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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주 Jul 22. 2021

과거를 몰라도 괜찮아요

  잠시 우리집에 머물다 간 푸들이 있었다. 그 아이는 차에 타고, 이동하는 건 잘했지만 도착할 때가 되면 낑낑거리며 울었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가더라도 그 아이는 목적지에 다왔다는 걸 귀신같이 알아챘다. 내릴 때가 되면 품에 파고 들며 울었다. 불안한 감정이 느껴졌다. 마치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우는 것 같았다. 나는 이 아이가 차에 태워져서 낯선 곳에 버림 받은 경험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차도를 불안하게 떠돌다 구조된 유기견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분리불안이 심했던 그 아이는 지금은 하루 종일 함께 지낼 수 있는 보호자를 만나 많이 평온해졌다. 여전히 나는 왜 그 아이가 차에서 내릴 때만 되면 불안해했는지 궁금하다. 개는 과거를 말하지 않기에, 그저 추측할 뿐이다. 마음 속에 상처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한데 무엇 때문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아니, 인간의 언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현재의 행동은 과거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고, 과거는 현재의 이유가 되어준다. 나는 가끔 나를 설명할 때 과거를 꺼낸다. 내 행동을 이해받고 싶어서다. 재미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불안에 떨었던 그 푸들처럼, 나도 가끔 남들이 보기엔 별거 아닌 일에 좀 예민하게 반응할 때가 있다. 불안에 떨거나, 극도로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거나, 울기도 한다. 남들은 못 느끼는 무언가가, 내 안에 있는 스위치를 눌렀기 때문이다. 그 푸들도 목적지에 다다라 속도를 늦추는 자동차와 짐을 챙기는 차안의 부산스런 공기 때문에 가슴 깊이 숨겨둔 아픈 스위치가 작동했던 것 같다. 누군가에겐 기분 좋은 공기일 수 있는 것들 때문에 말이다.


  슬프게도 대부분의 경우 나에게 스위치가 생기게  과거를 설명한다는  힘든 일이었다. 상대방이 전적으로 공감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클수록  어려웠다. 상대방은 나와 같지 않고, 같은 상황에 있지 않았으므로 나의 예민한 반응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람은 같은 상황에서도 모두 다른 감정을 느낄  있다는  깨달아갈수록, 나의 상처를 온전히 이해받기 위해 길고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이 과연 도움이 되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내가 가지고 태어난 내면의 성향과 나를 둘러싼 외부의 영향의 상호작용으로 나라는 사람의 하루하루가 쌓여간다. 나와 내면의 구조가 같은 사람이 없고 외부의 환경 또한 모두 다르므로 인구가 60억이라면 60억가지의 경우의 수가 생긴다. 사람들의 삶이 이러한데, 나의 복잡한 상처를 온전히 이해해주길 바란다는  어쩌면 기대가 너무 높은  아닐까?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숨기지 으며, 이해받기 위해 애쓰지도 않는 개를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남들에게 나의 행동을 모두 이해받으려고, 혹은 설명하려고 너무 애쓸 필요는 없겠구나. 상대방이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두려워 나의 감정을 숨기거나, 상대방이 나를 단번에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의 깊이가 얕은 것이라 여기지 말자. 왜냐하면, 어느새 나는 그 푸들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를 알 수는 없어도 말이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면 우는 행동’을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나거나 힘들지 않았다. 그저 웬만하면 차를 타고 이동할 일을 피하고, 어쩔 수 없이 차에 태워야 한다면 도착지에 다다를 때 쯤에는 더 많이 쓰다듬고 위로해주었다.


  그 푸들은 내게 과거를 설명하지 않았고, 나는 그 아이의 과거를 몰라도 괜찮았다. 때로 어떤 것들은 말로 설명한다고 이해가 되는  아닌가보다. 만약  푸들이  추측과는 다른 이유 때문에 런 행동을 한 할지라도 괜찮다. 이미 나는  아이의 스위치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어쩌다 생긴 스위치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스위치가 생겨버렸다면, 더이상 스위치가 눌려 힘들어지지 않을  있도록 해주고 싶다.  아이에게 도대체  상황에서 무서워할 것이 뭐가 있냐며 가르치려들거나 따지지 않았다. 다만 스위치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많은 것이 해결되었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간다는 건,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가능했다.


  나는 어쩌면 남에게 이해 받아야만  감정이 정당해진다는 착각 속에 있었던  아닐까. 그러나 남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든, 나의 상처는 상처다.  상처를 건드리면 아픈  어쩔  없는 사실이다.  아픔을 타인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물론  아픔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가까이  필요는 없지만, 사랑한다는 이유로 상대방이 나의 아픔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왜 스위치가 생겼는지는 이해할 수 없어도 내게 스위치가 있다는 건 알아주리라. 어느 순간부터 나는 과거를 꺼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아픔이 있는 푸들을 사랑했던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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