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중2병
작년 크리스마스에 집을 박차고 나온 지 벌써 한참이 지났네요. 전 세계인이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날에 그 난리를 치고 갑자기 나와버려서 미안해요. 새해 인사도 없이 그날 이후로 연락도 안 하고 답장도 안 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내 뒤통수에 대고 화내고 소리치던 엄마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은데 연락을 하시니… 뭐라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기분 풀렸으면 전화하라는 엄마 문자에 뭐라고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보낼 수는 있을까 조차 모르겠는 편지를 써봅니다. 이렇게라도 한풀이를 해야 속이 좀 풀릴 것 같기도 하고…
뭐든지 다 때가 있다고 하던데 철이 본의 아니게 일찍 들어 애늙은이로 살았더니 사춘기가 이렇게나 뒤늦게 오나 봅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난 어렸을 때부터 힘들다는 이야기를 두 분한테 거의 안 했던 것 같아. 배탈이 나서 아프다 뭐 그런 거 말고 심리적으로 힘들다는 이야기는 한 적이 없지. 말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알아서였던 것도 있지만 늘 자랑스럽고 씩씩한 딸이 되고 싶어서 약한 소리는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이번 일로 힘들다는 이야기는 앞으로 더욱, 절대 하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지만 말이에요.
아빠 말대로 정신력이든 뭐든 강했고, 다 잘 해내는 것 같던 내가 우울증으로 힘들어한 지 4년이 넘었네. 혼자 별의별 노력을 다했지만 풀리지 않던 마지막 응어리를 풀고 싶은 욕심에 이야기의 물꼬를 튼 것인데…
4년 반 동안, 그날이 두 분한테 딱 세 번째로 어렵게 이야기를 꺼낸 날이었는데 그렇게 듣기 힘드셨나요. 말 같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더라도, 억울해서 해명을 하고 싶으셨더라도 그 하루만, 딱 하루만 참아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래,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구나’라고만 해주거나 아니면 차라리 아무런 반응 없이 들어주기만 했더라면 마음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리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가 없어. 하고 싶은 말들을 다 토해낸 것도 아니었는데… 결과적으로 지금은 명치에 더 깊은 체증이 얹힌 것 같아.
애초에 두 분을 원망하거나 탓하려던 게 아니에요. 혹시나 대화가 잘 안 풀릴까 오죽 걱정이 됐으면 말 꺼내기 전에 책에서 본 ‘우울증 환자를 대하는 법’ 몇 가지 조항을 셋이 같이 읽자고 했을까. 어쩌면 그날 대화가 순탄하지 않을 거란 것을 직감했었나 싶기도 하고, 오빠가 통역사 역할을 하러 천안에서 올라와야 했던 것처럼 그날도 지원군 요청을 할 걸 그랬나 뒤늦게 후회도 되네.
두 분의 불화로 어린 시절이 회색빛인 것과 최근까지도 부부 싸움을 하셔서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는 것은 미안하다고 하셨으니 다시 되짚고 싶진 않지만, 부모가 자식에게 줘야 할 심리적인 안정감은 ‘부부 싸움 안 하기’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 그건 자녀 앞에서 당연히 지켜야 할 기본이라고 상담사나 의사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걸.
아빠는 그럼 나보고 정신과 전문의가 되라는 거냐고 하셨죠. 내가 당뇨병에 뭐가 좋고 나쁘고 찾아보는 건, 집에 갈 때마다 좋다는 영양제나 음식을 이것저것 사 가는 건 당뇨병 전문가가 되려는 게 아니라 아빠에 대한 내 관심과 사랑이 있다는 거 아닐까. 단지 나도 그런 따듯한 관심을 기대한 건데 그게 과했던 걸까요.
엄마는 섭섭하다는 내 이야기가 공격하는 걸로 밖에 안 들린다고 하셨죠. 두 분과 이야기하다가 난 점점 대화 의지를 상실하게 된 거고, 내가 왜 아팠는지 왜 호전이 잘 안 됐는지 원인을 찾게 된 것 같아.
사람들은 사회에서 상처받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집에 가서 치유받는다고 하지. 집 밥을 먹고 힘을 낸다거나, 무조건적으로 내 편인 가족에게 힘을 얻는다고. 안타깝지만 난 그 반대였어. 집에 가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먹고 가야 하고, 부모님의 악의 없다고 하는 말에 혼자 상처받고 그걸 밖에 나가서 다른 방법으로 풀어야 했어. 평소에는 보기 힘든 모습인데 그날은 두 분의 의견이 어찌 그리 일치되었는지, 입을 모아 말씀하셨죠. 원래 우리 스타일이 이런데 뭐가 문제냐, 네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근데 ‘원래’라는 건 그 시작이 언제부터일까? 그 말이 너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지만 난 그날 하루의 대화를 문제 삼으려는 게 아니라, 쌓이고 쌓인 아쉬움을 풀고 싶었던 거야. 단순히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 따듯한 말로 대화하자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건데 대화의 물꼬가 엉켜서 손을 쓸 수가 없어져 버렸고 일이 너무 커졌네.
이렇게 쓰다 보니 원망 조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지금이라도 그냥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크리스마스 사건이 있고 울다 지쳐 잠든 다음 날, 눈을 떠보니 기분이 너무 이상했어. 마치 전신 마비에서 깨어난 느낌? 코마 상태에서 정신을 차린 것 같은 느낌? 이제 진짜 세상에 나 혼자다 싶으면서 정신이 더 번쩍 나더군요. 어떤 이유로라도 나는 혼자 돌보아야 하니 더 이상 늘어져있으면 안 되겠다 싶어서 그날 이후로 더 바쁘게 움직였어.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빠는 유년 시절의 고통과 아픔부터 이해해 줘. 같이 자랐으니 당연한 걸 수도 있지만 좋은 기억들보단 보듬어야 할 기억들이 많다는 사실에 서로 안타까워하기도 하면서 통화가 길어지지. 오빠는 새언니랑 조카들한테 사랑도 받고 치유도 받는다고, 네가 너무 힘들겠다면서 나보다 더 속상해했어. 오빠가 아빠도 되어주고 엄마도 되어 주겠다며.... 너무 고맙지만 한편으론 더 눈물이 났어. 난 아직까지도 부모님이 내 가족의 전부인데, 기댈 수도 없고 마음을 터놓을 수도 없네.
낳아주고 길러주신 것 고마워요. 두 분 다 날 사랑한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알지만, 우리의 언어나 표현이 너무 달라서 가슴으로 와닿기 힘들어. 나 홀로 오롯이 설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마음 근육이 더 단단해지면 그때 그냥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만나요.
나이 먹고 부모님 속 섞여서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