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증인>이 던지는 본질적 질문과 카메라 너머의 김향기 배우
동그랗고 맑은 얼굴에 이 올망졸망한 이목구비, 양 볼을 머금은 작은 입에서 나오는 똑 부러지는 말투. 생후 27개월에 연예계로 눈처럼 살포시 내려앉아, 6살에는 <마음이..>로 그 보송보송한 얼굴을 스크린을 가득 메웠다. 배우 김향기에 관한 이야기다. 이후 수많은 '아역 붐'이 일었지만 '연기력'으로 기억의 잔상에 남은 배우는 몇 없었고, 그 사이에 뚜렷이 기억나는 배우 중 한 명이 바로 김향기다.
그 이유에는 역시 어린 시절부터 제 나이에 소화하기엔 꽤 힘든 연기를 소화했기 때문도 있을 게다. 많은 관객이 기억하다시피 데뷔작인 <마음이..>에서는 6살밖에 안 된 그 작은 몸을 얼음물에 던져야 했고, 3년 뒤 <그림자 살인>이라는 작품에서는 6시간 가까이 와이어에 매달려야 하는 혹사스런 연기를 감당했다.
이 배우가 주는 맑고 선한 인상 탓일까. 향기는 성장하면서도 늘 고통받고 피해를 입는 역할로 슬픈 눈을 보여줬다. 필자의 사견으론 카메라 너머의 액트 디렉팅에 있어서는 지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발달 중인 아역 배우들에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주의지만, 당시 상황을 모르는 입장으로서는 결론적으로 김향기는 그렇게 깊은 눈망울을 갖게 되어 여전히, 혹은 더욱 선한 인상을 가진 배우로 성장했다.
그렇게 향기는 이제 어엿한 성인 배우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잠시 또 다른 이야기로 새자면, 지난해 개봉한 <영주> 라는 영화를 들려주고 싶다. <영주>는 김향기의 첫 단독 주연 영화이자, 그 영화가 독립영화라는 점이 인상 깊다. 지난해 둘이 합쳐 약 2700만 관객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신과 함께-죄와벌>와 <신과 함께-인과 연>에서 김향기는 덕춘 역을 맡았다. 원작 캐릭터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앳된 향기표 덕춘 캐릭터를 탄생시키며 '쌍천만'신화에 공을 더했지만, 일각에선 이제 성인 배우로서의 김향기의 연기 스펙트럼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았다.
그 우려가 기우라는 듯, 김향기는 차기작으로 보란 듯이 <영주>를 택했다. <영주>에서 향기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졸지에 어린 동생을 챙겨야 하는 가장이 된 영주를 연기한다. 얼마 전 이 영화를 보면서 그녀의 깊은 눈에 대해 생각했다. '감정이 깊구나', '슬픔과 아픔의 결을 아는 배우구나'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맑음과 선함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김향기는 한없이 맑았고, 참 한결같이 선한 눈을 가진 배우였다.
그래서 내가 <증인>이라는 영화에서 주목한 건 바로 김향기라는 배우였다. 이제 갓 성인이 된 그녀는 또다시 도전한다.
김향기는 이 영화에서 자폐증을 가진 학생 지우를 연기한다. 게다가 그 소녀는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법정의 유일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세계 속에 살던 지우가, 부조리하고 무책임하고 어려운 세상 앞에 서야 한다. 그런 역할을 맡은 지우(김향기 분)가 뱉는 말, 그 원초적인 말들이 바로 이 영화가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다.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이자, 대형 로펌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는 변호사는 바로 순호(정우성 분)다. 순호는 이 사건의 살인 용의자의 무죄를 입증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유일한 목격자인 지우의 진술이 자기가 원하는 사건의 방향대로 흘러가게 해야 한다.
영화는 그렇게 순호와 지우라는 이 두 인물이 다소 대치하는 구도에서, 결국 연결되는 구도로 흘러간다.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지우가 순호에게 묻는다. 지우의 꿈은 변호사가 되는 것이었고, 그 이유는 변호사는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우가 순호에게 하는 질문은 결국 순호에게는 자기 정체성에 관한 자문이 된다. 민변 출신이지만 현실적 상황 때문에 대형 로펌에 들어가 속물이 되겠다는, 그 문턱에 서 있는 순호에게 그 질문은 마치 '나는 과연 좋은 변호사인가?'라고 되묻는 질문이 된다.
"아저씨도 나를 이용할 겁니까?"
어려운 사람을 돕는 좋은 변호사가 되겠다고 시작한 꿈, 그러나 같은 세계에서 함께 그런 꿈을 꾸던 동료에게 뱉은 말은 현실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저 질문은 순호의 허를 찌르는 말이었을 것이다.
지우가 가진 자폐증의 특성 중 하나는, 외부의 세계보다는 자기 세계의 영역에 머문다는 것이다. 의학적인 설명으로는 '자신의 세계에 갇혀 지내는 상태'로도 설명한다. 이에 대해 사건의 검사를 맡은 희중(이규형 분)은 '그러면 당신이 그 세계로 들어가면 된다'고 말한다.
사실 사람 사이가 원래 그렇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마주한다는 것은 한 세계와 또 다른 세계가 마주하는 것이고, 결국 맞닿아 있던 동그라미가 겹쳐지기 위해서는 어느 쪽이든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우는 남들과는 조금 다르게 그 세계의 경계선이 더 뚜렷하고 단단할 뿐이다. 결국 한 사람이 타인에게 마음을 열기 위해선 누군가는 그 경계를 조금씩 허물고 직접 그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
순호가 그 말에 벙찐 이유도 그런 이유였을 게다. 약한 사람을 도와 좋은 세상을 만들어보겠다던 다짐은 완전히 허물어졌음을 자각했을 때도 바로 그때였을 것이다. 결국 (영화 속 법정에서도 나온 말마따나)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는'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람을 '이용'해 승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합리적인 결론에 이르러 결국은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마음을 법적인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직업이 바로 '변호사'고, 그렇기 때문에 (지우의 말마따나) 변호사는 '좋은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순호의 선택은 다소 기행(奇行)스러우나 결국은 자신의 정체성(변호사)에 대한 본질,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고해성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우는 세상에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이 가장 원초적이고 간단한 질문이 때론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본 뒤 자기 자신이 흐려질 때마다 지우가 던졌던 그 가장 원초적인 질문,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라는 그 질문을 떠올려 볼 수도 있다. 역시 우리도 각자 우리의 세계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대답은 간단할 수도, 그러나 우리는 또한 타인의 세계와 끊임없이 부딪히는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대답은 복잡해질 수도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건 그 기로에 서 있던 순호는 결국 지우의 질문으로 인해 그 답을 명확히 찾았다는 모습일 거다.
이한 감독의 영화 <증인>이 보여주는 단점은 여실하다. 영화는 때로 과하게 착한 척을 하기도 하고, 때론 영화 속의 약자를 가학한다. 약자를 다루는 영화일수록 주의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영화는 한없이 착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또한 영화는 때로 대사를 남발하고 감정을 유도한다. 불필요한 대사로 관객의 신경을 소모시키는가 하면, 모든 관객이 연출이 원하는 방향대로 감정을 갖길 바라고 있다. 이는 여지없는 연출의 미흡이다.
그럼에도 이런 영화에게 마음을 완전히 저버릴 수 없는 이유는 한없이 맑고 선한 김향기가 보여준 연기, 키다리아저씨처럼 푸근하면서도 상황을 고뇌하는 정우성이 보여주는 연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 마음을 알기가, 또 얻기가 가장 힘들다고 말했듯이 연출가가 세상에 내놓은 영화는 개봉 후엔 언제나 관객 모두의 것이 된다. 나 또한 타인의, 당신의 마음을 모르기에 이 영화에 대해 나올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또한 지우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당신의 답변도 궁금하다. 당신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기를.
영화는 2월 13일에 개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