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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un 16. 2020

우린 꼭 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영화 <4등>과 <죽은 시인의 사회>을 빌려

* 본문은 아래 글과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3mon9/31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너 어떻게 살려고 그래, 꾸리꾸리하게 살 거야 인생을?”


내 어린 시절을 조금만 더 이야기해볼까. 9살, 그러니까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름 촉망받는 ‘모범생’이었던 나는 아마 어머니의 자랑이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교 2학년 시험이 뭐 그리 별거라고 학부모들 사이에서 기 싸움을 벌였는지, ‘올백’은 어머니의 어깨를 하늘까지 올릴 수 있는 효의 일부였다. 초2에게 ‘모범생’의 기준은 한두 문제로 판가름 났다. 스무 문제를 다 맞거나 하나를 틀려야만 그 별난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하필 방과 후 학부모회가 있던 어느 날, 그날 치른 수학 쪽지시험이 날 평생토록 괴롭혔다. 9년 인생 최초로 ‘75점’이란 점수를 받은 거다. ‘스무 문제 중 다섯 문제만 틀린 거면 잘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 당시 ‘모범생 진상명’이 75점을 받은 건 세간의 이슈였고 그야말로 충격 뉴스였다. 그 점수가 아무것도 모르고 학부모회에 간 나의 어머니를 부끄럽게 할 줄은 몰랐다. 내 점수를 미리 알고 있었던 ‘9살 진상명’은 학부모회에 다녀온 어머니가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 내게 다가오기 전까지 침대에 코를 박고 엉엉 울었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얼굴로 어머니는 내게 이런 말씀하셨다. “너 뭐가 되려고 그래?” 다행히 우리 어머니는 그리 극성 학부모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고작 쪽지시험에서 다섯 개 틀린 경험이 내 인생을 뒤흔든 사건 중 하나가 돼버린 게 조금 웃기다. 그날 이후로 난 아직까지 수학이 정말 싫다.

“저도.. 제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어요.”

영화 <4등>(4th Place, 2015)은 매번 대회에서 4등만 하는 수영 꿈나무 준호(유재상 분)의 이야기다. 천부적 재능이라기엔 조금 못 미치나, 포기하기엔 메달권이 코앞인 등수 4등. 4등은 그래서 가장 저주받은 등수다. 준호의 엄마(이항나 분)는 미칠 노릇이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게 안 되니까. 여기서 ‘조금만 더’라는 생각이 무서운 집착을 부른다. 

“우리 준호 메달 따야 돼요. 우리 준호 메달 따면 나 영생을 얻은 것 같은 그런 기분일 것 같애”
“애가 상처 받을까 봐 그래.”
“나 그 상처, 메달로 가릴 거예요.”

준호 엄마는 결국 16년 전 아시아 신기록까지 달성한 국가대표 코치 광수(박해준 분)에게 준호를 맡긴다. 광수는 체벌과 폭력이 성적을 올린다고 믿는 사람이다. 마른 준호의 몸에 거친 매질을 해대는 광수, 애처롭게도 준호는 쫓기듯이 2등을 해내고 그렇게 폭력은 무섭게 정당화될 조짐을 보인다. 우주에서 온 햇살을 만지듯 유영하던 준호는 언제부터 폭력이 두려워 쫓기듯 잠수를 했을까. 그토록 수영을 사랑하던 준호는 수영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고, 준호의 삶에 매달려 있던 엄마는 세상을 잃는다.

“맞고 싶지 않습니다.”
“때리지도 않고 맞지도 않으면서 잘하는 게 중요하고, 과정이 중요하댔습니다.”


준호는 영화에서조차 보기 드문 기특한 아이였다. 레인이 아닌 빛을 따라 헤엄치던 준호는 비로소 깨닫는다. 나는 수영에 소질이 있고,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것을. 내가 두려워했던 건 수영이 아니라 쫓기듯이 잠수했던 거였단 사실을. 엄마의 채찍에도, 코치의 매질에도 쫓기지 않고서야 1등을 거머쥔다. 사실 1등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준호 스스로가 폭력의 굴레를 끊었다는 것이고, 스스로 본인이 사랑하는 것들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폭력은 정당화되고 마는 순간 수레바퀴처럼 반복되고 대물림된다. 그것은 물리적인 폭력은 물론 정신적인 폭력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 1989)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는 정말 많은 부분 닮아 있다. 높은 학구열의 명문 학교 기숙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임은 물론, 극성에 치달은 부모님들의 교육열, 투쟁과 낭만을 꿈꾸는 학생들, 쓸쓸히 죽어가는 시인들, 심지어는 ‘죽은 시인의 사회’ 클럽과 ‘가시다람쥐’ 신문도 닮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분명히 닮아 있는 점은 주인공에게 정신적인 폭력이 가해지고 있다는 상황 자체일 거다. 

“학생들이 예술가가 되도록 부추기는 건 위험한 일이요.”
“예술가가 아니라 자유로운 사색가가 되라는 거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새롭게 부임한 영어 교사 존 키팅(로빈 윌리엄스 분)은 학생들에게 ‘캡틴’으로 불린다. 그는 시와 미를 가르치고, 낭만과 사랑을 가르친다. 투쟁과 야성을 일깨우고, 삶과 인생을 되묻는다. 하지만 매년 75%의 학생들을 아이비리그에 진학시키는 명문 ‘웰튼 아카데미’에서, 시는 무생물이요 낭만은 허구다. 키팅 선생은 동료 교사로부터, 학부모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를 받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학생들의 가슴 속엔 죽은 시인의 숨이 붙기 시작한다.

“화려한 연극이 계속되고 네가 시 한 편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여러분의 시는 어떤 것이 될까?”


우리는 그중 닐 페리(로버트 숀 레너드 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닐 페리는 누구보다 가쁜 날갯짓을 하던 학생이었다. 의사가 되길 바라는 아버지(커트우드 스미스 분)의 강압 아래서도 밝음과 열정을 잃지 않던 소년이었고, 키팅 선생님을 만나 비로소 내면의 꿈과 낭만을 움튼다. 그러나 닐 페리는 명백히 희생당하고 만다. 아버지에게 자신의 꿈이 틀리지 않았음을 당당히 인정받고 싶다던 소년의 정의로운 투쟁은 무참히 짓밟힌다. 꿈과 낭만, 투쟁과 야성, 그 어느 것 하나도 인정받지 못한 소년은 최후의 가쁜 날갯짓으로 죽음의 영역에 몸을 내던진다.

‘깊이 파묻혀 삶의 정수를 빨아들이며 살고 싶었다.
삶이 아닌 것을 모두 떨치고 삶이 다했을 때 삶에 대해 후회하지 마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

닐은 마치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와 하일너를 섞어놓은 인물처럼 보인다. 시를 사랑하며 나름대로의 사고와 언어로 자유분방한 열정을 소유했으나, 결국은 무한한 수레바퀴의 굴레 아래서 짙은 우울과 함께 무력한 죽음으로 내려앉는다. 낚시를 즐기고 토끼와 자연을 사랑하던 한스는 어쩌다 차가운 강물 속의 검푸른 주검이 되었나. 하일너는 어떠한가. 한스를 떠나 어느 순간부터 소설 속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 하일너는 ‘소설로서의 죽음’을 맞이한다. 거대하게 자리 잡은 수레바퀴 아래서 ‘캡틴’ 키팅도, ‘낭만주의자’ 하일너도 누군가의 완벽한 ‘데미안’이 되지 못한 채 떠남의 숙명을 맞이한다.

“어머니도 없이 엄격한 소년시절을 보내야 했던 한스는 사랑할 수 있는 기질을 잃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겉으로 드러나는 열정에 대하여 일종의 두려움을 느꼈다.” (<수레바퀴 아래서>, 103p, 민음사)

우리는 모두 <4등>의 준호, <죽은 시인의 사회>의 닐 페리와 함께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와 하일너에게 동등한 빚을 지고 있으며, 또한 동시에 무거운 수레바퀴를 진 희생양이다. 매일같이 원인 모를 두통과 무도병을 앓고서, 끝내 누군가를 사랑할 수조차 없는 사랑의 불구가 되어버린 한스의 모습은 우리의 보편적인 모습과 닮아 있다. 아니, 어쩌면 지금의 세대는 더 슬픈 숙명을 타고난 것처럼도 보인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시달려야 하는 ‘꿈 강요, 열정 강박’ 시대에서 지금의 세대는 자유를 더 불안하게 느끼고 스스로 수레바퀴 아래에 갇히길 바란다. 이는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여기는 청년들의 상실감일 것이다. 수많은 선택지에서 자신의 숙명을 정해줄 사회에 속박당하길 바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린 여기서 다시, 영화 <4등>을 떠올릴 수 있다. “너 뭐가 되려고 그래?”라는 질문에 우린 “꼭 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라고 되물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린 꼭 뭐가 되기 위해 살아가는 게 아니다. 우리의 젓가락질이, 우리의 걷는 모양새가 다 다른 것처럼 우리는 무엇보다 각자의 ‘나’를 잃지 말아야 한다. 스스로 폭력의 연대를 끊고 ‘나’를 되찾은 <4등>의 준호처럼 우리 스스로가 무겁게 돌아가는 수레바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은 시인의 사회>의 비극과 <수레바퀴 아래서>의 비극은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의 저자 헤르만 헤세도 생애 ‘데미안’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고 한다. 결국 <데미안> 속 ‘데미안’이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타인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향해 투쟁하는 ‘나’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나는 아직 이 세상의 낭만이 있다고 믿는다. 무참한 수레바퀴 아래서 우리는 데미안을 외부에서 필사적으로 찾지 않아도, 투쟁하는 ‘나’가 모여 영원히 죽지 않을 시인의 사회를 꿈꾼다. ‘나’에게로의 그 투쟁이 우릴 구원할 낭만적인 사회로 향할 거라 믿는다. 앞으로도 매년 이곳에선 수레바퀴의 시작을 알리는 지루한 백파이프가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시인의 죽음을 추모할 것이다. 잿빛 세상에도 여전히 사랑이 있고 낭만이 있으며 시인은 살아 숨 쉬고 있으니,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투쟁해온 지난 모든 세계를 추모할 것이다. 이러한 나의 믿음으로 비로소 이 삶이 다했을 때, 나는 기쁘게 이 삶을 추모할 것이다.


진상명

독립잡지 gusto 3호_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영: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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