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라 지음
작가의 전작인 「 귤 사람 」 을 공천포식당 옆 카페에서 커피를 기다리다가 들춰보았는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책을 쫙 펼쳤을 때 양쪽면을 가득 메우는 귤밭 그림과 그 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등장인물들이 “도르라!”고 외치는 클라이맥스였다. 사투리를 대충 아는 나로서는 각주를 일일이 봐야만 제대로 된 뜻을 알 수 있었지만, 제주도에 꽤 오래 살아본 사람은 감지할 수 있는 귤이 익어가는 계절의 디테일이 그림으로 전해져 무척 반가웠다.
서론이 길었는데 <여름의 루돌프>는 바로 위의 책의 올해 출간된 여름 버전이었다. 서광리에서 줄을 서지 않아도 충분히 맛있는 메밀막국수집을 찾아가 시원하게 들이키고 나와 보니 바로 옆에 작은 서점이 있었다. 이 책을 발견하고서는 계산대 앞으로 확신의 발걸음으로 나아갔다.
왜냐면 어린 시절의 아름답고 매우 짧았던 어촌과 관련된 기억이 이 책에(귤에 이어 또) 정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해녀의 삶이 등장한다. 아무리 쉽게 아무 때나 배달로 저렴하게 성게알을 살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내 기억 속 성게의 뿌리는 해녀 아주머니의 망태에 있다. 알맹이는 요만한데 포장이 더 큰 스티로폼 박스에 파묻혀 있는 조각이 아니라 뾰족한 성게를 갈라 바로 꺼낸 살살 녹는 탱글탱글한 알이 존재한다! 그래 이거지 너무 오래돼서 요즘은 이게 왜곡된 기억이 아닌가 스스로도 의심이 들기도 했는데, 이 책 덕분에 이 기억을 짚고 ‘해녀가 물속에서 앞으로 나가듯’ 나도 한 발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이 계절 여름도 나온다. 섬의 한여름은 피하고 싶던 극한의 계절이다. 올해 정말 오랜만에 육지와 제주도를 오가면서 여름을 났는데, 푸른 바다와 큰 나무에 둘러싸인 섬의 여름은 습해서 힘들다고 투덜대도 대도시와는 다른 풍요가 있는 환경이었다. 책에 나오는 주인공 할머니와 동네분들은 날이 좋으면 좋아서 비가 오면 분하지만 또 집에서 보양식을 먹고 친구들과 믹스커피를 마시며 환경에 적응하며 그때그때 열심히 살아가신다. 근면하고 평화로웠다. 계절과 무관하게 강강강강이 미덕인 대도시에서의 노동과 라이프스타일과는 다르다.
저자의 꼼꼼한 장면 묘사들 덕분에 긴 텍스트보다 훨씬 더 제주에서의 일상을 생생하게 복기할 수 있었다. 연필로 꼭꼭 눌러쓴 글자 하나까지 매우 고맙다. 앞으로는 여름에 제철 성게요리를 더 다양하게 챙겨 먹고 미역국에도 팍팍 넣어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