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국경을 넘어보자(2) Rainbow Bridge
미국으로 들어올 때의 엄격한 보안절차와 달리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는 국경을 넘는 건 순식간이었다. 빠르게 나이아가라 관광단지를 벗어나 캐나다 도심으로 들어섰다. 확실히 벌링턴은 미국보다 북쪽이라 시원했던 것 같다. 제니의 집은 3층쯤 되는 타운하우스였고, 층별로 각자 개인 공간이 나뉘었다. 내게 주어진 방에 거의 없는 짐을 풀고, 그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 날 제니와 함께 벌링턴의 호숫가를 걸었다. 잘 정돈된 길엔 산책하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북적였고,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 바닷가 같았다. 미국과 캐나다가 공유하는 오대호 중의 하나였고, 제니의 손끝을 따라 지명을 들었지만 금세 잊었다. 한때 머물던 시카고에도 오대호가 있었다. 분명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는 걸 알면서도 막막할 때면 마치 바다 건너편에 그리운 사람이 기다리듯 소리를 지르곤 했었다. 눈으로 끝이 보이지 않는 물이 고작 호수라니. 그러면서도 그 규모에 자주 압도되던 시절이었다. 캐나다는 그냥 그렇게 또 다른 커다란 영어권 나라라는 인상만을 남겼다.
잠깐의 벌링턴 방문 후 제니와 나는 다시 국경으로 향했다. 제니는 캐나다 쪽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소개했다. 폭포 뒤쪽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았다. 나는 당연히 해보고 싶었지만, 제니가 망설였다. 그녀는 꽤 많이 해본 것 같았다. 대신 폭포 덕에 항상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곳에 서서 같이 사진을 찍었다. 무지개는 폭포 어딘가로 떨어졌고, 폭포의 물방울이 튀어 시원했다.
이제 다리만 건너면 미국이었다. 우리는 레인보우브릿지의 국경 검문소에 들어섰다. 캐나다인과 한국인은 각각 미국에서 일할 비자를 받을 예정이었다. 한 30분 걸릴 것으로 생각했던 절차는 수 시간이 걸렸다. 다리를 건너 육로로 미국으로 가는 사람 중에 우리처럼 취업비자에 도장을 받으려는 이들은 없었다. 훗날 알게 된 건 일반적인 여행비자가 아닌 취업비자는 공항으로 입국해야 일이 수월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담당자가 할 일이 너무 없었던 게 분명하다. 그는 우리가 취업하려는 기관에 대해 꼬치꼬치 묻기 시작했다.
나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대충 대답했고, 잘 모르는 건 모른다고 했던 것 같다. 십여 분 붙들고 있다가 그는 결국 내게 도장을 찍어주었다. 3년 반 동안 일할 수 있는 비자였고, 한 번 더 연장한 다음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까지 그때의 난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제니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나와서는 여러 군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제니의 비자가 반려된 것이었다. 완전히 안 된다도 아니고 대기 상태였다. 무언가 국경담당자는 탐탁지 않은 듯 제니를 추궁했고, 그녀는 공손한 영어로 하나씩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에서 꼬투리를 잡혔다.
이렇게 국경에서 심사를 잡아두는 경우가 있나? 나 역시 알아보기 시작했다. 국경에서 몇 시간 이상 사람을 잡아두면 불법이라, 해가 지기 전엔 해결이 될 거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결국, 우리는 저녁 여섯 시가 되기 10분 전쯤에 국경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나는 다리를 건너 미국 쪽으로 걸었고, 제니는 차를 몰고 캐나다로 돌아갔다.
그 날밤 나는 터벅터벅 걸어가, 방이 비었는지 물어물어,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의 숙소에서 묵고, 다음 날 세 번을 갈아타고 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차 없이 다니는 사람이 흔치 않아 대중교통 시간이 제한적이었다. 미국 쪽 나이아가라 폭포를 혼자 멍하니 보았던 기억이 난다. 번쩍이던 네온 싸인에 비해 지나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던 비수기의 나이아가라였다.
간만에 제니 생각이 나서 언제 이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기억이 뒤죽박죽인지 하고 한참을 뒤져보았다. 2006년에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메일 함에서 제니 이름을 검색하자 놀랍게도 무려 1000통이 넘는 주고받은 메일이 있었다. 마지막 편지는 10년 전이였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는 읽지 않은 채였다.
2014년의 편지를 2024년에 클릭해보며 무슨 내용일지 기대했다. 우리가 함께였던 시절에서도 한참 흘러 제니가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하고 캐나다로 돌아간 후에 보낸 안부 편지였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지만, 수많은 메일 속에 묻혀버린 그녀의 연락이 미안하고 민망했다.
나는 미안하다며 10년 만에 이제야 편지를 읽었다고 답장했다.
그리고 다음 날 잘 지낸다는 제니의 답장을 받았다. 그녀의 웹사이트 주소도 함께였다. 그녀의 웹사이트를 둘러보며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제니는 이제 조심스러운 말투 대신 확신 있는 문장을 쓰고 있었다.
나는 연락하고 지내자며 파이팅! 이라고 다시 답장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