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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May 30. 2019

참으로 시의적절하다

영화 <기생충> 단평

어느날은 그런 일이 있었다.

덥고 습한 날이었다. 축축한 바닥에 고동색 곱등이 하나가 배를 까뒤집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라면 벌레엔 발작을 일으켰을 터인데, 아둥바둥 꼼지락대는 여덟다리를 보아하니 이상한 우월감이 들어 웃음이 조금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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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쯧쯧..즈것들도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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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는 가장 아랫다리부터 서서히 느려졌는데, '죽었구나' 싶을 때 몸을 픽하고 바로세워 파삿하고 시야 위로 튀어 올랐다. 그때 소릴 지르며 화장실을 빠져나온 게 아직도 치욕스럽다. 저걸 밟아서 오장육부까지 터뜨려 죽였어야 했는데. 근데 걔네도 오장육부가 있나? 뭐,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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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삿, 오늘도 자리를 옮겼다 그저 산다고. 난 인간들 저 눈이 제일 싫다. 경멸보다 우월을 감춘 징그러운 반달 눈.

"제 자리를 지키라"는 건 결국 계급사회의 인정이다. '네 분수를 알아야지'라는 호통과 가깝다.

<설국열차>에서 메이슨(틸다 스윈튼 분)은 꼬리칸 사람들에게 "Keep your place!"라 외친다. <옥자>에선 희봉(변희봉 분)은 팔려간 옥자를 두고 "이게 이 놈이 타고난 팔자여.."라고 말한다. 봉준호의 장편데뷔작 <플란다스의 개>는 어떠한가? 개를 죽인 범인은 "사람이 개를 죽이는 데 이유가 있냐?"고 말하고 그 혐의는 지하실의 노숙자에게 덮어 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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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의 신호탄이 될 것 같던 봉준호의 대사들은, 지나고 생각해 보면 이미 계급사회에 적응해버린 무력감으로 기억된다. 봉준호 세계에서 계급사회란 자신의 팔자를 알고서(옥자) 그 사회에 끼어 들어가 제 자리를 지키던지(설국열차), 목숨을 건 투쟁 후에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다는 삶의 무력감을 깨닫던지(괴물), 결국은 현실적으로 두 가지 선택지만 남겨 버린다. 그러고선 그럼 너의 뒷모습은 얼마나 떳떳한가(플란다스의 개)라며 도리어 따끔하게 비꼬기도 한다.

그러나 이 세계는 지금, 어쨌든 살아 숨쉬고 있다. "사는 게 사는 거지" 하면서 살아내기 위해 파사삿 자리를 옮겨보기도, 삶이 있다면 그곳에 어떻게든 들러 붙어 보기도(기생충), 그 사이에서 달콤한 판타지를 꿈꾸기도(설국열차, 옥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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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아득바득 살아내는 사람들이 제각기의 템포로 가쁜 숨을 쉬고 있는 곳이 바로 봉준호의 세계고, 이는 곧 우리가 사는 세계다.

<설국열차>의 메이슨이 "Keep your place!"라 외쳐도 "지랄하네"하고 피식거리는 게 우리네 삶이다. 나날이 무기력하지만 그 속에서 피식거리며 사는 게 우리가 사는 세계다. 봉준호의 세계엔 그래서 늘 희망이 피식피식 남아있다. 이 세계에선 세상을 전복하는 것도, 시스템 자체를 파괴시켜 버리는 것도, 가족을 지키는 영웅이 되는 것도 모두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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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사는 거지, 라며 살아내는 이 가족(기생충) 덕분에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을 생각하게 하고 '살아온 것'을 되돌아 보게 한다. 그래서 이 영화는 기가 막히게 서슬 퍼런 우화에 가깝다. 내가 서있는 계단을 인지하는 계급사회를 일찌감치 등 뒤로 하고, 다만 제각기 다른 모두가 자신의 자리 한 번은 돌아보게 하는 공생의 역설. <플란다스의 개>부터 20년 가까이 봉준호가 꿈꾸는 세상이다.


한없이 무력할텐가, 그럼에도 함께 피식거릴 희망을 찾아나설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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