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 효과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속담처럼 한 번 만들어진 사람의 성격은 나이가 들어도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이 갑자기 외향적으로 변하거나, 신중하고 소심한 사람이 갑자기 대범해지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남에게 매일 끌려다니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피해를 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격을 고칠 수 있을까요? 꾸준한 노력으로 성격을 고치면 좋겠지만 성격을 고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고 지낸다면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며 살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끌려다니며 살지 않으려면 상대방과 마주치기 전에 미리 대비를 해야 합니다.
남들에게 끌려다니지 않기 위한 협상전략을 소개하기 위해 실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카너먼과 에이머스 트버스키는 숫자 돌림판을 조작하는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숫자 돌림판에는 숫자가 0부터 100까지 표시되어 있는데, 돌림판을 돌리면 10 또는 65에서만 멈추게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실험 참가자 앞에서 돌림판을 돌린 후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유엔에 가입한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이 몇 퍼센트인가요?”
숫자 돌림판에 나온 숫자와 위 질문의 대답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가자들은 숫자 돌림판을 무시해야 합니다. 그러나 숫자 돌림판에서 10을 본 참가자들은 유엔에 가입한 아프리카 국가의 비율을 평균 25%, 65를 본 참가자들은 유엔에 가입한 아프리카 비율을 평균 45%로 추측했습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요?
사실 우리 뇌는 불투명한 상황에 놓이면 어떻게든 판단을 할 수 있는 기준점을 찾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마치 배가 닻을 내리면, 닻과 배를 연결한 밧줄의 범위 내에서 움직이도록 정박하는 것과 비슷해 ‘정박 효과(Anchoring effect)’라고 합니다. 처음에 인상적이었던 숫자나 단어가 기준점이 되어 그 후의 판단에 왜곡 혹은 편파적인 영향을 미치는 현상입니다.
명품 매장에서도 정박효과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구입하기 어려운 수천만 원 상당의 옷이나 소품을 가장 잘 보이는데 전시합니다. 왜냐하면 그 제품을 보고 나면 다른 곳에 진열된 200~300만원의 가방은 상대적으로 싸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주식 시장에서도 우리는 정박효과의 무서움을 경험하게 됩니다. 평소에 10만원 하던 특정 종목이 갑자기 10%가 떨어져 9만원이 된다면 우리는 저가 매수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사람들은 무슨 이유에서 이런 상황에 발생했는지 고려하지 않고 ‘지금이 기회다.’라고 느끼며 일단 매수를 하게 됩니다. ‘무릎에 사서, 어깨에 팔아라’라는 주식 명언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매수뿐만 아니라 매도할 때도 일어나며 주식 시장뿐만 아니라 부동산 등 투자를 할 때 나타나게 됩니다.
남들에게 끌려다니기 싫다면 정박효과를 이용해 보세요. 누군가 나에게 부탁할 경우 더 큰 이유를 들어서 거절하세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부탁할 일이 있으면 기존의 부탁보다 더 큰 부탁을 해보세요. 상대방은 처음 부탁이 기준점이 되어 상대적으로 나중에 한 부탁이 쉬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도와줘야지’라는 생각에 두 번째 부탁은 거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규칙이 있습니다. 큰 부탁을 할 때 너무 극단적이고 무리한 부탁을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작은 부탁을 할 때 상대방이 아예 귀를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여우와는 살아도 곰 하고는 못 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성격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협상하는 능력은 노력하면 향상될 수 있습니다. 매번 남들에게 끌려다니는 곰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도 정박 효과를 잘 활용해서 여우와 같은 영리한 모습을 보여주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