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에서도 위스키를 생산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기념하며 한국 위스키 산업에 대한 글을 써볼까 합니다.
한국의 위스키 산업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 왜 이 땅에 위스키 산업이 자라지 않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위스키 역사는 저질 위스키와 유흥문화로 얼룩져있는 어두운 시대로 가득 차있습니다. 위스키는 유흥문화라고 판단한 정부에서 내린 불합리한 규제도 한 몫 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위스키의 어두운 역사로 빠르게 들어가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위스키에 관한 기록은 대한제국 때부터 시작되며, 당시의 관세 기록을 보면 위스키는 '유사길'이라는 이름으로 음차되어 취급되었습니다. 위스키가 대한제국에 어느정도 공식적으로 수입되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도 다량의 해외 위스키를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 ‘양주’라고 불린 위스키에 대한 수요는 ‘서양 것 = 좋은 것’이라는 등식에 맞물려 항상 존재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싸 아무나 마실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국내에서 만든 저렴한 유사 위스키를 팔아보자는 아이디어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그것이 한반도 저질 위스키의 시작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는 위스키 제조를 할 만한 기술을 보유한 사업체가 존재하질 않았습니다. 옆 나라 일본도 193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자체적인 위스키 제조에 성공하게 됩니다. 식민지였던 조선에 그 기술이 들어올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그럼에도 위스키에 대한 수요는 있었고, 조선에는 이름만 위스키인 가짜 위스키가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주정에 캐러멜 색소만 탄 것이면 양호한 편이었고, 보리차를 위스키라고 속여 팔기도 했지요. 심지어 공업용 알코올에 색소를 타서 파는 행위도 있었다고 합니다. 가짜 위스키로 사람이 죽었다는 기사도 존재합니다.
이런 시대에 가장 유명한 위스키는 일명 ‘백마표’로 불린 White Horse Whisky였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멀쩡히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되고 일본을 거쳐 조선으로 수입된 위스키입니다. 물론 엄청난 고급품이었지요. 그러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영국과 일본 사이 무역로가 끊어지고, White Horse Whisky 역시 조선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해방 이후에도 가짜 위스키는 여전히 시장에 난립했고, 위스키 시장은 열악했습니다.
해방 초기 가장 인기가 있었던 위스키는 일본에서 밀수입한 토리스 위스키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토리 사의 최저가 모델인 토리스 위스키는 산토리 창업주인 토리이 신지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주정으로 만든 제품이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한민국에선 없어서 못먹는 물건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부산의 국제양조장은 일본산 위스키 향료와 색소, 주정을 배합하여 1956년, 도리스 위스키라는 레플리카를 내놓게 됩니다. 라벨까지 배껴온 뻔뻔한 가짜제품임에도 불구하고 도리스 위스키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이윽고 1960년 1월 부산 국제신보에서 도리스 위스키가 왜색 문물을 도용하여 만든 제품이라는 기사를 내놓으며 도리스 위스키는 상표 분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국제양조장의 사장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사태는 발전하고, 같은 해 2월 도리스 위스키는 상표를 바로 그 유명한 도라지 위스키로 바꾸게 됩니다.
도라지 위스키는 도리스 위스키의 후속작이라는 간판을 내걸며 잘 팔렸습니다. 곧이어 같은 해 천양주조에서 비슷한 방법을 이용해 백양 위스키, 쌍마주조에서 쌍마 위스키를 내놓으며 한국 위스키(?) 삼파전이 벌어지게 됩니다. 물론 당시의 도라지 위스키는 입지전적인 위치로 묘사됩니다.
국제양조장은 성업에 힘입어 포도주를 만들어 팔던 안양물산주식회사와 합병, 서울로 본사를 옮기며 1973년 사명을 ‘도라지양조주식회사’로 변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후 주정에 위스키 원액을 섞은 JR 의 등장과 뒤따라 더 많은 원액을 첨가한 길벗(Gilbert), 베리나인(Valley9), 드슈(De Siou)가 등장하며 시장에서 밀려납니다. 결국 1976년 도라지양조주식회사는 보해양조에 주류면허를 매각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집니다.
이 시기의 위스키 문화는 다방에서 꽃 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당시 법으로도 다방에서 술을 판매하는 행위는 불법입니다. 이것을 어떻게든 피하기 위해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는 ‘위티’라는 음료가 1960년대 말기부터 성행하였고, 이후 위스키에 물을 탄 ‘깡티’, 심지어는 쌍화탕에 위스키를 타는 영업까지 등장하게 됩니다.
’86 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에 성공한 후 정부는 위스키 산업 육성과 외화 절약 등을 이유로 국산 위스키 계발계획을 가동합니다. 국산 위스키 계발계획은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이게 되는데요, ‘특급 위스키’와 ‘국산 특급 위스키’의 유통이 그것입니다. 양쪽 모두 주정이 들어가지 않은 위스키 원액 100% 위스키입니다. 드디어 오늘날 기준으로도 위스키라고 불릴만한 물건이 탄생한 것입니다.
당시 정부는 오비, 베리나인, 진로 3사에 수입 위스키 원액 100% 제품을 내놓으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가격이 문제였습니다. 수입 원액이 여간 비싼 것이 아니었거든요. 주류 3사는 어떻게든 가격을 맞추기 위해 수입 몰트위스키와 저렴한 수입 그레인위스키를 섞은 제품을 출시하는데요, 이것이 바로 패스포트, 썸씽 스페셜로 대표되는 ‘특급 위스키’였습니다.
정부는 주류 3사에 국산 위스키 원액을 넣은 제품을 만들 것 역시 명령합니다. 이것이 다크호스로 대표되는 ‘국산 특급 위스키’입니다.
국산 특급 위스키는 출시된 지 3년 만에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바로 가격이 문제였는데요, 당시 패스포트의 출고가는 1병에 20688원으로 다크호스보다 3182원이 비쌌습니다. 당시 최저시급이 462원, 자장면 한 그릇이 500원이었으니 어느 정도의 가격인지 감이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패스포트나 다크호스나 당시 최고가를 달리는 주류였고, 80년대 위스키를 소비하는 업체들은 대체로 접대용 유흥업소라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 정도의 가격차이라면 차라리 국산보다 수입품을 선택하는 것이 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더불어 국산 특급 위스키가 출시된 것이 80년대 중반이니, 명령을 받고 위스키를 만들기까지 기술력을 확보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 더더욱 국산을 선택할 이유가 없어지지요.
90년대가 시작되고 정부에서 수입주류의 수입을 개방하자 해외의 질 좋은 위스키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불안감에 떨면서도 칼을 갈며 대비하던 특급 위스키들은 해외의 제대로 된 위스키들의 경쟁상대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국내 주류업계는 여전히 위스키 원액을 생산할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나오게 된 대책이 해외의 원액을 수입해와 국내에서 병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골든블루, 임페리얼 등의 병입 위스키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초반에는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국산이 선방하였지만, 점차 수입시장의 문턱이 낮아짐에 따라 이들 역시 천천히 역사의 뒤안길로 갈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수입 주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여러 나라에서 고급주류 사업에 뛰어드는 기업이 늘어나는 상황과 맞물려 한국에서도 위스키를 생산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드디어 한국도 위스키를 만들 정도의 관심과 자본력이 생겨났다는 생각이 들어 기쁘네요. 다음 글부터는 위스키 제작에 뛰어든 이들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 각각의 모습을 확인하도록 하겠습니다.
Emotion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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