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몬스터 콜>과 <블랙 스완>을 빌려
“넌 왜 늘 딴 세상에 가 있냐?”
깊은 눈을 가졌달까. 크나큰 상실의 알에서 깨어난 자의 눈은 깊어진다. 코너(루이스 맥더겔 분)의 눈이 꼭 그랬다. 영화 <몬스터 콜>(A Monster Calls, 2016)의 주인공 코너는 상실을 준비하는 소년이다. 나의 세계의 온통이었던 엄마(펠리시티 존스 분)의 손을 놓아주어야 할 때를 앞두고 있다. 드리워지는 엄마의 그늘 아래 빛을 잃어가던 소년은 매일 반복되는 어떤 꿈을 앓는다. 그것은 무너지는 세계의 절벽에서 자신이 엄마의 손을 자꾸만 놓치고 마는 꿈. 현실에서도 이대로 영원히 엄마의 손을 놓아버리는 것은 아닐지, 소년은 죄책감으로 하루를 삼킨다.
“벌 안 주시는 거예요?”
12시 7분, 소년은 거대한 괴물의 부름을 마주한다. 괴물이 들려주는, 마치 충격요법과도 같은 세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소년은 비로소 죄책감으로 곪은 환부를 드러낸다. 동급생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할머니의 집을 산산조각 깨부술 때도, 꿈에서 엄마의 손을 놓쳐버릴 때도, 소년은 항상 먼저 벌을 갈구하고 있었다. 자신을 ‘나쁜 아이’로 규정 짓고는 언제나 벌을 갈구하던 소년. 그러나 세상은 결코 선악과 상벌의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님을 들려주는 괴물의 이야기에 코너는 이른바 ‘나쁜 아이 콤플렉스’를 극복한다. 상처는 늘 흉하고 고통스럽지만 드러내고 들여다봐야 아문다. 꿈에서 자꾸만 엄마의 손을 놓던 코너는, 이제 현실에서 엄마의 손을 끝까지 놓지 않음으로써 나의 한 세계의 온통을 떠나보낸다.
그렇게 한 사람의 눈은 깊어진다. 한 세계가 휩쓸고 간 자리에 깊게 새겨진 눈은 이제 새로이 다가올 세계를 응시한다. 홀로 투쟁할 세계에 대해, 더 큰 고통을 안겨줄 세계에 대해. 이미 깊은 눈을 가져버린 자는 타인의 깊은 눈동자를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코너를 연기한 배우 루이스 맥더겔은 실제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떠나보낸 경험이 있다. 알 껍질 속에서 상실을 앓던 맥더겔에게 코너는 투쟁의 동료였을 테요, 괴물은 꿈속의 압락사스였을 게다.
“아주 이상한 꿈을 꿨어요.”
꿈과 투쟁을 얘기할 때,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도 빠뜨릴 수 없다. ‘백조의 호수’의 주인공이 된 니나(나탈리 포트만 분)의 꿈으로 우리를 맞이하는 오프닝 시퀀스. 니나의 검은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을까.
“네 흑조를 보여줘 봐.”
“욕망을 분출해. 우리를 유혹하라고.”
니나가 속한 뉴욕 발레단의 단장 토마스(뱅상 카셀 분). 무용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그가 구상하고 있는 새로운 ‘백조의 호수’는 사실 백조보단 흑조가 주인공이다. 마법사의 저주로 백조의 몸에 갇힌 여자를 구해줄 왕자가 나타났지만, 욕망에 눈먼 쌍둥이 자매 흑조가 왕자를 유혹하고 절망한 백조는 결국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어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는다는 이야기. 토마스는 백조와 흑조를 모두 갖춘 얼굴을 원한다. 완벽한 백조의 면모를 갖췄지만, 토마스의 말마따나 흑조라기엔 아직 ‘아름답고 겁 많고 연약한’ 니나. 그녀는 이제 내면의 알을 깨고 서서히 어둠의 욕망과 본능을 분출한다.
“본능을 즐기라고”
“배역의 틀을 벗어나야 해”
“널 가로막는 사람은 바로 자신뿐이야. 너 자신을 버려.”
말하자면 (마치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처럼) 니나에게 이단의 선구자가 된 존재는 단장 토마스와 니나의 라이벌 릴리(밀라 쿠니스 분)일 테다. 어머니(바바라 허쉬 분)의 그늘 아래 빛을 내던 곱상한 백조였던 니나는, 두 사람의 속삭임 아래 어둠 속의 우아한 흑조의 날개를 돋아낸다. 빛에 가려졌던 그림자가 욕망의 날갯짓을 펄럭이는 순간이다. 이단을 향하는 욕망은 이다지도 달콤하다. 토마스와 릴리는 니나에게 트리거를 쥐여 줬을 뿐이고, 욕망의 싹은 사실 일찍이 내면에서 열병처럼 움텄다. 욕망의 투쟁은 그래서 달콤한 착란이다. 저주를 풀고 자유를 얻기 위해 왕자의 사랑이 필수 불가결했던 ‘백조의 호수’는 구시대적이다. 흑조의 얼굴을 갈망하던 니나는, 무엇보다 나의 세계를 탐구하고 스스로 그 세계를 짓부수어 완벽히(“I was perfect.”) 자유를 쟁취한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는가? 그녀는 완벽히 자유로워졌고, 동시에 예술로서 완벽히 박제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결말부는 가히 경이롭고, (아이러니하게도) 신성하기까지 하다. 말미에서 싱클레어가 이제 데미안을 찾지 않아도 나 자신의 모습에서 그와 완전히 닮아 있는 합일의 경지에 이른 것처럼, 니나 또한 비로소 백조와 흑조 두 가지 얼굴을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이는 영화 <몬스터 콜>에서 내면의 괴물과의 합일을 통해 깊은 눈을 갖게 된 코너의 이야기와도 일맥상통한다. 니나와 코너, 그리고 싱클레어는 그렇게 각자의 ‘데미안’을 앓고서, 또한 그렇게 데미안이 된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헤르만 헤세)
이단의 욕망은 늘 달콤했다. 이건 내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다. 모두가 불철주야 대학 입시만을 바라보던 무기력한 어느 날, 국어과에선 삭막한 학내 분위기에 밝은 생기를 되찾아보겠다며 ‘시화전(詩畫展)’을 연다고 했다. 이제 와선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당시의 나는 시스템 아래 학교의 삭막한 관성은 도저히 바뀔 수 없는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에 이 시화전 공모(公募)는 내게 오히려 어두운 관성을 애써 감춰보려는 겉치레 교화처럼 느껴졌고, 그날 밤 난 펜을 휘갈겨 시 하나를 출품했다. 제목은 ‘검은 피’. 정확한 시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우리들 손에 수갑처럼 매여 있는 펜 속의 검은 잉크가 마치 건강치 못한 검은 피와 닮아있고 이는 곧 죽음과 같다’는 귀여운(?) 발상을 담았던 듯하다. 밝고 희망찬 시와 그림으로 가득할 이 기만적인 전람회에 대한 나의 소심한 훼방이자, 일종의 반항심이었다. 다음 날 예상대로 국어 선생님께선 날 교무실로 부르셨고, 내 시를 두고 “불경스럽다”, “심의위반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어쩌면 기분 나빴을 법도 한데, 나는 도리어 짜릿했다. 권력이 경악할 만한 불온서를 세상에 내놓은 듯한 기분이었다. 싱클레어가 아버지의 신성함에 첫 칼자국을 긋고서 느꼈던 우월감이란 과연 이런 것이었을까. 내 시는 결국 숙명처럼 정말 ‘죽음’을 향했고, 그 시화전은 가짜 생기가 우글거리는 전람회로 기억된다. 그때부터 난 줄곧 나를 짜릿하게 하는 글을 좇았다.
내가 존경하는 한 글쟁이는 <데미안>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데미안>만 읽은 독자는 위험하다고. 선과 악, 빛과 어둠, 신과 악마가 한데 섞인 이 소설은, 양쪽의 균형이 맞아야 하는 새의 날개 중 한쪽에만 크게 치우친 반(half) 성장소설이라고. <몬스터 콜>의 코너, <블랙 스완>의 니나, <데미안>의 싱클레어가 비로소 두 세계를 모두 끌어안을 수 있었던 건 기존 세계의 통증을 온전히 앓았기 때문이다. 이단의 욕망은 언제나 달콤하다. 그래서 대개 위험하다. 누구에게나 친애하고 동경하는 나의 ‘괴물’이 있을 테고, 나의 ‘흑조’가 있을 테며, 나의 ‘압락사스’가 있을 테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 세계를 끌어안기 위해서는 우린 먼저 이 지금의 세계에서 부단히 투쟁하는 새가 되어야 한다. 투쟁의 자국만이 이단의 욕망과 손을 맞잡을 수 있다.
진상명
독립잡지 gusto 3호_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영:감' 중에서
* 아래 글과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