다. '집주인이니까 뭐 어때..'라는 생각을 자칫 위험하게 느꼈다. 또한 이사를 위해 역시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을 타인에게 내보이는 것도 역시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었다. 특히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이사를 가기 위해 누군가에게 우리집을 보여주는 것은 편치 않았다. 어색하게 정돈된 우리집 구석구석을 여러 명이 와서 버선발로 훑어보는 건 괜스레 이상하고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집은 세계다. 특히 아이들에겐 완전한 세계다. 가령 핵폭탄이 터져도 문 잘 닫고 침대 밑에서 이불 덮고 잘만 숨어 있는다면 안전할 것만 같은, 집은 날 완전히 보호해주는 세계인 것이다. 그런 세계를 침범하는 건 폭력적이다. 아이들에게 완전한 안전과 안정으로 느껴져야 할 집이 더 이상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린다면, 누구나 우리집 문을 활짝 열고 침범해올 수 있다고 느껴져 버린다면, 그것은 폭력이라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을 그런 집에 방치한 어른들의 무책임함이다.

"여기서 살자. 우리끼리만"
"근데 우리 뭐 먹고살아?"


더 이상 우리집이 안전한 공간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 세 소녀는 집을 벗어난다. 그리고 하나하나 조심스레 쌓아 만든 모형 집을 세차게 부순다. 새로운 세계로 날갯짓하기 위하여 기존의 세계를 짓부쉈던 <데미안>의 이야기처럼, 세 소녀는 용기 있는 걸음으로 발을 내딛는다. 물론 과정은 맘처럼 되지 않고 어린 감정도 늘 서툴다. 그러나 무책임이란 역할을 맡아버린 어른들 앞에서, 아이들은 "우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들이에요."라 말하지 않는다.


우연히 하룻밤 머물게 된 안락한 공간에서의 세 소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따뜻하고, 편하고, 먹을 것도 좀 있는 공간에서 소녀는 농담처럼 뱉는다. 여기서 살자고, 그것도 우리끼리만. 각자의 허공을 응시하며 까르르 웃는 소녀들에게 이 순간은 가장 편안해 보인다. 불안해 보이지도, 두려워 보이지도 않는다. 어른들의 세계와 우리집이 아닌 우리집에서 벗어나, 오직 세 소녀만 있는 작고 우연한 공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안전한 곳처럼 보인다. 여기서 가장 어린 7살 소녀 유진이 대답한다. "근데 우리 뭐 먹고살아?" 그들은 다시 까르르 웃는다. 그들도 안다. 여기서 우리끼리만 살자는 말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완벽한 농담인지를. 내일이면 떠나온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 어린 소녀들은 각자의 맘 속으로 이미 알고 있다. 티 없는 해맑음이 유독 아프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가족'이라는 관계
"우리 밥 먹자.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 준비하자"


우린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를 알고 있다. '한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

영화 속 하나가 왜 이렇게 그토록 같이 밥을 먹고 싶어 할까 의문이 들었다면, 나는 '가족'의 의미를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오직 이 어린 소녀라고 말해주고 싶다. "우리 밥 같이 먹자"는 말은 가족의 문제를 누구보다 예민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바라본 하나가, 조금이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보고자 생각해낸 간절한 구호였다. '가족여행'도 마찬가지다. 하나는 누구보다 바쁜 엄마 아빠에게 자신의 부탁이 철없는 어리광처럼 들릴 줄도 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기꺼이 철없는 어린 딸도 감수하는 하나의 모습은 영화 속 그 누구보다 성숙해 보인다.


물론 하나는 고작 5학년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어린 아이다. 아빠의 핸드폰을 비롯해 엄마의 여권 등 자신에게 골칫거리들만 모아놓은 상자처럼,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엔 당연히 서툴고 무력하다. 그 무거운 상자를 언제나 양 손으로 짐처럼 품은 하나는 명백히 여린 소녀다.


그런 소녀가 자꾸 가족들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것 또한, 이 가족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할 거란 걸 우리 모두는 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의 불안한 눈에서 느낄 수 있다. 가족이 한 식탁에서 함께 밥을 먹는 게 어쩌면 하나에게 '가족여행'보다도 간절한 소원일 수도 있었겠다는 것.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을 잠시 이 식탁에서 만큼은 가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같은 것.


하나는 말한다. "든든하게 먹고 '진짜 여행'을 준비하자"고. 여기서 '진짜 여행'이란 말의 의미를 마치 온 가족이 각자 마음으로 알아챈 듯, 영화는 가족이 식탁에 앉아 말없이 밥을 먹는 소리만 남긴 채 떠난다. 영화는 하나의 얕은 숨소리로 시작해 네 가족이 말 한마디 없이 밥을 씹는 소리로 끝맺는다. 여기에 하나의 '진짜 여행'이란 말이 한 소녀의 깊은 체념을 담은 말처럼 느껴져 더 아팠다.


스크린에 담긴 순간은 끊겼지만, 그들은 어디선가 지금도 얕고 가쁜 숨을 내쉬고 있을 것 같았다. 그 어느 것도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위태로운 공간에서 걱정스런 눈빛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크레딧이 올라가고는, 내가 이 여린 세 소녀들에게 그 무엇도 해주지 못하고 그 위태로운 세계에 남겨두고 와버린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약간의 생각 이후 든 생각은 죄책감보단 자책감이었다. 그들이 사는 곳은 항상 '우리집'이었을 테고, 그들은 원래 거기에 있었다. 항상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나의 무뎌진 시선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걱정스럽고 위태롭게. 그렇기에 죄책감보단 그들을 보지 못한, 그들의 시선으로 보지 못한 나에 대한 자책감이 괴로웠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무책임을 떠맡게 돼 방치하는 어른들과, 뭐라도 행동하는 아이들이 이제 동시에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길 바랄 뿐, 마찬가지로 무책임을 떠맡은 어른에 가깝다.

누군가는 가족이란 누가 보지 않으면 내다버리고 싶은 존재라 말했다. 가족 하면 '화목'이 강제 덕목처럼 세뇌되었듯, 가족이란 모름지기 달큰한 사랑의 향이 풍겨야만 하는 것처럼 요구된다. 그러나 어린 소녀들의 시선으로만 봐도 이 시선은 무척 단편적이다. 현대사회에서 관계로 인해 생긴 다양한 숙제 중에서 가장 고질적이고 특수한 형태가 바로 가족이다. 너무 사랑하면서 동시에 너무 미워하기 때문에 쉽게 풀리지 않을 실타래.


그렇기에 이 영화는 완전히 '가족영화'다.

영원히 풀기 어려울지도 모를, 그러나 영원히 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가족의 실타래.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우리는 우리가 잠시 잊고 지낸 시야로 세상을 봤을 뿐

이것이 바로 이 세상 '가족'의 모습이 아닐까.


영화는 8월 22일 개봉한다.




밖에선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집에만 가져가면

꽃들이

화분이


다 죽었다


진은영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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