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조너선 글레이저의 연설
기이한 현상을 체험했다. 목도했다고 표현하는 게 더 적확할 것이다. 이 영화를 아주 좁은 상영관의 가장 앞 열에서 본 건 우연이었다. 그 우연 때문에 나는 큰 스크린에 얼룩처럼 묻은 정체불명의 점이 거슬렸고, 스크린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영화관 직원들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그 우연 때문에 나는 고개를 바짝 쳐들고 목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스크린을, 그 벽을, 그 암흑을. 얼룩 때문인지, 착시 때문인지, 아우성치는 암흑으로 시작한 스크린을 뚫어져라 쳐다보니 그 거대한 벽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시야를 꽉 채우더니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와 나를 덮칠 듯했다. 아무래도 이상해 끄트머리를 보니 스크린 크기는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방금 그 현상은, 파도치는 바다에 들어가 한참 멍하니 쏘아보면 그 거대한 것이 마치 날 집어삼킬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다. 나는 스크린 속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불쾌한 우연으로부터 이 영화에 압도된 것이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과거 홀로코스트 비극을 다룬 이 영화를 두고 ‘현재성’을 강조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말. 그는 지난 3월 오스카에서 국제장편영화상을 받은 뒤 미리 준비한 연설문을 읽었다. 손을 벌벌 떨며 문장을 외치는 그 모습은 오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내용은 이렇다.
“우리의 모든 선택은 현재 우리 자신을 반영하고 대면하게 합니다. ‘그때 그들이 한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을 보라는 의미죠. 우리 영화는 비인간화가 최악으로 치닫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 정체성과 홀로코스트가 무고한 이들을 희생시키는 점령에 오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이스라엘 희생자든, 가자 지구에서 자행 중인 공격으로 인한 희생자든, 모두 비인간화의 희생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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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계 영국인인 조너선 글레이저의 ‘가자 지구’ 발언은 파장을 낳았다. 일부 유대인 사회에서는 글레이저를 향해 ‘최악의 자기혐오 유대인’이라 비난했고, 미국 홀로코스트 생존자 재단에서도 적합한 비유가 아니었다며 비판했다. 그는 그 모든 뭇매가 자신을 향할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발언 이후 모든 투자자들이 등 돌릴 가능성도 염두에 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떨리는 손과 목소리를 붙들면서까지 그 메시지를 외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글레이저는 연설에서 모든 주어를 ‘우리’로 표현했다. 유일하게 ‘그들’이라 표현한 건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유대계 혈통’인 것과는 별개로, ‘하마스가 자행하는 폭력에 이스라엘군의 행위가 정당했는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보자는 외침. 우리는 정녕 과오를 반복하는 게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위해 행동하고 있냐는 물음. 범인류적 차원에서 ‘우리’는 떳떳한가. 글레이저의 연설은 이것을 말하고 있었고, <존 오브 인터레스트>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과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과거를 또렷이 응시해야 하는 이유. 그것은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성’에 있다. 다시 이 영화에 고개 쳐들고 있던 A열의 나로 돌아와보자. 내가 바라본 그 암흑 너머엔 무엇이 있는가. 아마 과거가 도사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벽 뒤로, 스크린 속으로 도망치고 사라지려는 이들을 기어코 끄집어내는 소리들이 있고 그들을 다시금 이곳으로 불러 세운다.
벽을 사이에 두고 낙원과 음부가 존재한다는 것. 벽은 평화로워 보이는 어떤 가족을 목도하고 있고, 그 벽은 재앙과 혼돈 속에서 질식하고 있는 어떤 가족도 목도하고 있다. 벽 너머엔 천국을 누리는 ‘그들’이 있고, 또 다른 벽 너머엔 지옥으로 내몰린 ‘우리’가 있다. ‘그들’은 벽 너머를 애써 못 본 척하지만, ‘우리’는 벽 너머를 처절히 응시하고 있다. 포도를 심고 장미를 피워도 코를 풀면 시커먼 잿물이 나오고, 일말의 인간성이 남아 (이동진 평론가의 표현을 빌려) 헛구역질을 해도 게워내지 못하고 이미 소화된 그들은 누구인가.
그 모든 것을 목도한 뒤 다시 암흑이 펼쳐진다. 관객 앞에 세워진 그 벽이, 암흑이, 스크린이 덮치려는 듯 쳐다보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도 비명과 체온이 분명히 느껴진다. 불현듯 스치는 수많은 사건들과 미결의 현재가 재생된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을 목도한 우리들은 우리 앞에 놓인 벽을, 암흑을, 스크린을 보며 그 너머를 떠올려야 한다. 아득바득 상상해야만 한다. 그것이 결국 우리가 이 영화를 목도하는 방법이고,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이라 믿는다.
이 영화를 인상 깊게 본 한 관객이, 또 다른 관객의 글 속 사례가 적합하지 않다며 격한 표현으로 비꼬는 장면을 봤다. 비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으나, 또 하나의 비극을 가벼이 말하는 데서 이미 그의 논리는 정당성을 갖출 수 없다.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현재성’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랑하는 그 관객이 암흑 너머 본 장면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 영화를 목도한 사람이라면, 나는 그 끔찍한 암흑 너머를 똑똑히 지켜봤을 거라 믿는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그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고, 우리를 ‘우리’라고 부르는 데 부끄럽지 않을 최후의 경계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얼 보았나,
또 무얼 보고 있나,
그리고 무얼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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