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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이냐 혁명이냐 」

정지돈, <내가 싸우듯이> 에 수록됨

by 수공업자

이 이야기를 찾게 된 건 코로나와 넷플릭스와 나무위키 때문이다. 하루에 서울을 지하철로 한 바퀴 돌며 고통스럽게 보내던 출퇴근 시간을 갑작스러운 재택근무 덕분에(?) 넷플릭스와 유튜브 다큐들을 보며 알차게 보냈다. 이때 < 마지막 차르 > 라는 러시아 마지막 차르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시대를 다룬 특이한 형식의 6부작 다큐를 보았다. 러시아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더 아는 게 없어서 떠오르는 대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 이름을 적어보고 나무위키에서 검색해서 살던 시기를 확인해 보았다.


니콜라이 2세 (1868-1918)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도프예프스키 (1821-1881)

표도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 (1840-1893)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1873-1943)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1906-1975)


모아놓고 보니 겹치는 시기가 없지 않아서 조각을 맞춘 듯한 성취감이 들었지만 왓챠에서 어느 댓글을 보자마자 방향은 갑자기 동아시아로 돌아온다.



(출처) 왓챠에서 발견한 어느 댓글

(위 이미지의 출처) 왓챠피디아 <마지막차르>​




아관파천을 떠올리며 저 다큐를 다시 보고 나니 다르게 보였다. 지금처럼 빠른 통신수단으로 긴밀하게 연락할 수 있던 시기도 아니고, 다큐에 의하면 자국조차 충분히 넓었단 말이다. 멍하게 창밖을 보다가 우리나라 왕족 일가에대해 이런 다큐가 나온다면 어떤 버전이 나올지 궁금해져서 검색을 하기 시작했고 정말 의외로 이 소설이 걸려든 것이었다. 게다가 어인일인지 제목에 ’ 건축‘이라는 키워드가 있었으니 앉은자리에서 전자책으로 사서 모조리 읽었다. 어느 화창한 일요일 낮이었다.


어떤 부분은 한국 근현대건축사 수업 노트 같은 이런 글을 소설이라 할 수 있을까? 처음엔 이것이 가장 의문이고 충격이었다. 프루트아이고요? 그리고 이야기로써 무척 술술 읽혔다. 후에 정지돈의 < 모든 것은 영원했다 >에서도 느꼈지만, 작가가 가 보지 못한 시대의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데 참 능수능란하다.


그렇게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은 짙을 수밖에 없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비슷한 사람과 배경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출구도 없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구는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의 아들인데 본인은 평민의 삶을 살았고 혼혈이다. 아마도 한국어보다 영어와 일어가 더 편하지 않았을까. 우크라이나계 미국인과 결혼했으며 이씨 일가와 결혼했던 여성들은 낙선재에 산 적이 있다고 한다. 약 백 년 내의 일이다. 러시아 마지막 차르와 동시대를 살았던 음악가들이 있었듯, 이 시대의 우리들도 격동의 시대와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걸쳐져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그 시대에 이오밍페이 사무실에서 흔치 않은 동양인으로 일하며 미국 생활을 하다가 한국에 들어와 그 이후 서울에서도 건축 관련 일을 하였다고 한다. 소설가의 유려한 문법을 통해 실제로 그 인물이 했을 법한 말과 생각을 읽고 있으니 장르가 혼동될 정도로 몰입하게 되었다.


건축가에 대해서도 어떤 성장과정을 거쳤는지 알려는 노력을 학부시절에 좀 더 했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이 이야기를 을 읽고 크게 밀려들었다. 그때는 왜 그리 도면과 사진만 궁금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생각의 흐름을 만들다니 소설은 참 묘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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