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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Oct 01. 2020

세 번의 태풍과 튼튼이의 외출


  제주도에서 태풍을 몇 번 겪어보면서 나는 태풍에 대한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서울 살 때야, 태풍이 와도 지하철 타고 출근도 했더랬다. 비록 온몸이 젖을지언정. 하지만 제주도에서는 태풍 때 어디 멀리 간다는 건 정말 위험한 일이다. 운전에 익숙하면 그나마 다행. 차가 없다면 더욱 어렵다. 예전에 다니던 회사는 중산간에 위치해있어 태풍 때 출근도 조절해주곤 했다. 태풍이 온다고 하면 집 주변 물건을 모두 치우고, 집안의 모든 창문을 단속하고, 최소 하루 정도는 집에만 있을 준비를 한다. 태풍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다. 피해 없이 무사히 태풍을 보낼 수만 있다면. 작은 섬이 온몸으로 태풍을 견뎌내는 시간을 함께 느낀다.


# 2020년 8호 태풍 바비

  다들 바비는 대단할 거라고 그랬다. 기상청이 그랬고, 그래서인지 주변 지인들도 모두 단단히 대비하라며 일렀다. 날아가 위협이 될만한 것들을 치우고 쓰러질 수 있는 것들은 쇠사슬로 바닥에 고정시켰다. 창문에는 모두 테이프를 붙이고, 마지막으로 튼튼이를 데리고 집에 들어왔다. 우리 집이 너무 좁아 뒷마당에 튼튼이 집을 지어주었는데, 워낙 물을 싫어하는 튼튼이가 강한 비바람을 혼자 견딜 생각을 하니 걱정이 됐다. 오늘 밤은 같이 있어야겠어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서둘러 산책을 시키고 집에 데리고 들어왔다. 오랜만에 목욕을 시키고, 수건으로 몸을 털며 방바닥에 뒹구는 튼튼이를 보니 좋았다. 태풍이 무서우니 오늘 밤은 같이 자자고 튼튼이에게 얘기를 하다 보니, 튼튼이에게 바깥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심각한지 보여주고 싶어 졌다. 평소 비 오는 날에는 비 맞기가 싫어 간식을 준다고 해도 자기 집 밖으로 발도 떼지 않으려는 튼튼이다.

  “튼튼아, 이것 봐. 무섭지? 밖에 이렇게 비가 많이 와.”

  문을 열고 비를 보여주는 순간, 튼튼이는 나갔다.

  아니? 나는 신발을 신으며 다급하게 룸메인 정을 불렀다.

  “내가 밖이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려고 했는데 튼튼이가 쏙 나갔어!!!!”

  “걔가 여기 들어와서 지금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문을 열어주면 당연히 나가지!!!!”

  아. 그렇구나. 물을 싫어하는 튼튼이는 지금 이 집에 들어와서 목욕을 했다. 이 집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미처 만들기 전인 튼튼이에게 아직까지 이 집이란 곧 목욕이었다. 나는 튼튼이에게 목욕으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준 것이다. 우리는 어두운 빗속으로 뛰어들어 튼튼이를 찾았다.

  ‘비가 쏟아지는 밤에 어디 멀리 가진 않을 텐데’와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새로운 곳 찾아서 멀리 가고 있는 거면 어떡하지’와 ‘가다가 차 사고라도 나면 어떡하지’와 ‘만약에 아침까지 못 찾으면 어떡하지’와 ‘못 찾아서 개장수에게 잡혀가면 어떡하지’와 ‘튼튼이 없이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이 카지노의 슬롯머신 돌아가듯 내 머릿속에서 돌아가며 튀어나왔다. 평소에 다니던 산책길을 반으로 나눠 한 바퀴 돌았는데도 튼튼이는 없었다. 개가 지나가면 짖어대는 동네 정찰견들이 짖는 소리가 나는 걸로 봐선, 튼튼이가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태풍 때문인지, 늦은 시간은 아니었음에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겠다. 산책을 많이 다닌 개들은 집을 잘 찾아온다는 말이 생각나, 튼튼이가 혹시 집으로 올 수도 있으니 집으로 향했다.

  집에 다다랐을 무렵,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초입에 하얀 물체가 보였다. 튼튼이였다! 튼튼이는 집으로 가려다가 나를 보곤 내게 오고 있었다.

  “튼튼아!!!!!!!”

  나는 튼튼이를 부르며 달려가 안고 울었다. 아니 이미 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굴에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콧물인지. 영화 속 연인이 이별하는 모습처럼. 우리는 30kg인 튼튼이를 굳이 안아 들고 집으로 향했다. 튼튼한 네 다리가 멀쩡히 있는데 말이다. 마치 잠시 집 앞에 구경 나갔다 온 표정을 하던 튼튼이는, 울고 웃고 감정이 요동치는 우릴 보며 뭐라고 생각했을까.


# 2020년 9호 태풍 마이삭

  역대급일 거라며 모두를 긴장시켰던 바비는 우리에게 튼튼이와의 역대급 기억만을 남겨주고 비교적 평소처럼(?) 지나갔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언론은 다시금 9호 태풍 마이삭이 역대급일 거라는 얘기로 뒤덮였다. 차도 뒤집을 정도의 세력이라고 했다. 바비가 오기 전 잔뜩 긴장했던 사람들은, 양치기 소년에게 속은 어른들처럼 덜 쫄았다. 바비가 오기 전, 워낙 단단히 준비를 해 놓은 터라 이번에는 크게 할 일이 없었다. 태풍 바비 때 튼튼이와 즐거운 추억을 쌓은 우리는 이번에도 튼튼이를 데리고 함께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빗줄기와 바람이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서둘러 장을 보고 들어와서 튼튼이를 산책시켜야 했다. 내가 장 봐온 음식들을 정리하는 사이, 정이 튼튼이를 데리러 갔다.

  “튼튼이가 없어!!!!!”

  정은 이 말을 남기고 빗 속으로 뛰어갔다. 우리 집은 도로에서 15미터 정도 골목 안에 위치해있다. 골목을 나가면 인도가 나온다. 이 길은 다행히 선택지가 좌회전과 우회전 밖에 없다. 직진은 없다. 태풍 바비 때 튼튼이를 찾으러 우리는 고민 없이 사이좋게 한 명은 좌회전, 한 명은 우회전을 했다. 튼튼이와 산책할 때에는 주로 우회전을 해서 집 주변 한 바퀴를 원을 그리며 돌아 왼쪽 길로 귀가한다. 튼튼이를 찾으러 간 정이 우회전을 하더니, 곧바로 튼튼이를 안고 나타났다. 우회전을 하자마자 튼튼이가 정을 향해 달려왔다고 했다. 그의 품에 안긴 튼튼이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내가 너를 내려주고 차를 빼고 있는데 튼튼이가 자기 집 문에 얼굴을 비비고 있더라고. 그리고 차 대고 오니 문이 열려있었어!”

  우리는 뒷마당에 있는 튼튼이의 집 주변에 나무로 울타리를 치고 출입문을 만들었다. 문과 울타리 사이에 긴 나무를 대 잠금장치를 만들었다. 나무를 돌려서 열면 열리는 구조다. 그 말을 듣고 나니, 튼튼이도 입이나 손으로 충분히 돌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들이 종종 문을 여는 경우는 봤어도 개가 문을 여는 것까진 본 적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다. 문 잠금장치 부분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는 건, 튼튼이는 원래 자기 집 문을 여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바람이 거세지니 무서워서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순간적으로 분 돌풍이 문을 열어준 것일까? 알 수 없다.

  마이삭은 정말로 역대급이었다. 밖에선 무언가 쿵 넘어지고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이러다 진짜 바람이 집을 때려 부술 수도 있겠구나. 강풍이 무서웠던지 튼튼이는 집 문을 열어줘도 나가지 않았다. 아, 내가 지난번 태풍 때 이걸 상상했던 건데. 비록 작고 오래됐지만 우리 몸을 피할 곳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 행복하게 느껴졌다. 이 특수한 상황에 조금 흥분한 우리는 이른 저녁부터 소주를 마시고 9시가 되기 전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일어나 보니 SNS에는 3시간가량의 정전으로 놀란 친구들의 게시물들이 올라와있었다. 우리 동네 일대가 모두 정전이 되었던 것이다. 단체 카톡방에도 우리를 걱정하는 친구들의 메시지가 와있었다.

‘ㅇㅇ동 정전이라는데 괜찮수?’

‘튼튼이네 식구들 2차 후에 숙면 들어가셨나.’

‘우리 집은 전등 누전됐어 불 안 켜져ㅜㅜ’

  아침에 눈 떠 보니 우리 집은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우리 집도 정전이 되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튼튼이만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튼튼이 집 울타리 부서졌어!!!!”

  우리 집의 문제는 정전이 아니었다. 바람이 튼튼이 집 울타리의 고정장치를 뜯어버렸다. 이런 태풍을 역대급이라 하는구나. 튼튼이는 하룻밤 더 우리 집에 머물게 됐다.

자기 집 울타리가 부서진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내 팔을 베고 누운 뒤통수


# 2020년 10호 태풍 하이선

  나흘 만에 또 태풍이 왔다. 일주일 간격으로 올라온 지난 두 개의 태풍 때문에 튼튼이는 일주일 간격으로 목욕을 두 번이나 했다. 그 싫어하는 목욕을. 튼튼이는 털 빠짐이 많은 개라 한번 우리 집에 왔다 가면 온 집안이 튼튼이 털 천지가 된다. 그래서 우리도 일주일 간격으로 대청소를 두 번이나 했다. 그런데 나흘 만에 또 태풍이란다. 제주도를 직접 거쳐간 바비와 마이삭과는 달리 하이선은 제주를 비껴갈 것으로 예상이 됐다. 이 정도라면 굳이 튼튼이를 집에 데리고 들어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 이번엔 튼튼이는 자기 집에 두자. 연이은 태풍 맞이고 조금 지치기도 하고 조금 무뎌지기도 한 우리는 무리(?) 하지 않기로 했다. 올해의 태풍은 모두 밤이 가장 고비구나. 우리는 이번에도 집에서 술을 마시며 태풍을 보내드리기로 했다.

  “어? 울타리 열렸다!!!!!! 튼튼이 나갔어!!!!!!”

  갑자기 바람이 휘익 불더니 창 밖을 보던 정이 외쳤다. 순간, 지난번 마이삭 때 부서진 울타리를 고치긴 했지만 쓱 밀면 열리는 불안한 상태라고 말했던 기억이 났다. 우린 왜 이 무리스러운 상태의 울타리를 믿고 있었던 걸까. 우리가 무리하지 않은 만큼 울타리는 무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회할 시간이 없었다. 우리는 럭비선수들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빗속으로 뛰어나갔다. 집 앞에 있어줬으면 했던 튼튼이는 역시 없었고, 집 앞 골목을 지나 이번에도 사이좋게 너는 좌회전, 나는 우회전.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느낀 바가 있었다. 역시 산책을 많이 한 튼튼이는 집을 아주 멀리 떠나지는 않는다는 것. 놀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는 것. 자유롭게 살고 싶은 튼튼이를 우리가 괜히 붙잡아두고 답답하게 살게 하는 게 아닌가 고민했던 적이 있는데, 튼튼이는 새로운 냄새에 대한 호기심도 있지만, 그만큼 우리에 대한 사랑과 제 때 밥과 간식이 나오는 집에 대한 애착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실수로 문을 열어줘서 집을 나갔던 첫 번째 태풍 때도,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간 건지 바람 때문에 열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태풍 때도, 모두 튼튼이는 스스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세 번 째라 다소 침착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는 못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여전히 나를 불안하게 했다. 떨리는 마음을 안고 옆 건물부터 샅샅이 살폈다. 경험 상 튼튼이는 도망가려는 게 아니라 ‘우와? 놀 수 있네? 냄새 맡으러 가야지!!!’의 상태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멀리 뛰어나가지 않았다. 역시. 튼튼이는 옆 건물 주차장 트럭 밑에서 고양이를 관찰하고 있었다.

  정을 불러 튼튼이를 안고 다시 집으로 향했다. 튼튼아 오늘도 실내 취침이다. 목욕은 안 해도 돼. 나흘 전에 했으니까. 여기서 우리랑 같이 껴안고 쉬자. 태풍이 지나가고 우리는 좀 더 가족에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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