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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상명 Jul 15. 2021

‘믿음’의 세계와 ‘그냥’의 세계

영화 <랑종>과 <곡성>을 빌려

아주 어린 시절, 나는 어떤 무력한 불행을 떠안았다. 그때부터였나. 아주 간절히도 신을 믿었다. 내가 떠안은 불행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빌었고, 내일이면 말끔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그러나 삶의 속성은 늘 이랬다. 불행이 상대적이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절대적이라면 불행은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불행이 왔을까?’ 원망이나 질책은 아니었다. 정말 궁금했다. 신이 있다면 굳이 그를 진심으로 믿는 자에게 불행을 안겨줄 이유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자연스레 이런 질문을 파생했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여느 때처럼 신앙인들과 성서 공부를 하던 도중, 내가 불쑥 물었다. “신이 있다면 어디에 있으려나요?” 대답은 곧장 나왔다.     


“당신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고 싶었지만 괜한 가슴 부근만을 문지르며 말을 아꼈다. 그날 이후 작고 많은 물음이 태어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나는 오래도록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어쩌면 한편에 의심을 묻어둔 채.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지금의 나는, ‘이 세계에 왜 이토록 많은 신이 있(다고 믿)는가’에 관해 오래 생각했다. 알다시피 우리가 아는 종교만 해도 종류가 여럿이며, 그 안에서 신은 정말 다양하게 존재한다. 왜, 이 세계에 왜 이토록 신이 많은가. 나는 다시 내가 신을 처음 믿게 된 계기를 떠올렸다. 불행. 주위엔 어찌 설명할 수도 차마 믿을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만연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구든 언제든 그 어떤 이유도 없이 불행을 떠안은 피해자가 발생한다. 그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신을 믿는다. 믿을 수 없는 것들의 도처에서, 믿어야만 하는 것들이 생긴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불행에는 악신惡神이 있고, 선신善神이 그로부터 우릴 구원해줄 거란 믿음. 믿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의 이유는 ‘그냥’이 된다. 그럼 우리는 땅에 지르밟힌 개미처럼 ‘그냥’ 당하는 존재와 다를 바 없다. 무력이라는 불행을 평생 떠안을 바엔, 무참한 불행을 피할 수만 있다면 믿음에 의지하는 쪽을 택한다. ‘그냥’의 굴레를 믿고 싶지 않기에 각자의 방식으로 믿고 있는 신. 그렇게 이 세계엔 수많은 신이 존재한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인간에게도 절대적으로 불행은 찾아온다. 그러면 몇몇의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피어오른다. “왜 하필 나지?” 이어, 이런 마음을 품을지도 모른다.     


‘내가 믿는 것이 정말 실재하는가?’     


의심이다. 믿음의 세계에서 모든 파국은 이 의심으로부터 촉발한다. 이 세계의 불행이 ‘그냥’의 원리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면, 원인은 나로부터 있는 것이다. 단단하지 못한 믿음, 어느새 자리잡은 의심. <랑종>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한다. 밍(나릴야 군몽콘켓 분)은 랑종의 삶을 비웃었고, 님(싸와니 우툼마)은 믿음을 흔드는 질문 하나에 무너졌으며, 노이(씨라니 얀키띠칸 분)는 믿음의 삶을 거부했다. 그뿐 아니라, 감히 신의 영역과 현상을 끝까지 목도하려 했던 카메라. 어쩌면 이 불쾌한 것은 <랑종> 속 모든 불행을 그저 바라만 보는 신이 되고자 욕망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이 세계의 불행이 ‘그냥’의 원리로 작동한다면, 밍과 님, 노이를 비롯해 <랑종> 속 모든 비극은 ‘그냥 일어난 일들’이 된다. 노이는 개를 키우면서 개를 솥에 담가 팔면서 “이건 경우가 다르다”고 말했다. 인간의 식용을 목적으로 무작위의 개가 ‘그냥’ 죽은 거다. 같은 방식으로, 노이가 어릴 적 겪은 기이한 현상, 밍과 님이 겪는 불행들의 원인은 없게 된다. 신을 믿지 않아서도, 신에게 의심을 가져서도 아니다.

‘믿음’의 세계와 ‘그냥’의 세계. 우리는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불행의 도처에서 두 세계 중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간다. 역사적으로 많은 인간이 후자의 세계를 견디지 못하고 전자의 세계를 택하여 우리는 지금 여러 모습으로 신을 섬기고 있다. 

그럼 이제 다시, 내가 나의 첫 번째 질문을 되물을 차례다.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지금까지의 나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신이란 믿으면 존재하는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곡성>에서 보여준 것처럼, 신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믿지 않는 자 혹은 의심하는 자는 결국 그 존재를 알아보지 못할 테니까. 만약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혹여 숙명일지도 모를 ‘의심’을 가장 경계하며 살아가야 하고, 믿지 않는다면 무작위의 불행 앞에서 ‘그냥’이라는 무력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혹자가 묻는다. 내가 무신론자냐고?

그 대답은 이미 이 글에 담겨있다.

아니, 그보다 중요한 질문이 당신에게 있다.     


당신은 신의 존재를 믿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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