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화 <우상>과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
**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와 대화를 하다 보면 그런 난관에 부딪힐 때가 있다. 서로는 세상이라는 넓은 주제로 각자의 다른 신념과 사상을 가진 채 이야기를 나누고, 두 가치는 결국 충돌한다. 서로가 다른 목소리를 내다보니 점차 소리는 커지고, 이것이 결국 보편적일 수 없는 '세상'이라는 주제의 탓인지 좁혀질 수 없는 주파수 간극의 차인지 모른 채 텅 빈 말소리만 빙빙 돌게 된다. 마치 벽을 두고 얘기했던 것처럼 단절의 기분을 느낀다. 얼굴을 붉히고 침을 튀기며 목소리를 내다가 찰나에 이 수렁에서 빠져나와 보면 어느새 주제 거리에 관한 공방이 아닌 벌게진 감정만 덩그러니 남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저마다 각자의 신념으로 맹목적으로 지켜내려 하던 우상을 좇던 세 사람이 있다. 세상이라는 넓은 틀 속에서 세 사람이 좇는 목소리는, 필연적으로 같을 수 없다. 누군가는 명예나 돈 따위의 문제가 자신의 생명력이라 할 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에겐 혈연이라는 것, 또 누군가에겐 생존 그 자체가 생명력 자체일 수도 있다. 애초에 다른 출발점과 다른 신념으로 엮인 관계들이 얽히면 그 실타래는 풀어낼 수도 없이 엉킨다. 결국 이 실타래는 절단해야만 하는 것이다.
<한공주>로 파격적인 장편 데뷔를 한 이수진 감독의 신작 <우상>을 본 내 인상은 이렇다. 단절과 절단.
넓고 보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엮이지 말아야 할, 그러나 엮일 수밖에 없는 세 사람이 실타래처럼 얽혀 버렸을 때 그들의 목소리들은 자주 단절된다. 높은 지지 속 자신의 야망을 실현할 기로에 서있던 명회(한석규 분), 그는 영화 초반 도덕적으로 그리 타락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이나 결국은 자신이 좇던 맹목을 위해 추락에서 발버둥 친다. 그러나 이것은 (천우희 분)와 중식(설경구 분)에게 오면 결국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문제로 직결된다. 지체 장애인 아들의 죽음을 마주한 중식, 살아남기 위해 하얼빈에서 넘어와 숨어 살고 있는 불법 체류자 련화는 결국 영화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참수'의 메타포와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 세 사람이 한 사건에 얽혀 버렸으니 그들은 애초에 단절과 절단의 숙명을 가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말하는 '단절'의 은유는 영화 속에서 친절히 보여준다. 교도소 면회에서 유리 벽을 사이에 두고 인터폰 없이는 뭐라 말하는지 들을 수 없는 장면이라던지, 명회가 련화를 납치했을 때는 그녀의 눈과 귀를 모두 청테이프로 막아버린다던지, 련화에게 모욕을 던지는 명회의 어머니에게 "입은 아이 되오"라고 위협적으로 말하며 파국에 이르러선 수십 개의 숟가락과 젓가락을 그녀의 입 속에 꽂아서 살인하는 등 목소리의 단절을 보여주는 장면이 노골적으로 등장한다. 또한 결국 사건의 키를 잡고 있는 두 사람이, 죽음을 맞이해 말할 수 없는 지체 장애인과 한국말이 어눌한 불법체류자라는 점도 이 은유를 보충한다. 마치 사건에 엮인 모든 이들 사이에 투명한 벽이 놓여져 것처럼 이들은 늘 단절된다.
(다소 비약이나, 관객들의 후기에서 영화의 대사가 잘 들리지 않는다는 의견도 어쩌면 제4의 벽을 넘어 관객들에게도 '단절'의 비위를 선사하려는 게 아니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의외로 이 실타래를 절단하는 인물은 이들 중 사회적으로 가장 낮은 위치에서 살고 있는 련화다. 물론 절단에는 희생이 따른다. 탁한 물에서도 꽃을 피우며 뿌리 없이 부유하는, '연꽃' 같은 삶을 버텨내던 련화는 결국 실타래의 절단과 함께 추락의 숙명을 맞이한다.
그러나 영화는 결국 '벽'이 아닌, '거울'이 되고자 했던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결국 영화를 맺는 큰 주제의식이라는 생각인데,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스크린을 거대한 '거울'처럼 사용한다. 련화의 자폭에도 홀로 살아남은 명회는 화상으로 얼굴과 입의 근육이 눌어붙어 제대로 된 발음을 할 수 없게 된다. 명회는 알아듣기 힘든 언어로 연설을 하고 있으나, 이걸 지켜보는 관객들은 골똘히 경청한다. 야망과 명예가 '우상'이었던 명회는 지금 수많은 사람들의 '우상'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때 카메라는 경청하는 관객들을스크린에 가득 비춘다. 영화에서 가장 묘했던 순간인데, 이 스크린은 마치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영화의 관람객)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춰 놓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우리의 우상에 대해 묻는 거다.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연설을 하는 명회에게 열광하는 관객은 결국 우리가 된다. '벽'의 메타포가 '거울'의 메타포로 치환되는 순간 영화는 끝이 난다.
대중들이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과정, 그리고 한 개인이 삶에 있어 무언가를 맹목적으로 좇는 과정, 그리고 그들이 끊임없이 엇갈리고 얽히는 곳이라는 세상. 이 모든 게 바로 영화가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스크린은 끝내 거울이 되지 못하고 벽이 된다. 기댈 곳 없는 세상임에는 동의하는 편이지만, 영화 속에서도 관객이 기댈 곳이 없으며 단절의 메타포는 영화를 보러 온 관객도 함께 소외시킨다. 스크린과 관객이 단절되는 경험은 꽤 묘한 영화적 경험이나 마지막에 이르러 우매한 대중을 거울처럼 비추기까지 하니 우리는 끝까지 영화와 가까워질 기회가 없다.
결국 요한(명회의 아들)을 내치고 예수가 된 명회가 수많은 이들의 '우상'으로 거듭나듯이, 얽힌 실타래를 던져 놓은 감독의 메타포가 누군가에겐 '우상'이 될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늘 그렇듯 이 영화에 열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련화에게도 부여됐던 얽힌 실타래를 절단할 기회를 주지도 않고 관객들을 비추기만 하는 (거울을 꿈꾸는) 스크린에 열광하기엔 정말 내가 영화 속 골똘한 관객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준다.
끝내 벽이 된 스크린. 그게 바로 내가 이 영화와 가까워질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