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민주 Aug 28. 2021

말 없는 개를 만나서

  개를 사랑하게 된 후 생긴 변화가 있다면, 개의 입장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사랑하면 궁금해진다. 그래서 물어보고 싶어 진다. 혼자 집을 지키는 시간 동안 너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엎드려 나를 바라보는 저 눈빛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개는 사람의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답을 들을 수가 없다. 가끔 꼬리가 대신 말을 해주기도 하지만 나는 보다 자세한 답을 듣고 싶다. 결국 나는 개의 입장에 대해 상상해보게 된다. 물론 나의 상상이 답에 가까운지는 알 길이 없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내가 가장 집착하는 것은 ‘뇌’, 즉 ‘생각’이다. 사랑한다면, 나는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모두 꺼내보이고 싶어 진다. 내 뇌 구석구석을 상대방이 알아줬으면 좋겠고, 상대방에 대해서도 구구절절 알고 싶다. 육체와 정신 중 하나를 택하라면 정신을 택하겠다. 육체적인 관계가 뜸한 건 견딜 수 있지만 정서적 소통이 소원해지는 건 위험신호로 느껴진다. 이 분야에서의 기호가 맞는 사람을 만나는 게 중요했다.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오직 잘생겨서 만났던 사람이 있다. 육 개월을 간신히 만났지만 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건 없었다. 흐르는 물이 이 항구 저 항구에 닿듯이 내 취향도 모른 채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다가 처음으로 다른 커플에게 부러운 감정이 들었을 때, 드디어 알게 됐다. 내 취향을.


  우연히 회사 선배 부인의 블로그를 보게 되었다. 소소한 일상을 적은 글이었다.

  ‘남편과 술 한 방울 안 마시고 새벽 5시까지 이어진 수다. 내 남편은 몸이 섹시하진 않지만 뇌섹남이다. 뇌가 섹시한 게 이렇게 매력적일 줄이야. 다시 태어나도 뇌섹남과 결혼하고 싶다.’

  부러웠다.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부부간 오고 가는 다정하고 재미있는 수다.’ 그렇다. 내가 내 연애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나는 유난히 생각이 많았다. 생각이 너무 많은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외로웠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며 그 시간 속에서 잔잔하게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나 보다. 내 생각도 꺼내 보이고, 그만큼 상대방의 생각도 꺼내 보면서. 아마도 많은 이별의 밑바탕에는 이 문제가 있었다. 상대방이 내 생각을 궁금해하지 않고 내가 그의 생각을 들을 마음이 안 들 때 이별은 찾아왔다. 세상에서 나와 뇌구조가 가장 비슷하다고 여겼던 구남친과는 롱디가 되면서 멀어졌다. 함께하는 시간의 양이 절대적으로 줄어들면서 나누는 생각의 양이 줄었고 사랑이 줄었다.


  다정하고 대화가 많은 사람을 만났다. 둘 다 술을 좋아해서 매일 밤을 적셔가며 수다를 떨었다. 어쩌다 일도 같이 하게 되면서 하루 종이 붙어 지내며 얘기를 나눴다. 그 어느 때보다 대화는 넘쳐흘렀다. 풍족한 대화가 행복을 가져올 줄 알았다. 아니었다. 대화와 싸움의 양은 비례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싸움도 뒤따라왔다. 둘 사이에 점점 대화가 없어지며 조용한 이별을 맞이했던 패턴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대화를 생산해내는 기계를 만들려고 했는데 가동해보니 싸움을 찍어내는 꼴이 되었다. 설계가 잘못된 건지, 원재료가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둘을 비교해보자면 좀 더 예민한 쪽은 나였다. 내가 더 생각이 복잡한 사람이었다. 복잡한 내 생각의 자세한 갈래들을 모두 이해받고 싶었다. 왜 이것도 이해 못 하냐는 마음이 들면 그 사람이 못나보였다. 아, 그거였다. 나는 단지 ‘생각을 나누는’ 것만을 바랐던 게 아니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나누는’ 것을 바랐던 것이다. 대화가 깊어지면 드러나는 생각의 차이를 성숙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구남친과도 단지 거리가 멀어졌기에 헤어진 게 아니었다. 거주지를 옮기고, 일하는 패턴을 바꾸고, 취미 생활이 달라지면서 마음이 식었던 것이었다. 이 사람만큼 나와 비슷한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이상 ‘나와 비슷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므로.

 

  내 욕심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건 내려놓아야 하는 욕심이다. 조물주가 사람을 만들 때 한 사람을 둘로 쪼개 운명의 짝을 설정해 놓았다는 건 뻥이다. 그는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또 하나, 모든 생각을 나누고 싶은 건 좀 덜어낼 필요가 있는 욕구다. 내 생각은 내가 소화해야 한다. 눈물지으며 다퉜던 밤들은 나와 같은 생각이기를 기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기댈 문제가 아니다.


  나는 개를 사랑하고, 개도 나를 좋아하지만, 우리 사이에는 말이 없다. 지금 내가 개를 보며 하는 생각을 개가 알아차릴 리도 없다. 나를 바라보는 개의 눈빛을 나도 내 멋대로 해석할 뿐이다. 생각을 나누지 않아도 사랑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개를 존중하고 개도 나를 소중하게 여긴다. 우리는 서로 그걸 안다. 그렇기에 말이 없어도 사랑이 유지된다. 말없이 개와 함께 앉아서 이 감정을 느꼈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꼭 서로의 모든 생각을 다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개의 단순한 표현이 못나 보이지 않듯, 그의 단순함도 그대로 받아들여 본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면 충분하다. 사랑하지 않는 존재에게는 이해해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을테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기분 좋다구? 응. 나도 좋아.


매거진의 이전글 과거를 몰라도 괜찮아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