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빅 피쉬>, 당신의 얼굴들
내가 ‘유치원은 유치하다’며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여섯 살 무렵, 엄마는 다음 날부터 곧장 나를 그곳에 보내지 않으셨다. 몇 년이 지나 안방 서랍에서 우연히 발견한 편지엔 엄마가 유치원 선생님께 눌러 담은 손 글씨가 적혀 있었고, 내가 더 이상 유치원을 안 가도 됐던 게 이 편지 덕분이었구나 그제야 깨달았지만 어쨌든 그때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내 최고의 친구는 엄마였다.
그 시절 엄마는 우리 집에 아이들을 불러 모아 가르치는 학습지 선생님이셨다. 그 아이들은 모두 내 친구가 됐고, 유치원에 가지 않아도 난 이리저리 노느라 바빴다. 엄마도 나도 아무 일이 없을 때는 거실 전축에서 평화로운 음악이 나왔고, 엄마는 커피에 에이스 과자를 적셔 먹으며 책과 신문을 읽었다. 나는 그 옆에서 책을 쌓아둔 채 디지몬 카드를 갖고 놀았다.
엄마랑 나는 각자의 취미가 지겨워지면 저녁 먹을 때까지 수다를 떨었다. 특히 나는 어제와 오늘 나한테 있었던 그 모든 사건을 거짓 약간 섞어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며 조잘댔다. 엄마는 까르르 웃을 때도 있었고 피식하며 입꼬리를 올릴 때도 있었다. 그 시공간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한 걸 보면 내게 참 행복한 시절이었나보다.
내 세계가 초등학교로 넓어져 내게 발생한 사건들을 전부 다 엄마한테 털어놓기 어렵다고 깨달은 순간. 그 순간에도 내 세계는 우주처럼 실시간으로 팽창하고 있었고, 그 시절도 지나 우주가 성큼성큼 부풀 때마다 내게는 비밀도 많이 생겼기에 엄마에게 꺼낼 이야기보따리는 점차 숨을 잃어갔다. 어떤 날엔 모처럼 이야기를 꺼냈더니 엄마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마 그날 내 얼굴은 엄마한테 ‘유치원이 유치하다’고 말했던 것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흘러도 여전히 나는 스스로 이야기꾼이라 생각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유일한 청자였던 엄마는 수많은 청자 중 한 명이 됐고 그 모든 이야기 중 거르고 걸러진 부분만 들을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 이야기에 여전히 까르르 웃기도 하고 피식 비웃기도 한다.
가끔 나는 엄마한테 그 시절이 기억나냐고 묻는다. 전축에서 흘러나온 음악이 거실을 가득 메울 때 들어오던 햇빛이, 과자 조각과 함께 마셨던 커피 맛이, 넘기던 신문 냄새가 기억나냐고. 그때 엄마가 삼십 대 초반이었고, 나는 이제 그 나이가 다 돼 간다고. 나는 그때가 정말 생생한데 엄마도 그러느냐고.
엄마 아빠한테 낯 간지러운 이야기 꺼내는 건 여전히 어렵지만 간혹 그렇게 입을 먼저 열면 당신들은 “그래 그때 그랬지” 아니면 “그래? 그때 그랬어?” 같은 반응을 한다. 그런데 요즘엔 또 이렇게 말하더라.
“네가 이야기해서 기억이 났는데 말이야”
“네가 이야기하길래 처음으로 말해주자면….”
우리 엄마 아빠의 사십 대와 오십 대는 피할 수 없이 너무나 힘들었던 것 같다. 지나온 고통을 모두 잊고 싶었던 것일지 아니면 억지로 잊으려 했던 건지 나는 모르지만. 묻어둔 기억이 꽤 많은 것 같고, 너무 깊이 묻어 사라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영화를, 책과 음악을, 글 쓰는 것을 이토록 사랑하는데 나의 취향은 누구로부터 온 것이냐는 우리 가족의 화두 중 하나였다. 당신들은 마치 그것들을 좋아한 적 없었다는 듯. 불어불문학과인 엄마한테 샹송을 들려주고 신문방송학과인 아빠한테 누아르를 권해주니, 그것을 즐기는 당신의 얼굴엔 순간 이십 대의 표정이 비친다.
네가 추천한 그 노래 하루 종일 듣는데 말이야. 너무 좋더라. 엄마 대학생 때 정말 많이 들었는데. 과외비 벌면 제일 먼저 달려간 게 레코드 샵이었잖아. 너 그 LP 지금도 잘 갖고 있지? 엄마가 장필순 좋아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왜 그 장필순 1집 LP를 샀을까? 넌 그 앨범을 제일 좋아하더라. 엄마가 라디오에서 일일이 녹음 딴 카세트테이프도 엄청 많았는데. 그것도 다 너 줄걸. 그걸 왜 버렸을까. 그치?
네가 그 이야기하길래 아빠가 처음으로 이 얘기 하나 해줄게. 아빠 대학생 때 학생회장 나갔다가 떨어진 건 알지? 그때 학생회장이 되려면 어떤 것까지 해야 했는 줄 알아? 1번으로 출마한 선배가 나를 어디로 막 데려가. 큰 봉고에 태워서 한참 어딜 가면 술집이야. 술을 정신없이 먹여. 그리고 본인을 뽑으라는 거야. 일종의 유세인데. 아니다, 강제 섭외지. 그렇게까지 했어야 학생회장이 됐나 봐. 아빠는 그걸 몰랐어. 그래서 3등으로 떨어졌잖아. 요즘 시대에 그러면 큰일 나지.
누구보다 뚱뚱한 이야기보따리를 갖고 있었을 당신들이, 당신들도 겪고 싶지 않았을 풍파를 지나오면서 그 길에 많은 것들을 흘렸다. 줍지 못해 썩어버린 것도 있을 테고, 무거워 버린 것들도 있을 테며, 잃고 싶지 않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들도 있을 테다.
내가 죽을 때까지 이야기꾼을 자처하려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잃고 잊은 줄 알았던 당신의 기억을 되살려주고, 멈춘 줄 알았던 이야기를 잇게 하며, 지나간 줄 알았던 시절을 재봉하는 일. 나는 그게 이 삶과 세계를 더 낫게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우리 각자의 세계엔, 믿고 싶지 않은 진실과 믿고 싶은 거짓이 뒤섞여있다. 비록 다 나의 것이지만 어느 순간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헷갈린다. 그것은 척박한 삶을 살아내기 위한 본능이었을 수도 있고, 퍽퍽한 세계를 조금이나마 색칠하는 방법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씁쓸한 진실과 달콤한 거짓이 화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어쩌면 그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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