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물을 좋아하던 나는, 여행지를 고르면 늘 산보다는 바다를 택했다. 바다와 여행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레 스쿠버다이빙과 프리다이빙을 배우며 자격증을 따게 됐고 바닷속의 세계에 흠뻑 빠져버렸다. 30대부터는 추운 겨울 날씨를 피해 동남아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코로나가 터지고 해외를 못 나가게 되자 아쉬운 마음에 일종의 대체 종목으로 국내에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장구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런데 시간에 비례해서 실력은 늘지 않고, 아직도 갓 태어난 기린처럼 바들바들 떠는 초보신세를 면치 못하니, 스트레스도 받고 때려치울까 고민도 된다. 운동을 좋아하고 안 해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안 되고 어려운 종목이 있었나 싶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핑을 때려치워야겠다고 노래를 부르면서 서핑 샵 1년 이용권을 끊었고, 다시 그만두겠다고 하다가 서핑의 천국이라는 발리에 다녀왔고, 또 그만둬야지 하다가 강원도 양양에 집을 구했다. 말과 행동이 반대인 것이 우습지만 그만큼 오기가 생겨서 서핑,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끝까지 해보자는 심산이다.
양양의 해변이 한눈에 보이는 방 두 개짜리 집은 전망이나 위치나 여러 조건이 다 마음에 든다. 혼자 구한 건 아니고 서핑하는 동생들 몇 명과 공유하는 일종의 세컨드하우스인데 멤버 중에 MBTI의 계획성 지수 J가 100%인 동생이 있어서 그녀의 플랜과 실행력으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우리는 게스트 초대에 늘 열려있고 모르는 사람이 와도 같이 어울린다.
공연을 올리느라 한동안 정신없던 시간을 보낸 뒤, 간만의 여유가 생겼을 때 양양 집에 갔다. 혼자 유유자적 쉬고 있었는데 마침 J가 100%인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 어머니께서는 대구탕도 포장해서 가져다주시고, 참외며 자두, 그리고 체리 한 박스까지 사다 주셨다. 전날, 지나가는 말로 그 동생에게 체리를 먹고 싶다고 했었는데 그걸 전해 들으시고 챙겨주신 것이다. 인상이 매우 고우시고 목소리도 사근사근 부드러우신 어머니께서는, 딸에게 내 이야기를 많이 들으셨다면서 보자마자 폭풍 칭찬을 해주셨다. 역시 모임에는 언니가 있어야 한다며, 멋진 언니라고 이야기 많이 들으셨다며, 오가며 딸을 차로 데려다준 것도 고맙다고 하시고, 게다가 J와 대학 동문이라니 만나고 싶었다고 너무 반갑다고 하셨다. 생색낼 만큼 해준 것도 없는 데다 어머님의 칭찬에 쑥스러워져 손사래를 쳤지만, 습자지가 물에 젖듯이 마음이 뭉근하게 따듯해졌다. 하지만 이내 씁쓸함이 비집고 올라왔다. 친구의 어머니가 체리를 사다 주시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좋은 말씀을 해주시는데 왜 그랬을까…
매혹적으로 검붉은 색, 루비처럼 반짝이는, 한입에 넣으면 통통한 과육과 과즙이 팡 터지는 체리! 나는 체리 생과를 고등학교 3학년 때야 처음 먹어봤다. 너무 충격적인 맛이라 처음 먹어본 날의 상황도 기억한다. 작곡 레슨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작은 접시에 체리 몇 개를 챙겨주셨는데 그 맛이 황홀한 지경이었다. 20년도 전인 과거에는 체리가 매우 귀했고 비쌌다. 그전에는 케이크 위에 올라간 통조림이나 먹어보았지, 그마저도 자주 접해 보지 못했었다. 이런 얘길 하면 ‘미군이 쪼꼬렛을 줘서 처음 먹어봤다’ 라거나 ‘우리 때는 바나나가 참 귀했다’라는 어르신들처럼 옛날 사람으로 보일 것 같지만 그땐 그랬다.
체리를 또 먹고 싶었지만, 엄마한테 사달라는 소리는 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없는 형편에 음대를 준비하던 그때, 체리는 말 그대로 사치였다. 지금은 내 돈 주고 얼마든지 마음껏 사 먹을 수 있지만, 체리만 보면 그 첫날의 감회와 더불어 어려웠던 집안 환경, 무거웠던 집안의 공기까지 잇따라 재생된다.
나의 부모님은 자식을 사랑하셨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셨고 표현도 잘 못하는, 전형적인 옛날 분들이다. 부모가 처음이라 그랬을 거라고, 먹고살기 어려워서 그랬을 거라고, 여러 사정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해서 생긴 결핍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스멀스멀 존재감을 드러냈다.
하나밖에 없는 오빠는 25살 이른 나이에 결혼해서 집을 떠났고 본인의 가족을 꾸리면서 그 그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며, 부모님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늘 안쓰러워했다. 오빠와는 상대적으로, 어릴 때부터 자주 다투시던 부모님을 보고 자라 결혼이 무섭기만 한 나는, 소위 결혼 적령기라고 일컫는 시기를 훌쩍 넘었음에도 아직도 결혼은 남의 얘기인 것만 같다.
오랜 기간 내가 앓고 있던 우울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격정적인 언쟁으로 마무리된 뒤로, 나는 부모님에게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다. 단지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랐던 건데, 부모님은 언성을 높이셨고 그 반응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연을 끊으려고까지 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연유로 찾아뵙게 되었고, 다행히 아빠는 건강을 회복하셨다. 하지만 가족이 다 모인 어느 날, 여전히 마음에 상처가 크게 남아있던 나와는 달리, 행복하다고 웃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내 마음은 다시 굳게 닫히고 말았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안다. 대학교에 입학한 뒤로 학비는 물론 용돈을 받은 적도 없지만, 없는 살림에 음악 입시를 시켜주신 것을 포함해서 감사한 마음도 크고 애틋한 마음은 더 크다. 아마도 체리를 사달라고 말 못 한 나보다 못 사주는 부모님의 마음이 더 아팠으리라. 그리고 이제 이 나이에 부모님을 향한 원망은 더 이상 의미가 없고 앞으로 내 인생은 나 혼자 꾸려나가야겠다고 다짐해 보지만 마음에 뚫린 구멍은 메꿔지지 않은 채 가끔씩 바람이 휭휭 들어온다. J 동생과 어머니가 조곤조곤 부드러운 말투로 서로를 배려하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인상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던 것은, 우리 가족은 그런 따듯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낯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부모님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나이를 먹어서도 헤어 나오지 못한다. 유튜브에는 부모님과의 관계에 대한 영상이 많은데 ‘상처를 준 부모님들은 이런 영상 안 찾아보고 상처받은 자식들만 와서 본다’라는 댓글이 인상적이었다. 부모님과 연락을 안 하고 있지만, 부모님도 연락을 안 하시지만, 상담받고 있는 의사 선생님의 조언대로 굳이 억지로 내가 먼저 행동을 취하지는 않을 것 같다. 연락을 안 해도 불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은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하려고 한다.
어느 유명 강사의 말에 따르면,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유산은 재산이 아니라 따뜻한 언어, 말의 습관이라고 한다. 부모님에게 그런 유산은 받지 못했지만, 나에게 자녀가 생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입안을 꽉 채워주는 체리처럼, 작지만 풍성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