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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Oct 18. 2020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영화 <더 랍스터>와 『변신』을  빌려

 * 영화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의 스포일러가 담겨 있습니다.


Prologue.

사랑의 선택 : 도시와 숲


이 이상한 세계에서,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완벽한 짝’이 되거나 ‘완벽한 혼자’가 되거나.


“짝을 찾지 못하면 동물이 돼야 합니다.” 


도시. 짝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이 택한 동물로 변하는 곳. 데이비드(콜린 패럴 분)는 랍스터가 되겠다고 했다. 랍스터는 100년을 넘게 살고, 귀족처럼 푸른 피를 지녔으며, 평생 번식을 하니까. 이별을 통보받은 그는 지금 랍스터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은 45일. 이제 그는 ‘커플 메이킹 호텔’로 이송되어 다시 짝을 찾아야 한다. 말하자면 이 호텔은 ‘44’와 ‘45’의 신발 사이즈는 선택할 수 있지만 ‘44반’은 선택할 수 없는, 동성애자와 이성애자는 존재할 수 있지만 양성애자는 존재할 수 없는 곳. 선택지 밖의 자유란 허용치 않는 호텔이다. 거기다 인간을 속박하는 갖가지 규율로 지배되는 이곳에 끌려온 이들은 끔찍하리만큼 무감정해 보인다. 표정 없이 춤을 추고, 파동 없이 유혹한다. 동물로 변하지 않기 위해 집요하게 짝을 찾는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동물과 닮아 있지 않은가. 필사적으로 짝짓기 상대를 찾는 동물들. 이런 곳에서 짝을 찾으라니. 아, 사실 이 세계를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들이 믿는 사랑, 즉 ‘완벽한 짝’의 정의는 무조건 서로 한 가지 이상의 공통점이 있어야 한다는 것.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절름발이 남자(벤 위쇼 분)가 시도 때도 없이 코피를 흘리는 여자(제시카 바든 분)와 짝이 되기 위해 억지로 코를 찧어 피를 흘린다. 여자는 속았고 세계는 둘을 ‘완벽한 짝’으로 인정한다.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감정이란 억지로 만들어내는 것이 감추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그러곤 결심했다. 이곳을 탈출하리라고.     


“죽을 때까지 혼자 살아도 돼. 유예기간 같은 건 없어.” 


도시를 탈출한 데이비드. 이제 그는 꼼짝없이 랍스터가 되어야 하는가. 걱정하긴 이르다. 그에게는 아직 하나의 선택지가 더 있다. 숲. 숲속의 도망자가 되는 것. 무작정 도망친 끝에 그가 다다른 곳은 ‘완벽한 혼자’만이 존재하는 사회다. 이곳에선 ‘함께’란 허용되지 않는다. 서로 사랑해서도 안 되고, 도와서도 안 되며, 함께 춤을 춰서도 안 된다. 이를 어길시, 겨드랑이에 뜨거운 계란을 넣거나 입술을 면도날로 베어 강제로 입맞춤을 시키는 등 무시무시한 형벌이 주어진다. 심지어는 자신이 파묻힐 무덤을 스스로 파놔야 한다. ‘완벽한 짝’이 되기 싫다면 ‘완벽한 혼자’가 되어야 하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이곳에서 데이비드는 ‘완벽한 짝’이 될 여자(레이첼 와이즈 분)를 만난다. 여자는 남자의 목숨을 구해 주고, 남자는 여자에게 토끼를 구해 준다. 손닿지 않는 등에 연고를 발라 주고, 둘만의 비밀 몸짓 언어를 만든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 사랑일 수 있을까. 둘은 게다가 서로에게 근시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완벽한 짝’임을 확신한다. 그러나 사랑할 자유가 없는 이 숲, 둘의 사이는 곧 발각되고 그 응징으로 여자는 시력을 잃는다. 그렇게 둘은 공통점을 잃었다. 이제 두 사람이 이 세계의 논리로 사랑하려면 다시 공통점을 찾아야 한다. 혈액형이 무엇인지, 블루베리를 좋아하는지 따위의 우스운 문답이 오가지만 둘은 어떠한 공통점도 찾을 수 없다. 이제 방법은 하나, 데이비드가 시력을 잃어야 한다. 그걸 깨달았을 때 그는 문득, 랍스터가 시력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 그는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시력 잃은 랍스터, 그와 다르지 않은 꼴이 되어야 한다.

세계가 정의한 사랑(그것이 정말 ‘사랑’이라는 것엔 동의하지 않는다)만을 극단적으로 강요하는 집단성을 탈출한 끝에 다다른 곳은 세계가 정의한 사랑조차 용납하지 않는 또 다른 집단성이었다. 이 세계 그 어디에도 ‘사랑할 자유’란 없다. ‘다름’을 견딜 수 없는 이곳, 이 디스토피아에 과연 사랑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사랑의 감옥 데이비드와 그레고르그리고 카프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더 랍스터>(The Lobster, 2015)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세계관은 어째 꽤나 닮았다. <더 랍스터>가 사랑이 거세된 인간이 랍스터로 변신하는 세계라면, 『변신』은 노동이 거세된 인간이 갑충으로 변신하는 세계다. 이처럼 인간에게 숙명처럼 가해지는 우화적인 규칙이 두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규칙의 당위성에 대한 설명 역시 거세된 세계에서 버둥질하는 인간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원이나 채집통에 갇힌 생명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하다. 더구나 두 세계의 가장 참담한 지점은 ‘사랑’이 온전히 자리하기에 더없이 기형적인 곳이라는 것이다.

얼핏 보면 <더 랍스터>의 세계에 사랑의 자리는 있어 보인다. ‘완벽한 짝’을 찾으면 누구나 도시에서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으니. 게다가 짝을 상실할 경우 얼마든 새로운 ‘완벽한 짝’을 맺을 수 있도록 ‘커플 메이킹 호텔’을 마련하는 걸 보아, 사랑을 맘껏 권장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러나 이 세계를 들여다본 우리는 안다. 이곳은 어쩌면 창살 속이다. 네 벌의 똑같은 복장이 주어지듯, 누군가 정해 놓은 획일화된 선택지만이 주어진다. 어떠한 정체성도 획득할 수 없는 이들은 기계적인 언행으로 짝을 찾는다. 이 세계의 사랑은 오로지 공통점 즉, ‘같음’만을 용인한다. ‘같음’의 사랑은 표본처럼 박제되고 전시되며, ‘다름’은 곧 동물로의 변신으로 세계로부터 배척된다. 이곳에서의 사랑은 결국 생존을 위한 수단이며, 이를테면 노동이다. 그조차도 금지된 숲속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세계에서 금지된 것은 결국 ‘사랑할 자유’다. ‘사랑할 자유’, 이는 ‘사랑하고 싶을 때 사랑할 자유’와 ‘사랑하고 싶지 않을 때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모두 내포한다. <더 랍스터> 세계가 정의하는 사랑은, 그래서 ‘사랑’이 아니다.      


“이 무슨 고된 직업을 나는 택했단 말인가!”『변신·시골의사』, 민음사, 10p
그들은 그의 방을 말끔히 치워버렸다. 그가 아끼던 모든 것을 그로부터 앗아갔다.『변신·시골의사』, 민음사, 49p

『변신』에서도 사랑은 정말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다. 홀로 가족을 부양하느라 노동으로 허덕이는 그레고르 잠자의 삶엔 사랑이 개입될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어느 날 아침 갑충으로 변신해 버린 탓에, 가족으로부터의 애정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나마 먹다 남은 우유나 음식 따위를 공급해주던 누이동생도 이제 그를 ‘이것’이라 부른다. 이곳, 잠자의 방은 철저히 창살 속이다. 그레고르는 이제 그 어느 곳에서도 소외되고 배척된다. 이 세계 또한 ‘사랑할 자유’는 용납되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 외에도 자신의 작품에 동물을 자주 등장시켰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생전 구스타프 야누흐와의 대화에서 ‘우리에게 동물이 인간보다 더 가깝다’며 ‘우린 모두 자기가 짊어지고 가는 창살 뒤에 살고 있다’고 말한 적 있다. 카프카에게 이 세계는 (<더 랍스터>와 『변신』 의 세계처럼) ‘사랑’이 금지된 감옥이다. 프라하에서 태어난 유대인 작가 카프카, 그가 평생을 소망했던 것은 프라하로부터의 탈출이었다. 그에게 세계는 그 어떤 정체성도 쥐여 주지 못했다. 체코인, 독일인 등 다민족으로 구성된 당시 프라하 사회에서 유대인은 소수 집단일 수밖에 없었고, 유대인이라는 정체성마저 이미 서방 세계에 동화된 집안 탓에 모호한 위치를 취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그의 정체성을 가장 흐린 존재는 아버지였다. 카프카에게 아버지는 평생 그를 옥죄는 간수였다. 프라하의 상류층이 되고자 했던 아버지는 늘 카프카가 미덥지 않았다. 글쓰기와 예술을 즐기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하물며 그와 어울리던 극단 배우에겐 ‘갑충’이라는 폭언을 퍼부었다. 이러한 수모를 당하며 27일 만에 완성한 작품이 바로 『변신』이다. 이처럼 카프카는 ‘다름’으로부터 비롯한 소외와 배척을 온몸으로 체험한 작가였다.


“눈이 멀면 다른 감각이 더 살아난대.”
음악이 그를 이토록 사로잡는데 그가 한 마리 동물이란 말인가?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66p

그런 카프카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세 번의 약혼과 세 번의 파혼 전력, 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네 번의 사랑. 가령 그가 펠리체 바우어나 밀레나에게 보낸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낸 정열과 낭만, 절망과 이상, 그리고 고뇌에서 짐작건대, 그에게 사랑은 마치 ‘탈출’이었을 테다. 한번 사랑에 빠지면 크게 열광적이었던 카프카. 그에게 삶과 창작의 원천은 결국 사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소설 『변신』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레고르 잠자가 갑충으로 변신한 것은 노동과 가정, 곧 세계로부터의 탈출이라고. 그레고르가 ‘마귀나 와서 다 쓸어가라’던 ‘여행의 고달픔’, 이를테면 ‘기차의 접속에 대한 걱정, 불규칙적이고 나쁜 식사, 결코 정들지도 못하는 인간관계’로부터의 탈출이라고. 그레고르가 갑충으로 변신함으로써 또 다른 창살에 갇혀버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갑충으로서 그는 처음으로 자기 내면의 감정과 감각에 충실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사랑에까지는 이르지 못했으나, 노동을 거세한 갑충은 어쩌면 인간일 때보다 인간다운 내면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더 랍스터>와 『변신』, 이 두 세계를 지배하는 공통 규칙은 결국 ‘사랑할 자유’의 박탈이었다. 사랑할 자유의 박탈은 곧 ‘다름’의 배척이고, ‘정체’의 배제이며, 감정의 ‘소외’이자, 곧 ‘나’의 소멸이다. 그러므로 <더 랍스터>의 데이비드는 박탈된 자유를 찾으려 탈출에 탈출을 감행했고, 『변신』의 그레고르도 벌레로의 변신을 통해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의 탈출이 끝내 혁명으로는 이뤄지지 못했다. 탈출의 끝에서 데이비드는 나이프로 눈을 찔러 스스로 시력 잃은 랍스터가 되려 하고, 그레고르는 가족들이 떠난 집에서 말라비틀어진 죽음을 맞이했다. 사랑을 갈망했지만 사랑에 붙잡히는 걸 두려워했던 카프카 역시도 세 번의 파혼 끝에 신경쇠약으로 요절하였다. 이 세 세계는 본질적으로 매우 닮아 있다. 그들이 극복하지 못한 건 ‘다름’이 말살된 디스토피아였다. 데이비드는 연인을, 그레고르는 가족을, 카프카는 아버지를 견디지 못했다. 세계 속에서 그들만의 온전한 사랑의 정의를 갖지 못했다. 



사랑의 정의 사랑은 도끼여야 한다



그럼, 나는 이제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세계에 되묻는다. 우리 세계는 과연 <더 랍스터>와 『변신』의 우화적 세계와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이곳에 사랑은 아직 유효한가? ‘노동’의 굴레 속에서 강박적으로 ‘짝’을 찾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 나는 이것이 바로 이 세계가 정의한 사랑의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이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사랑은 번번이 소외되고 배척된다. 그 타성에 젖어 이따금 우린 이 세계의 시스템에 안착하기 위한 기계적이고 의무적인 사랑을 저지르기도, 그 속에서 때론 연인에게서 공통점을 찾아야만 한다는 착각을 하기도, 더 나아가 ‘다름’을 간과한 채 이기심을 내비치기도 한다. <더 랍스터>에서 시력을 잃은 여자는 “왜 내 눈을 멀게 한 거야? 그를 멀게 할 수도 있었잖아”라고 외친다. 데이비드는 변신의 주체로 랍스터를 택하며 그 이유로 ‘100년을 넘게 사는 것’을 꼽는다. 이러한 장면들이 우리에게 유독 씁쓸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그 세계’에만 해당하는 우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계의 사랑도 단지 생존의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게 아닐까. 사랑이란 마치 (<더 랍스터>의 포스터가 보여주듯) 우리가 애써 끌어안고 있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한 게 아닐까. 철학가 한병철에 따르면 이곳은 규율사회를 넘어 에로스가 종말한, 사랑이 위기에 처한 성과사회다. 우리의 세계에 정말 ‘사랑할 자유’는 있을까.


그런데 지금 모든 고요, 모든 유복함, 모든 만족이 졸지에 충격으로 끝나버린다면 어떨까?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33p
최소한 그레고르가 지금 빈틈없이 가리고 있는 이 그림만은 분명 그 누구도 빼앗아가지 못하리라. 『변신·시골의사』, 민음사, 50p

우리에게도 ‘탈출’이 필요하다. 세계가 정의한 사랑의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탈출. 언제까지 세계와 시스템을 비관하며 냉소만 짓고 있을 수 없다. 나는 이 세계가 사랑에서 태생했고 사랑으로 안착했다고 믿는다. 그런 세계에 사랑이 위협받고 있다. 사랑마저 시스템 속에 갇혀 버렸다. 세계가 자꾸만 사랑을 집어삼키려 한다. 우리는 사랑의 편에 서서 그를 구해야 한다. 이곳에서 ‘사랑할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랑의 이데올로기로부터 탈출하고 더 나아가 각자만의 사랑의 정의를 가져야 한다.

이 세계에 사랑만큼 비정형적이고 비논리적인 현상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우연을 먹고 산다. 그래서 사랑은 반反시스템적이다. 어쩌면 그것은,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카오스chaos다. 카프카는 이렇게 말했다. 책은 우리 내면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그의 말을 빌려, 나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자 한다. 사랑은 이 세계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어느 순간 폭력적인 규율처럼 자리 잡은 사랑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로부터 ‘사랑할 자유’를 박탈한다면, 나는 우리 각자가 재정립한 사랑의 정의로 이를 깨부숴야 한다고 믿는다. ‘짝을 찾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정의한 사랑 중 하나여야 한다. 사랑은 강제적일 수 없고, 독점적일 수도 없으며, 배타적일 수도 없으니까. 사랑이야말로 만인의 것이니까. 우리는 사랑하고 싶을 때 언제든 맘껏 사랑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가 각자의 정의로 쟁취한 ‘사랑할 자유’가, 역설적으로 우리를 세계로부터 구할 것이다.



여기까지의 역설, 이것이 바로 나만의 온전한 사랑의 정의다. 각자가 떠올리는 사랑의 정의는 모두 다를 것이다. 결국 사랑은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나는 서로가 정의한 사랑에 대해 존중할 줄 아는 세계야말로 유토피아에 가장 근접한 곳이라 믿는다. 잠시 영화 <더 랍스터>의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데이비드와 연인이 두 개의 다른 CD플레이어로 동시에 같은 음악을 듣는 모습. 이게 바로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정의한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란 각자 존재하면서도 함께하는 것이라고. 이제 나는 당신만의 사랑의 정의가 궁금하다. 누구든 ‘어느 날 아침’ 동물로 변신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위기의 세계에서, 그것만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당신의 것이니까. 



Epilogue.

사랑의 의미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당신에게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세계가 미움으로 향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 만연한 미움의 세계에서 어느새 내 마음속에도 뿌리 내린 미움의 싹이 자라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도 있다. 이 순간에도 사랑의 테두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니. 이런 아비규환 속을 살아가다 잠시 삶의 의미를 잃기도 했고, ‘정말 여기에 사랑이 자리할 수 있기나 할까’하는 회의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집요하게 영화에서, 책에서, 음악에서 사랑 이야기를 찾았다. 마냥 선할 수만은 없는 인간 세계에서 저만치 희미하게 윤을 내는 구원의 빛은 언제나 인간이 보여주는 사랑이었다. 그 빛이 나를 내 마음 깊은 곳의 사랑으로 이끌었고, 그곳에서 이 글을 끄집어냈다.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도 삶의 의미를 잃지 않고 살아낸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유해하고 부조리한 세계에서 살아낼 수 있는 삶의 의미, 내게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사랑으로 살아가며,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배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삶의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사랑만으로 이 세계를 온통 끌어안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견뎌낼 순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세계에 살아가기로 한 이상 혼자일 수만은 없는 삶을 사니까. 그래서 나는 사랑의 힘을 믿기로 했다.

인간은 무엇으로, 무엇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가. 나의 대답은 이렇다. 사랑.



진상명

독립잡지 gusto 4호_변신 '영:감' 중에서

https://www.tumblbug.com/gust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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