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컵을 태우다

캠핑장에서 생긴 일

by 세나당

“진지한 대화는 딴 데서. 여기선 스몰톡만”


불판에 고기가 익어가고 실없는 농담들이 오갔다. 쓸 데 있는 말이 없다는 게 이 모임의 장점이었다. 의미 있는 말을 주고받는 부담이 없는 캠핑동호회 <숏캠>, 그냥 하루치 친구 사이가 되는 이 모임에 정섭이 참여한 지도 벌써 6개월째였다. 모임장 캡틴 곽은 늘 말했다. “진지한 대화는 딴 데서. 여기선 스몰톡만.” 간혹 취하거나 눈이 맞은 사람들이 진지한 또는 야릇한 대화를 시작하려고 할 때쯤엔 엄중하게 경고하는 것도 곽의 특기였다. 정섭이 참여하기 전에 벌써 몇 명이 경고를 몇 차례 받고 강퇴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곽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그의 캠핑에 대한 진심만은 누구에게나 와닿았기에 엔간해서 캡틴의 리더십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오늘도 곽은 신입 여성 멤버 셋에게 숏캠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는 다음 프로그램으로 프로젝터에 영화를 상영하려 설치하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정섭은 아늑함을 느꼈다. 깔깔깔 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문득 스치는 쓸쓸함이 오히려 살아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원래 사는 게 다 무의미한 거였지’라는 확인이 일상을 그럭저럭 살게 했다. 적당한 거리에 그럭저럭 외로운 사람들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되었다.

그날도 열몇의 남녀가 맥주캔을 들고 고기를 타지 않게 뒤적이며 시시한 말들을 주고받았다. 오늘의 주제는 커피점이었다. 숏캠에 세 번째로 참여하는 재형이 분위기를 끌었다. 지난번엔 음악 이야기로 분위기를 이끌어가더니 이번엔 튀르키예에 주재원으로 2년간 가 있는 동안 터키커피점을 배웠다며 화로에 커피를 끓이고 있었다. 정섭은 불면증이 있는 탓에 밤의 커피는 피하는 편이었지만, 밑바닥을 보고 운을 점친다는 게 재밌는 주제라고 생각하며 대세에 따랐다. 그러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어가는 재형의 태도에 묘하게 이질감을 느껴 정섭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곽의 눈치를 보았다. 곽은 부쩍 높은 목소리 톤으로 맞장구를 치고 있었지만, 사람들이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특히 신입 셋을 비롯한 여성 회원들의 시선은 반짝거리는 재형에게 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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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종이컵에 튀르키예 커피를 한 잔씩 받아 들고 맛을 음미하며 한 마디씩 했다. 알갱이가 씹히는 게 정섭의 취향은 아니었다. 덜 갈린 커피콩이 혓바닥에 굴러다녀 몇 차례 몰래 뱉어내야 했다. 그렇지만 정섭의 차례에는 ‘씁쓸하니까 좋네요.’라고 감상을 말해버렸다. 또 ‘좋다’라고 쉽게 말해버린 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바닥에 있는 무늬를 들여다보세요.”

재형은 커피를 다 마시고 5분 정도 기다리라고 하면서 특별한 주문이라고 터키어로 나직하게 외치더니 밑바닥을 들여다보라고 사람들에게 시켰다.

“무엇이 보이나요?”

정섭은 자신의 컵을 들여다보았다. 남아있는 커피가 슬쩍 흘러내려 다시 마지막 모금을 마셨다. 무언가 미끄러지듯 빠져나가고 V 비슷한 글자가 남았다.

나쁜 뜻은 아닐 것 같았다.

재형은 한 명씩 밑바닥을 봐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와 대박, 돈이 들어오려나 봐요! 보세요. 여기. 말 모양이 보이시죠?”

“누구 설레게 하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 아닌가요. 얼굴 모양이 있는데…. 남자 친구 생기시려나?”

사람들은 모두 머리를 맞대고 컵 바닥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정섭은 약간 소외된 듯한 기분으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거의 열몇 증 한둘을 남겼을 때 정섭의 차례가 왔다.

“이건 마음에 상처가 있다는 뜻인데요.”

정섭의 순서가 왔을 때 재형이 말했다.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정섭에게 집중되었다. 화로의 불길 탓인지 얼굴이 점점 뜨거워졌다. “혹시 화를 누르고 있는 대상이……?”

그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불길이 눈가까지 닿을 것 같이 뜨거웠다. 뭔가 불편해 보이는 정섭의 기분을 감지한 것처럼 재형은 다시 말했다.

“아 우리한테 이야기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알아차린 것 같은 태도가 더 기분 나빠서 정섭은 자신도 모르게 크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전여친이 바람 펴서 헤어졌거든요.”

말을 내뱉고는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상태였다. 분위기는 착 식어있었다.

때마침 곽이 건배 제의를 하며 주의를 돌리려고 애썼다.


터키점에 이어 영화 상영까지 끝나고 각자의 텐트로 돌아갈 무렵 곽이 정섭에게 다가왔다.

“힘들지. 그래도 여기선 그런 이야기하면 안 돼요.”

마지막 ‘안 돼요’를 할 때 곽은 은근히 정섭의 눈을 쳐다보며 목소리를 깔았다.

“네. 분위기 흐리면 안 되죠.” 하고 슬쩍 정섭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고 자신의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속에서 불쑥 화가 솟아났다.

‘어쩌라고! 어쩌라고! 어쩌라고!’

‘네’라고 대답해 버린 스스로가 더 짜증이 나서 괜히 텐트 피칭을 돌로 내려치다가 정섭은 뚜벅뚜벅 아까 모임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 쓰레기통을 확 쏟아버리고는 보이는 종이컵들을 집어 들고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무엇에라도 화풀이하고 싶었다.

정작 종이컵은 좀체 불이 붙지 않았다. 라이터가 닿은 부위에 연기만 조금 나다가 검은 구멍을 내고 꺼져버렸다. 잡고 있는 손만 뜨거워지고 종이컵이 너무 작아졌을 무렵 정섭은 “아야!” 하며 던져버렸다.

그때 곽이 깨어난 듯 텐트에서 나오는 소리가 들려 정섭은 그만 숨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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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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